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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직 신앙이 뭔지 모르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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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젠 성당에 더 이상 다니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성당 단체 생활을 한 것만도 어느덧 14년인데.. 제게 남은 것은 껍데기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가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그저 작은 선량한 이로 생활 속에 머물면 그만이다.. 나는 종교 안에서 기쁨, 감사, 평안, 위안을 얻기보단 미움, 증오, 절망, 상처만을 느꼈을 뿐이다..
마음이 참담했습니다. 하지만 신앙마저 홀가분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자유로움마저 가져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지도 신부님께 메일을 드렸습니다. 이젠 사람이 싫고 하느님이 싫어요. 돌이켜보면 전 종교 안에서 한번도 진실로 감동해본 적 없었어요. 메일을 쓰면서 정말 서러웠습니다. 절로 눈물이 나더군요.
그리고 며칠 후 지도 신부님을 찾아뵀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신부님께선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맞아주시더군요. - 그래.. 무슨 일이니.. - 신부님. 저 이제 성당 안 다닐래요. 그냥 싫어요. - 음.. 메일 읽었다..
전 메일에 썼던 내용 그대로를 말씀드렸습니다. 종교 안에서 마음이 평안할 수 없네요. 살면서 진심으로 감동 받아본 적도 없고.. 이제 미사를 드려도 전혀 기쁘거나 감사하지도 않고.. 그동안은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그저 우쭐거리는 맛에 성당 활동 했어요. 그게 다예요.
그러자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신부님께서 정색을 하시며 말씀하시더군요. - 네가 아직 신앙을 모르는구나. 왜 그렇게 어린 생각을 하니. 생각지 못한 말씀이라 무척 당황했습니다.
(신앙을 모른다고요..? 누구보다 교회 안에서 많은 것을 봤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라고 너무 많이 알아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신부님께서 그러시더군요. - 신앙은 감동이 아니야. 그걸 모르는 걸 보니 넌 아직 멀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울 때에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법이 아니야. 좀 더 기다리면서 그릇을 키워 봐.
그 동안도 신부님께 종종 철없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저 선배들하고 있을 때 농으로 그리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전 제가 어느 정도 나잇값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신부님께선 한마디로 딱 잘라 제게 어리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부아가 치밀더군요. 그래서 고개를 발딱 쳐들고 잔뜩 볼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 신부님. 지금은 제게 위로를 해주셔야 할 때 아니예요? - 위로는 무슨 위로. 다른 신자들이라면 위로하겠다. 하지만 주위를 돌이켜보고 너를 돌이켜 봐. 네가 네 뜻대로 하지 못한 게 뭐가 있니. 부모 잘 만나, 공부할 여건도 돼, 머리가 나쁜 것도 아냐, 그렇다고 의식주 걱정을 하길 하나.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조건 아니니. 서울역 노숙자나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실상 하고 싶은 말은 많았습니다. 그렇게 비교하자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부님은 누구보다 제 상황을 잘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교회 안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예요?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냉담했을 거라구요..
하지만 그런 소리들을 애써 삼켰습니다. 차마 신부님께 대들 수 없었거든요. 돌아오는 길은..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온 기분이었습니다. 매정하고 박절하게 말씀하시는 신부님께 많이 서운했습니다. 어쩌면 신부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지? 나보고 어리다고? 그 동안 얼마나 많이 참고 견뎠는데.
근데.. 이상하게 며칠 동안 귓가에 신부님 말씀이 맴돌더군요. 네가 아직 신앙을 모르는구나. 신앙은 결코 감동이 아니야. 그런 걸 보니 넌 어리다. 어려울 때는 중요한 결정을 하면 안돼.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감동이 아니라는 말씀.. 그리고 어려울 때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법이 아니라는 말씀.. 그냥 그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신앙은 감동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감동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제가 어려서일까요..? 조금 더 자라서 그릇이 커지고.. 신부님 말씀이 진심으로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오기를.. 막연한 마음으로 바래봅니다. 그 때까지는 무감동의 신앙이나마 간직하고 있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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