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25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
||||||||||||||||
---|---|---|---|---|---|---|---|---|---|---|---|---|---|---|---|---|
2025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2025년 부활 메시지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기쁨이 온 세상 모든 이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특별히 분쟁과 전쟁으로 불의와 억압, 분열과 소외의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참 평화와 위로가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2025년 ‘희망의 순례자’ 희년에 주님의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이 희년에 맞이하는 부활은 더욱 큰 기쁨과 깊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특히 희망에 관하여 묵상하게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요란한 사건으로 보도하지 않습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서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식의 부활 발현 이야기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저 ‘빈 무덤’의 표상을 통해서, 실패의 좌절과 슬픔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 곁에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그것은 온유한 승리이며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치유를 선사하는 구원의 신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별과 상실의 슬픔 속에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 이름을 불러주시며 당신 현존을 드러내십니다.(요한 20,11-18 참조) 이렇듯, 지금 삶의 온갖 시련으로 아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 옆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조용히 현존하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떠나보낸 실망 속에 침통한 마음으로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의 마음을 당신 말씀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해주십니다.(루카 24,13-35 참조) 이렇게, 지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인생 여정에서 온갖 실패와 실망을 겪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십니다. 또한 말씀과 성찬의 나눔을 통해 우리의 닫혔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벅차오르게 해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숨어서 문을 잠그고 무서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와 평화의 인사를 전해주십니다.(요한 20,19-23 참조) 또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어부들에게 나타나시어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십니다.(요한 21,1-14 참조) 이는, 그분께서 사회 안의 여러 분열과 갈등의 긴장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참 평화를 선사하시고, 불안과 불신의 밤을 지새우며 헛수고에 지쳐버린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힘을 주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군사적 갈등과 긴장 속에서 분쟁과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는 세상을 보며, 또 빈곤과 질병의 세계적 고통과 전 지구적인 극심한 기후 위기, 그리고 사회 공동체의 분열과 경제적 위기를 겪으면서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과연 어디에 계시느냐고 말입니다. 그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왜 세상의 어둠은 변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시련 속의 우리 곁에 신비로이 현존하신다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현실적인 고통을 당장에 없애주거나 마술 같은 모습으로 해결책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부활의 신비를 지금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인류의 고통과 함께하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바로 희망을 통해서입니다. 시련 속의 인내와 수양을 통해서 우리는 이 희망을 다져갑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최근 우리 사회는 희망이 위협받는 듯한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계엄 선포로 시작된 깊은 혼돈과 정치적 혼란은 국회의 계엄 해제 선언,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의 과정을 이어가면서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도 통합보다는 정파적 갈등과 상호 비난이 계속되며 분열의 고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우리 국민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선명한 시민의식으로 연대를 통해 희망을 일궈 나가는 여정에 한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어둠을 넘어서는 희망과 확신입니다. 탄핵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단순히 정치적 변화를 넘어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어려움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희망을 품고 확신 속에 연대한다면, 이 난관 또한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의 위대함에 새롭게 눈떠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강한 확신, 그래서 현실의 불의와 질곡을 뛰어넘는 위대한 복음의 비전, 곧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지금 선포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실망케 하고 좌절시키는 여러 사건과 상황 속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의 제목처럼, 결코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오늘의 부활 체험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삶의 기대와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게, 또 삶의 참다운 가치가 실종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이 희망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약속을 향해 온 인류가 ‘함께 걸어가는 길’(시노드)에서 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 희년 동안, 우리는 인류의 여정에서 희망의 용감한 증인, 곧 하느님 자비의 선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부활의 신비를 전하는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 15,13)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힘든 풍랑을 헤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해 전구해 주시기를 청하며, 주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2025년 광주대교구장 부활메시지
