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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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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09 ㅣ No.1562

에큐메니칼운동은 단순히 교단적 통합만을 꾀해선

거의 그 성취와 성공이 불가능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공통된 지향점’을 찾아

그로 인해 일치점을 마련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대는 특히 전인류적·전세계적·지구촌 시대이니

모든 교파들은 거의 공통된 상황 속에 처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공통된 지향점’을 찾기도 쉬울 것이다.

그것도 가능한 높고 먼 곳에다 두고서 같이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쉽사리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성취 뒤 곧 형제적 동료의식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 성과물 때문에 분열되기 쉬우니,

차라리 오랫동안 같이 힘써야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이익 같은 것과는 무관한

참으로 보다 영성적인 것이라면 더욱 좋다.

지난 유신 시절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노동사목의 일을 펼쳤던 ’산업선교회’의 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참 고무적인 활동이었다.

왜냐면 그런 부분이란 끝없이 개선 노력을 펼쳐도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되기는 어려운 것이니,

잘못된 부분을 개선시켜 가는 동안에

어느덧 종파의 벽이 허물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본질적인 일치를 꾀하는 것이다.

참으로 온갖 신학적 교리문제나 전례관계의 합치는

일단 뒤로 제쳐놓는 것이 좋다.

만일 그것만 가지고 떠든다면 그 성취결과는

강한 교파가 약한 교파를 눌러 없애는 식의 폭력적 해결이나

아니면 쌍방 모두가 만족 못할 뿐 아니라

믿음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절충적 형태의 종교를 낳는 것이니,

그것은 성공해도 실패해도 모두 좋지 않는 일이다.

하나의 실례를 들자.

3·1운동 때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불교·천도교 등 세 종교는

"일제에 대한 항거"라는 ’공통된 지향’ 때문에 협력했었다.

과연 그것은 성공적이었고,

그로부터 우리나라는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종교간에 반목이 사라졌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인 면에서였지만,

만일 ’그 지향점’이 종교적이고 더 나아가 복음적이라면

그 성과는 얼마나 놀라웁겠는가!

그렇게 볼 때 요즘 우리 한국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해방’에 대한 관심은 참 좋은 지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지난 70년대를 통해

우리들은 사회참여적 선교행위로 인해

신·구교간에 놀랄 만한 접근을 보았었다.

이제 전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는

’세계구원 곧 인류구원’이란 공통지향점을 갖고서 모여

대화를 나누고 같이 일해야 한다.

그렇게 뜨겁게 노력하다 보면

어느덧 언젠간 전례나 교리의 차이 같은 문제들이

조그맣게 정말 하찮게 보여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렇게 연대의식적인 신뢰감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문제에 접근하고 또한 그것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때가 된 것이다.

그럴 때 그 모든 것은

썩은 문짝을 내리 차 부수는 것처럼 쉽게 될 것이다.

사실 문제란 그것을 크게 보면

그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때로 현 에큐메니칼운동 소식에서

"무엇을 양보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 씁쓸하기조차 하다.

십자가 하나 교리 하나

더 나아가 심지어는 회칙 하나에도

생명을 거는 완전한 믿음이 따를 수 있으니,

아무리 다급할지라도 신심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장사하듯 할 순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에큐메니칼운동은

그런 면에다 너무 관심을 둬선 안된다.

보다 시야의 지평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초교파를 지향하는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는 그런 면으로 모범적이다.

그들은 무엇으로 무엇 때문에 그곳에 모이기에

그토록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에 예수는 오메가점이라 했다.

우리는 예수를 향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예수로부터,

곧 미래로부터 오히려 전향적인 지배를 받게 되고,

미래를 통하여 현재의 오도된 상태마저 고침을 받게도 된다.

참으로 그때 그 모든 것은 예수의 능력 그 눈길로 인해

너무나도 용이하게 기적적인 해결을 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직 예수의 눈으로만 향해 서 있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수 안에서 하나로 되어 있는 자신을 깨닫고서 놀랄 것이다.

마치 그것은 전쟁 때에

"차렷! 손들고 움직이지마!" 해 놓고선

무장해제를 집단적으로 시키는 것과 같다.

어느덧 우리는 자기만의 거추장스런 무기들은 모두

하느님의 천사들에게 빼앗기고,

모두가 같은 빈 몸으로 서서 예수만 바라보며

모두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보다 더 높고 보다 더 넓게

그리고 보다 더 본질적인 지향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천만번 에큐메니칼을 위한 통합회의를 여는 것보다

더 큰 열매를 그 운동에 실질적이고도 근본적으로 가져다 줄 것이다.  

에큐메니칼운동은 결국 본질화운동이어야 한다.

참된 가톨릭교인,

참된 캘빈교인,

참된 루터교인,

참된 동방정교인 등등이 되어라.

그럴 때 그대 안에 지닌 본질이 결국엔 드러나게 되고,

즉 참되게 될수록 ’나’는 사라지고

’그분’이 더욱 또렷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의 장에서 만날 때 일치의 체험이 자연스레 일어난다.

어쨌든 일치의 성령은

’나’들이 소멸된 곳에서만 발효하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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