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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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정된 구원인가? 예정된 멸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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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석 [pedro2311] 쪽지 캡슐

2007-12-09 ㅣ No.5993

형제님께서 질문하신 예정구원론은 먼저 구원론을 살펴보고,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구원되도록 또는 구원되지 않도록 예정하셨는가?  라는 예정론을 살펴봄으로써
어렴풋이나마 하느님의 구원예정섭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읍니다.
 
저는 개신교 교회에 출석한 적이 없는 순전한 가톨릭 교인으로서 가톨릭 신앙 안에서
살펴보는 가운데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이론도 간간이 다루고자 합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해본 적이 없이 성경봉독과 성사생활(교회생활)을 통해
제 나름대로 배운 것, 체험한 것, 깨달은 것에 근거하여 글을 쓰게 되므로
일부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고 형제님의 의견에 반하거나
형제님께서 납득하시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과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교의헌장, 교리서)이 개인의 신앙에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주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된 상태가 교회임)
 
먼저 구원에 대해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읍니다.
즉 구원은 무엇이며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떠한 상태냐 하는 것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사망의 멍에에 매여있는 비참한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의화 성화) 불멸의 몸(영화)을 받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섭리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죄인을 회개하게 하시고 믿음을 주시어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지상교회에서 성사생활을 통해 거룩하게
하시고(보속이 필요한 영혼들은 연혹에서 정화를 거침) 정해진 때에 주님
께서 재림하시어 구원된 이들은 변화된 불멸의 몸을 받고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주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정화가 필요한 영혼은 연옥을 거침),
구원이 완성되면  "새하늘 새땅"이라는 현재의 세상과
다른(묵시록에 의하면 밤이 없고 바다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공간임)
하느님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시간적으로 주님의 재림이 선행되어야 하고
공간적으로는 새하늘과 새땅이 임해야 하고 믿는 이 입장에서는 몸이 불멸의 몸으로
변화(영화)되어야 하므로 지상의 어느 누구도 구원받았다 라고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느님의 계시와 은혜를 그토록
많이 받으신 바오로 사도 조차도 필리피서 3장12절에서  부활(영화의 몸)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새하늘 새땅)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므로  "완전히 구원받았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개신교 신자들이 구원받았다 라고 경망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문을 통과하여 새하늘 새땅까지 이어지는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 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될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향한 문을 열고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시간적 공간적으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구원의 여정(길)에 들어선 것을 가지고 마치 구원이 이미 완성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정의(의화 성화 영화)를 다시 정리해보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하여 믿는 이가 물(물세례)과 성령(성령세례)으로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를 의화(개신교는 칭의라고함)라고 합니다.
골로사이서 3장 3절에 보시면 이렇게 새로 태어난 속생명(새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감취어져 있으므로 겉으로 인식할 수 없으나, 당사자는 영적체험에
의해서 자기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음을 주관적으로 알 수 있읍니다. 
바로 이 새생명에 의하여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 즉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거듭난 이는 자녀가 되므로 하느님을 친밀하게 가까이 느끼면서 영적으로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악의열매)은 스스로 하지 않게 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을 하게 됩니다. 억지로 하게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쁨으로 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범하면 속생명에서 샘솟던 기쁨과 평화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움이 임하게 되어 믿는 이의 심령에 눌림이 생겨서 삶이 공허해지고
힘들어지기 때문에 몇번의 체험을 거쳐 점차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게 되는 것을
성화(거룩하게 됨)된다고 말합니다. 저희 가톨릭에서는 의화에 성화가 내포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고 개신교는 의화 후에 점차로 성화된다 라고 주장하는 것 같읍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교리들이 생기는 것은 제가 판단키로, 의화는 우리의 영이 중생하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영에는 시공간적인 요소가 없으므로 영에는 성화와 영화까지가 포함된
상태로 의화되어 있으므로 가톨릭의 교리에 따라 의화된다 할 때 성화를 포함한 의화라는
주장이 영적으로는 맞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실제에 의하면 의화된 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성령의 역사와
성사생활로 거룩해지므로 의화 후에 성화되며, 심지어 성화된 사람만이 의화되었다는
것을 후행적으로 증명하므로 성화에 의화가 포함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실제 신앙생활해나가면서 제가 체험하는 것은 성화에 의화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화와 성화를 영적으로 고찰해보면 의화는 전적으로 새생명(주님의 부활생명)
으로 거듭난 영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영안에는 이미 의화 성화 영화까지가 모두
내포되어 있읍니다.
 
