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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얼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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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이 진리를 감상주의적으로 파악하려 들 때 거기엔 무서운 오류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동정 어린 시선과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고선 그 자신이 만든 하느님의 환상을 스스로 그 위에 포개어 그려보며 자위적인 만족을 꾀하는 위선을 양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현실이 그러하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의 십중팔구는 감상주의적 오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참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할 때, 한마디로 참 신앙의 접근을 할 때 그 진리가 확연히 드러남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진리엔 신앙문제 이전의 의미가 내재되어져 있다. 그들의 삶, 그 상황에서 드러나는 건 정확히 말해 ’하느님’이기보단 하느님의 ’뜻’이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正義)’이다.
물론 이 정의는 결국 악마성을 띨 수밖에 없는 수동성을 띤 차가운 세속의 산술적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능동적인 나눔이 있는 자비와 사랑이 낳은 하느님의 참 평화의 뜨거운 정의이다.
나눔의 문제에 있어 맑스주의는 그리 나무랠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나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근본적인 오류가 비롯되었다. 공산국가 수립 백 여년사에 있어서의 그런 악마적인 광란과 방황 그리고 좌절 역시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거기엔 나눔의 참 출발점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빚어진 공동화 현상의 모든 것이 맑스 레닌 백여년사이다.
즉 가난한 이들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보는 것은 ’정의의 외침’ 그 자체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불의에 대한 고발이요 폭로이다. 또한 ’막혀 버린 나눔의 통로’를 뚫어 보려는 순리(順理)의 외침이요, 나의 탐욕에 의해 빚어진 그들의 아픔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해방의 외침이요, 또한 벽(壁)의 구조를 장(場)의 구조로 전이(轉移)시키기 위한 몸부림의 외침이다.
참으로 그들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외침, 하늘의 소리이다. 그 뜻이, 그 맺힌 것이 그대로 실현될 때, 곧 온전히 풀리게 되었을 때, 그 때 그 뜻, 그 외침에 가려져 있었던 하느님의 얼굴이 드러난다.
참되게 나눔이 이뤄져 하나 된 그곳에 하느님이 비로소 함께 하신다. 그 불의한 아픔의 상황을 온전히 치유시켜 그들이 참 인간화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께 오신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 속에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