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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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61.106.108.*]

2007-02-08 ㅣ No.4950

 

†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현존하십니다. 따라서 자매님도 그 믿음의 닮음과 실천에 따라 살아계신 성모님과 하나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매님의 수호천사 역시 매일 아침이면 금자를 가지고 자매님께 파견되어 그 사랑의 보따리를 가지고 잠들면 하늘나라로 오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청포장수 울고가듯 그렇게도 오르시겠지요.

세상에서 제일 선교하기 힘들다는 남중내편 또는 안의 해가 교리로서 다시 태어남도 매우 경건한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일은 남편께서 예비자 교리에 임하시는 동안에도 충분히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매님과 4살 된 아이가 함께하는 가족간의 사랑의 기도로 더욱 내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서 우리는 초대 공동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교회안에서 공동체는 반모임, 구역모임을 토대로 신심단체, 성령 운동권등으로 확산되어짐을 실감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세상속에서의 빛과 소금의 소명 받았음을 배우실것입니다. 지금도 받고 있지요.

 

따라서 반모임은 자매님께 있어 매우 소중한 공동체 활동의 첫 걸음이었을 것입니다.

자매님께서 오랫만에 재개하는 신앙 여정에 있어 그러한 반모임 가운데 첫번째 장애를 만나신듯 합니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닮아 조용한가보군요.

우리 아이들도 조용한 편인데 언젠가 어느 동정녀가 이룬 아이들 공동체에서 워낙 아이들이 조용하고 예의 바렀기에 정작 우리 아이들이 심하게 낯을 가리고 요즘 왕따인 아빠 등 뒤로 숨으려 했던 사건이 기억남은 왜일까요?

 

네살이라면 엄마의 손길이 아직도 많이 필요하기에 반모임을 위시하여 미사에 이르기까지 엄마도 기도에 집중하기 힘든 그것을 이웃과 분담해야 할 때가 많고 또한 '당신 아이때문에 도무지 영성체 예식이 힘들었다'며 노하셨다는 신부님조차 만남으로 크게 상처받았던 어느 엄마의 경우도 더불어 묵상케 될 것입니다.

 

이 신부님과 '애들 같이 노는사람 없어요?'라고 했던 그 사람과의 공통점이 엿보이는군요.

일단 긍정적으로 볼 때 그것은 '총대를 매었슴'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부족한 우리 죄인들이 그저 내가 먼저 기도하고플 때의 그 느낌(윤리성이 필요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때문에 그것을 방해받기 싫은 가운데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합니다.

이에 자매님께선 아이와 남편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맘으로 그분을 용(얼굴 容)서(마주할, 서로胥)하시고 또한 자매님을 사랑하기에 베풀어주시는 첫번째 수련과정으로서 금번 미사때 봉헌해보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우리가 부족하기에 '싫어하는 것은 죄가 아니요. 미워하는 것이 죄다'를 되새기면서 말이지요.

 

간섭으로 여겨질 때 세상에서 그런 말을 좋아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저같은 경우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속에 담고 풀지 못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어느 성지에서 현재 제가 미사곡을 전부 봉송하고 있는데

성지 본당이 신자수에 비례하여 그날은 작았기에 제대위로 모두를 초대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제 바로 옆에 앉으신 어느 할머니와 어린 손녀가 유난히 불안정한 모습으로 저의 자아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미사곡을 부르면서도 많은 분심과 싸워야 했고 연신 이분들의 그것을 눈에 담고 보기 싫은 그것에 연연하고 있었으며 할머니와 손녀 또한 미사에 집중하기보다는 둘다 똑같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는 아이의 등에 손가락으로 그림 그리기에 바빴고, 반주자마저 실수를 하기도 하였는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할머니와 그 엄마 또한 성체를 모시지 못하고 도중에 손녀와 함께 나가는 기억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가톨릭(보편성) 교회내에서도 일반 사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들을 자주 만나게 되겠지요. 이에 대한 치유의 답 역시 오직 하나로서 '그분은 커지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는 어느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도 또한 지난날의 Bady(몸체)에 연연할 수 밖에 없던 냉담 여정을 지나왔기에 내적으로도 Soul(혼)에 집착하지도 말고 주님이신 Spirit(영)으로 재빨리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에 이것을 세세히 진단받고 그 치유에 응하고 보속하는 것이 성사생활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등이 일어나는 것을 영, 혼, 몸 가운데 기억할 수 있고, 노른자, 흰자, 육의 껍질등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자매님의 이번 경우는 신앙적으로 다시 태어난 어린 아이같은 순수하신 맘으로 받은 작은 상처로도 해석할 수 있을것입니다. 어쩌면 사제를 아들로 둔 그분이 더욱 그것을 깊이 알 수 있기에 지금도 말없이 자매님과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자매님이 아이와 함께 조용한 그처럼 말씀입니다.