믿는 이의 중생한 영 안에는 의화 성화 영화가 모두 내포되어 있지만,
믿는 이의 혼(의지)은 아직까지 죄인이었을 당시의 사욕편정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성령의 정죄(양심의 정죄)에 따라 성사생활을 해가며 지상교회 안에서
거룩한 삶(성화)을 살아가는 것이고 만일 부족하다면 죽어서 연옥에서까지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성화는 영차원이
아닌 혼(의지)을 사욕편정으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 안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더니 사람이 변했다 라고 말할 때 변화받는 것은 우리의 혼(의지)입니다.
예를 들면 믿기 전에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던 사람도 점차 변화되어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면 마지막으로
그러한 거룩함에 합당한 영광의 몸(불멸의 몸)을 주님 재림시에 받게 되는데
이게 바로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즉, 구원의 완성은 영의 중생(의화)로부터 시작하여 혼(자유의지)이 거룩하게 성화되고
마지막으로 몸이 영화로운 불멸의 몸을 받는 것으로 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몸이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전인 구원이고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혼(자유의지)이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절대순종)이라 할 수 있읍니다.
즉 성화의 끝이 바로 영화(불멸의 몸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혼(자유의지, 자아, ego)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절대의지
안에 절대순종하게 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구원의 마지막 부분이며 그때 불멸의 몸을 주님 재림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 배움과 체험에 입각하여 전술한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있다면
제가 쓴 내용이 잘못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그러면 예정론에 대해서 제가 아는 범위에서 말씀드리겠읍니다.
 
우리가 가진 의문은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창세전에
미리 택하시어 택한 자만 구원하신다는데 혹시 나는 택함을 입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의문일 수도 있을 것 같읍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하느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실 때, 그 때 택함이라는
선행적인 결정(예정)에 의해 구원이 후행적으로 임하는 것인가? 라고
하느님께 여쭈어 보면 하느님께서 과연 어떻게 답변하실까? 에 대해
성경을 통해 고찰해 보는 것이라 하겠읍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중요한 것이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심에 의해
통시적으로 미래에 일어나는 모든 일까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 잘 믿고 성사생활 잘해서 의화
성화 영화되는 사람을 선택하신 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하느님의 예정섭리를
이해함에 있어 두가지 고려사항이 있는데, 그 첫째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하는 절대예정인가? 라는 것이고, 그 두번째는 예정이 선행되면 그대로
후행하는 것인가? 입니다.
 
먼저 성경 창세기에 보시면 선악과를 취하는냐 여부를 아담의 판단에
맡겼음을 보게 되는데 이로 미루어 하느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 자유의지를 행함에 따른 결과(불순종에 따른 저주와
죽음)를 인간이 감당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읍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에 반하여 하느님께서 절대예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예정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생명나무만 선택하도록 절대예정을 하신 게 아니고
자유의지로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중에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생명나무을 선악과나무보다 앞에 두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여 하느님의 임재 안에서
살기를 바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두번째 고려사항에 대한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선행된 예정이 후행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느님께서 저에게 "자유의지를 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하시고는 사실상 딱 하나만 두고 무조건 그것을 강요하시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정이 선행한다면 우리에게 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행한 예정 그대로 후행하는 절대예정일 수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예정섭리를 펼치시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하느님은 사람이
하고자 하는대로 놔두시는 방관자 이신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순종의 길에는 파란불을 켜주시고 불순종의 길에는
빨간 불을 켜주심으로 우리에게 순종의 길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시므로 하느님께서 방관자이실 수는 없읍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의 미리 아심(통시성)이라는 전지하심을 고찰해보시면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도 다 아시는데 누가 순종하여 구원받는가?
를 미리 아시므로 선택하심에 있어 그릇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예정하셨을까요?
순종, 축복, 영생이라는그리스도(생명나무)를 통한 구원을 예정하셨읍니다.
그리고 구원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을 예정하셨읍니다.
즉 자유의지로 구원과 멸망 중에 스스로 택하도록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구원을 못받고 멸망하는 사람도 예정되었을까요?
자유의지로 불순종을 행하며 저주와 멸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몸소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피흘려 수난하고 대속하시어 믿는 자를
값없이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의 구원하시고자 하는 갈망을 끝내 저버리고
자유의지로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하느님도 어찌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총으로 회개를 시키려해도 안되는 불신자(이때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자유의지의 충돌이 생기는 것임)를 하느님께서는 멸망하게 두신다는
것입니다.(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의 은총을 그들에게 베푸소서)
 
