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홍보게시판 교구ㅣ수도회ㅣ본당ㅣ기관ㅣ단체ㅣ기타 가톨릭 관련 각종행사 교육, 알림 게시판 입니다.

하느님의 얼굴

스크랩 인쇄

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09 ㅣ No.1563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이 진리를 감상주의적으로 파악하려 들 때

거기엔 무서운 오류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동정 어린 시선과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고선

그 자신이 만든 하느님의 환상을 스스로 그 위에 포개어 그려보며

자위적인 만족을 꾀하는 위선을 양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현실이 그러하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의 십중팔구는

감상주의적 오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참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할 때,

한마디로 참 신앙의 접근을 할 때

그 진리가 확연히 드러남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진리엔

신앙문제 이전의 의미가 내재되어져 있다.

그들의 삶, 그 상황에서 드러나는 건

정확히 말해

’하느님’이기보단 하느님의 ’뜻’이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正義)’이다.

 

물론 이 정의는

결국 악마성을 띨 수밖에 없는 수동성을 띤

차가운 세속의 산술적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능동적인 나눔이 있는 자비와 사랑이 낳은

하느님의 참 평화의 뜨거운 정의이다.

 

나눔의 문제에 있어 맑스주의는

그리 나무랠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나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근본적인 오류가 비롯되었다.

공산국가 수립 백 여년사에 있어서의

그런 악마적인 광란과 방황 그리고 좌절 역시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거기엔 나눔의 참 출발점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빚어진 공동화 현상의 모든 것이

맑스 레닌 백여년사이다.

 

즉 가난한 이들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보는 것은 ’정의의 외침’ 그 자체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불의에 대한

고발이요 폭로이다.

또한 ’막혀 버린 나눔의 통로’를 뚫어 보려는

순리(順理)의 외침이요,

나의 탐욕에 의해 빚어진

그들의 아픔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해방의 외침이요,

또한 벽(壁)의 구조를

장(場)의 구조로 전이(轉移)시키기 위한

몸부림의 외침이다.

 

참으로 그들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외침,

하늘의 소리이다.

그 뜻이,

그 맺힌 것이

그대로 실현될 때,

곧 온전히 풀리게 되었을 때,

그 때

그 뜻,

그 외침에 가려져 있었던

하느님의 얼굴이 드러난다.

 

참되게 나눔이 이뤄져 하나 된 그곳에

하느님이 비로소 함께 하신다.

그 불의한 아픔의 상황을 온전히 치유시켜

그들이 참 인간화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께 오신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 속에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  



271 0

추천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