하여 이러한 것을 심각하게 정체하기 보다는 이처럼 용기있게 밝혀 주신점에 찬사를 드리며 더불어 부족한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하고 그렇게 지금 바로 봉헌하시길 권고드립니다.

 

봉헌은 전능하신 주님께의 의탁이기도 합니다. 분심이 들 때면 무조건 주님께 그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도록 지혜를 아이와 함께 간구하여 나가십시오.

 

기도는 자녀에게 완전한 교육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씀하신걸로 보아 자매님께선 고요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엄마이신것 같은데

지난 시간 신앙 여정 초대에 응하기 전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해쳐 나와야 했기에 주님을 잊고 홀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오류조차 남을 것입니다.

 

그것을 깊은 자매님이기도 하신 주님과 함께 상의하십시오. 아마도 자매님이 온유하실테니 상대들의 깊은 주님과도 잘 하여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시인처럼 가수처럼 살기 원하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

 

와락 눈물을 흘려야 했던 한 어머니에게 여기 지난날의 냉담 회두후 지난 십수년동안 그 눈물의 의미조차 잊혀져 온 채 한방울도 흘려보지 못한 한 아빠가 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성자를 품에 안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셨던 성모마리아의 아픔도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계속하여 주님안에서 부활도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아들을 신부님으로 봉헌했다는 그분의 마음도 같은 부모의 맘으로서 기도 기억해 주시라는 계시입니다.

인간적인 우리 느낌이야 계산도 앞서겠으나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의 지름길이 또한 사랑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이 온유하시고 아름다운 분이시니 앞으로 미세한 파견시에도 무조건 사랑의 기도를 하고 있슴에 감사드리십시오. 섬세또한 여성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화가 나셨다면 그 분께 따지는 것도 한 방법인데, 종교안의 싸움의 법칙으로는 따질 것도 먼저 일대일로의 권고를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성부께 대화가 어려울 때는 성모님과 지금처럼 꼬치 꼬치 기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소속감이 부족한 가운데 신앙생활 어려운 것도 감사하고 계십니다. 지난날은 감수해야 했지 않습니까?

아직도 그것이 무딘채 살아가는 이웃이 적지 않습니다. 하느님 부르심의 사건으로 의탁하십시오.

 

지금의 신앙안의 친구(가장 오래된 벗)가 비록 밀알처럼 적을지라도 자매님과 사랑스러운 자녀, 그리고 남편과 함께 빛나는 영성체로 거듭 날 것입니다. 내가 하려면 잘 안될 수 밖에요...

 

천주교에 정착하기 위하여 인내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내는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포도나무이신 주님보다 잔가지인 해석에 얽매이기 쉬운 나약한 죄인일 가능성이 함께 합니다.

 

이에 자매님께 한가지 치유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게는 빵장수였던 유년 시절의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국내 최초 본당이라는 약현성당내의 요셉병원에서 제가 유년때에 선종하셨습니다만,

요셉, 요왕과 함께 삼형제중 막내 아들인 제가 4살 무렵 어느날 어머니가 다가오시어

'엄마가 장사 때문에 너와 놀아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시며 하얀 빵 봉투 종이와 연필을 하루도 빠짐없이 조달해 주셨습니다.

이로서 어른의 정보가 담기지 않은 그것으로 저는 자연스럽게 훗날 미술을 전공하기에 이르렀는데 아마도 감성뇌가 함께 발달하여 국내 유명 성지라 하시는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성가까지 봉송하고 있나봅니다.

 

아빠보다 지상에서의 엄마가 하느님의 그것을 닮은 모성애가 더욱 살아있기에 아이에게 그렇게 종이와 연필을 조달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선물겸 치유책으로 활용하심은 어떨까요?

 

아이의 엄청난 창의력과 탐구력이 방바닥이나 벽으로 분산되지 않고 그림 박사가 됨은 시간 문제일 것립니다.

 

구한말 조선은 외세의 침투속에 여러가지 아픔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예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입니다.

 

요즘 북한 실정도 이러한 외세 압박에 비숫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김정일 부자나, 대원군의 공통점은 쇄국주의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아집의 쇄국주의는 히틀러처럼 일시적인 권좌형으로 머물 수 있겠으나 수많은 신앙인들의 피를 담보로 하고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를 닮은 김일성 부자의 잔존하고 있는 극심한 박해도 그럴테고 그들의 주적도 가까이 있다 할 수 있기에 우리 내면의 선과 악도 화해 일치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모를 망각하기 쉬운 우리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자칫 이러한 유형의 집착 마저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 환경을 오염시킨 과오등에 노출되어 있기도 합니다(아이에게 지나치게 애착심을 갖을수도 있으니 어렵지만 점차적으로 애착조차 버려야 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권력구조와 물질구조와 신앙구조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맡기고 주님의 것은 주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새봄과 함께 주님의 여정에 초대 받으심을 다시한번 축하드리며 기회 되신다면 절두산 순교 성지에서의 미사 참례도 기억해 주십시오.