신명기에 보시면,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0장 15절의 말씀 "보아라, 내가 너희 앞에 (순종하면) 생명과 행복,
(불순종하면)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즉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와 더불어 우리 앞에 순종(영생)과 불순종(멸망)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순종과 축복과 영생의
길을 가도록 하느님께서 예정하셨지만, 만일 불순종하고 저주받아 멸망하는
길을 우리가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이미 말씀으로 법을
세우셨기 때문에 구원할 도리가 없어 멸망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용한 복음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멸망과 생명 중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로 택일하라는 것입니다.
 
좁은 으로 들어가라 (루카 13,24-24)
13 “너희는 좁은 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위 복음서를 읽으실 때 문이 있고 그 다음에 길이 있음에 주목하셔야
하는데, 문은 의화(영의 중생)을 의미하고 길은 성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읍니다.  신명기의 순종과 불순종의 두 길을 예정하신
하느님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서에 똑같이 멸망과 생명의 두 길(문)을
말씀하십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인 그리스도(절대순종)를 따라야 하겠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상 두 길을 예정하셨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생명과 멸망 중에 생명을 선택하기를 바라신다는 성경적 진리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읍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러 몸소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그 모진 수난을 견디고 피흘리어 십자가 상에서 구속을 완성하셨으므로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죄인)에 대한 사랑은 이미 증명된 것입니다.
다만 죄인인 우리가 회개하고(은총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느냐(순종의 길)
아니면 하느님을 뒤에 두고 자유의지로 불순종의 길을 계속 가다가
멸망당하는냐 인 것 입니다. 즉, 하느님은 구원하시고자 하시지만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멸망의 길도 예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멸망당하는 그 사람은 하느님이 예정하셔셔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자유의지로 멸망의 길을 걸어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럼 아예 멸망의 길을 예정하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 질문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말고 아예 로보트로
만들지 않으셨냐고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이라 하겠읍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하느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해도 구원을 거부하면
멸망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멸망을 예정하신 것이라기 보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로 멸망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어떤 사람은 구원되게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되게 하느님께서 예정하셨다 라는 절대예정론으로 이해 되는데
바로 이와 같은 절대예정론은 자유의지와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와
선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시어 멸망시키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하여 하느님의 선하심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적인 하느님의 뜻은 구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시고 십자가 구속까지 하셨지만
구원을 끝내 거부하는 그 사람은 본인의 자유의지로 멸망을 선택함으로써
멸망하게 되는데 멸망을 예정하신 하느님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멸망을 택하여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하느님은 멸망을 예정하시고 멸망당하는 것을
즐기시는 나쁜 하느님으로 오해하게 되므로 예정론에 대해
주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에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정론을 설명함에 있어 자유의지로 순종하는 것이 행위냐 아니면
믿음이냐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읍니다. 만일 순종이 행위라면
행위가 구원을 가져오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는 불변의 진리가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에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순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믿음에 의해 중생된 영에 거하시는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행위라고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즉 행함이 수반되는
살아있는 믿음 만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야고보 사도가 강조한
그러한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에 의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중생한 영에 거하시는
성령의 성화 조력 은총에 힘입어 거룩한 생활과 선행이 나오는데
그러한 선행이 나오는 것도 은총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행했지만 모든게 은총으로
말미암는다 라고 코린토1서 15장 1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구원과 행위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선행이 나오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 즉 거짓 믿음이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믿는 이는 당연히 거룩한 삶을 살고 선행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행에 따라 나중에 받게될
영화의  몸의 영광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바오로 사도가 서신서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코린토1서 15장 41절)
 
 "해의 광채가 다르고 달의 광채가 다르고 별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별들은
또 그 광채로 서로 구별됩니다"
 
즉 그러한 선행으로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거듭난 이들은
선행에 따른 상급을 받게 되는데 좋은 상급을 받으면 보다 더욱 광채가 나는
영광의 몸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법들이 있지만 가장 우선되는 법은 전능하신 하느님 뜻대로
공의로움에 근거해서 법을 세우실 수도 있고 폐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하시고 싶으신 대로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주님(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화의 길을 걸어 부활의 몸을 받는 그 날까지 순종할 수
있게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겠읍니다.
 
형제님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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