 

안타깝게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목이 잘리어 떨어진 그 물가를 지금은 그 누가 현세의 편의를 위하여 시멘트로 메워버렸는데, 이 곳은 남북 통일이 되면 가장 활성화 되는 곳으로 다시 바뀔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마포 나룻가에는 짐만 내리고 큰 배가 이곳 절두산에 정박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인 양요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것도 모른채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지난 수년간 새로이 건립된 순교자 현양 회관내의 납골당 설치 반대를 외치며 그렇게 난장판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필자는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이십여년 뒤 90년대를 맞으며 응암성당의 정 이사벨라 수녀님을 찾아 전구 기도로 냉담을 벗은 일화가 있는데 몇년 전 가톨릭 매괴성지(충북 여주의 묵주 성지, 매괴는 장미의 뜻)내 매괴 여고 50주년 카다로그를 디자인 할 기회를 얻으바가 있었습니다. 이 때의 명성황후의 생가를 알리는 비석이 여고본관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언덕위에서의 예수 성심상 모습을 닮아 두팔로 우리를 맞아주시는 매괴의 성모님을 보호해 주심으로서 일제 때의 일인들이 이 곳을 신사참배지로 만들려 할 때 천둥 번개를 내리치심으로 일인들이 혼비백산하고 도망간 일화도 새겨져 있습니다.

 

정 로사라는 여인과의 80년대 말 인연으로 인하여 로사리오기도(묵주기도)와 말씀의 수호자이신 성 도민고 수호천사의 빽을 가진는 필자가 이곳 수녀원에 근무하셨던 우리 어머니와 연세(76)가 같으신 정 이사벨라 수녀님과 해후 함이나 성모승천 대축일(8월 15일/성모님은 바티칸 교황청으로부터 한국의 수호자로 선정, 우리나라의 광복절인 점도 우연만은 아닙니다) 3일전인 12일 태어나 15일 뒤 어머니 품에서 영세에 초대됨으로서 1215년 첫 서원자와 함께 성 도미니꼬회를 세우신 성인의 삷도 더욱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성(가톨릭) 견지에서 개인적인 우연만은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분들의 필연과 우연의 공존속에 우리가 능히 개별적으로 꿈속에서조차 자주 계시 은총으로 빛날 수 밖에 없는 신앙의 신비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성층들은 보라색(신비의 칼라)을 선호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미스테리(신비)를 사크라멘뚬(거룩함)으로 봉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더욱 진일보 된 신앙 생활이기도 할 것입니다. 고통, 환희, 빛, 영광을 편안함으로 취득하고 싶으시다면 매일 아침 새로 태어남과 저녁에 죽는 하루살이의 연습을 즐기십시오. 풍성한 가톨릭의 기도 뷔페가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기분 좋은 선행을 하면 곧 전입가경의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지요.

 

더불어 제가 응암 성당에서 그 쉽지만은 않았던 주보 편집시 이상훈 미카엘 당시 보좌 신부님 전임으로 함께 임하셨던 김경하 분도 신부님께 잠시 인사 드립니다.

 

지난해 9월 1일 금요일 밤에는 저희 요셉 큰형수이신 조은자 카타리나께서 대장암으로 선종하셨습니다. 당시 주검에 염을 할 때는 바닥의 개미 한마리가 형수를 향해 지나더군요.

 

문정동 김홍진 신부님께서 월요일 새벽인데도 장례미사를 봉헌해주셨습니다.

 

두분이 명동 사회복지분과에 계실 때의 시골 노인들 공동체 총무 면접시 한 말씀 없으셨던 김 신부님, 제게 빚지셨습니다 ㅎ 따라서 이번 미사때에 우리 큰 형수 조 카타리나 기억해주세요.ㅎ

 

공개적으로 인사드렸으나 너그러운 용서 있으실줄 믿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시구요.

 

오늘 아침 한 아기 엄마 덕에 긴 편지 나눌 수 있게 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여정 이루시기 바랍니다.

 

추신) 로사 자매님,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월 : 환희의 신비

화 : 고통의 신비

수 : 영광의 신비

목 : 빛의 신비

금 : 고통의 신비

토 : 환희의 신비

일 : 영광의 신비로 알고 있습니다.

 

264대 교황이셨던 故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전하신 빛의 신비를 목요일에 추가함으로서 환희의 신비는 가정의 날이기도 한 토요일로 옮긴 것이지요. 이렇게 이해하시면 더욱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로사 자매님의 권면 방법도 좋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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