어둠 속의 기나긴 밤을 이겨내고 새날을 맞이한 ‘하느님의 백성’ 모두에게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지난 몇 달간 이 땅의 의식 있는 다수의 국민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매년 지내 온 부활 시기인데, 이번처럼 사순시기가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도 이렇게 크게 다가왔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잔인한 사월’이 지나면 대한국민의 마음에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나 새롭게 부활하리라 믿습니다. 빛고을 광주의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진정한 역사가 있으려면 기억을 해야 하고 과거가 부끄럽더라도 이미 지나온 길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를 지우고 잘라내 버리면 기억을 잃게 되니,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억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이는 기억하는 사람이고,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사람이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LET US DREAM, 2025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역사를 망각한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선택들은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힘겹게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탑을 다시 쌓아 올리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이 그저 쉽게 얻어졌던 게 아니었음을 절감하는 오늘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다”라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주님 부활 사건은 신앙인 모두에게 희망을 선물합니다. 주님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은 없습니다. 단지 빈 무덤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헌신적인 삶과 죽음이 바로 부활의 명확한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 시대나 오늘이나 법을 잘 안다는 사람 중에 일부는 잘 안만큼이나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혹여 법에 저촉될까 봐 조심하며 살아갑니다. 지도자들이 깊은 성찰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법을 악용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지를 우리는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눈발 날리는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밤샘 투쟁하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나라를 걱정하는 한마음으로 핫팩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구호를 외치는 평화로운 시위를 보면서, 역사는 늘 기득권이 아닌 평범한 소시민들의 희생으로 이뤄짐을 다시금 느낍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의 희생처럼, 이 나라의 아픔을 기꺼이 짊어지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모여 내일의 희망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절감합니다. 이분들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해주는 ‘부활의 산 증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희망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마침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해마다 온 교회의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구원의 공동체로서 ‘주님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이유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류의 운명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어둠과 절망의 역사는 천국으로 가는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러기에 ‘주님 부활’을 믿는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의 바다에서 ‘희망과 용기’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교만과 욕망’의 바다를 건너 ‘겸손과 온유’의 땅으로, ‘게으름과 태만’의 바다를 건너 ‘근면과 성실’의 땅으로, ‘불신과 의혹’의 바다를 건너 ‘믿음과 사랑’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기억하고 기뻐하는 ‘주님 부활’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부활’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백 번을 부활해도, 내가 부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독일 속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콜로 3,1ㄱ).
2025년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옥 현 진 시몬 대주교
2025년 주님 부활 담화문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한 생명과 비로소 하나가 되었고, 그 하나로 모든 생명체가 하느님의 기쁨과 영광 안에 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교구민 모두의 삶이 고귀하고 감사하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아픔과 좌절과 절망은 부활의 시간 앞에서 그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권리와 그 권리에 따른 책임이 분명히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희망과 영광이 모든 생명체를 향한 행복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보다 분명히 부활을 선포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한순간의 간절함이나 기대치 않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유다 사회가 그토록 기다린 구원의 완성을 위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 시간, 종말의 때에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 역사 안에 함께 하시고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가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유다 사회는 지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오랜 기다림의 결실이자 보상이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기다림의 간절함을 담아내는 기쁨이며 지난 역사의 수많은 조각들이 하느님의 섭리를 그려나가는 고귀한 작품임을 깨닫는 애틋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것은 우리 삶의 수많은 얼굴들에 대한 사랑과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부활을 축하하는 오늘, 우리 교회는 우리나라의 아픔과 갈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의 시간 한 가운데 머물고 있습니다. 계엄과 탄핵, 그리고 대통령 파면이라는 역사의 아픔과 상처를 지금의 시간 안에 살아내고 있습니다.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시간이고 그럼에도 우리는 마냥 슬퍼할 수만 없는 시간을 고민하고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삶의 희로애락을 제 몸의 일부분으로 여기며 살아내는 인고의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들은 부활의 이야기 안에 십자가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부활 성야에 울려 퍼지는 루카 복음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루카 24,7) 십자가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이어놓는 유일한 길이고 모범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에서 서로 갈라져 다투며 반목하는 코린토 교회를 향해 십자가가 ‘하느님의 가장 강한 힘’이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통해 모두가 ‘한 몸’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1코린 1,18;12,27) 십자가는 고되고 힘들고 아픈 길이지만 그 길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끝내 이루어낸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이 힘들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방식을 배우고 익히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더욱 견고히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으로 상대를 미워하고 단죄하는 것은 부활을 사는 이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요한 13,1)께서 우리와 함께 늘 살아계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사랑 안에 하나 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우리에게 부활은 이제 사랑할 이유와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역사의 모든 불행은 나와 다른 이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저 혼자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에서 비롯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이 살아가는 부활의 시간은 서로에게 세심하고 진지하여 한 몸으로서의 신앙적 열정과 사회적 책임을 실현할 하느님의 초대이며 바람입니다. 혼자서는 힘든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교구민 모두가 갈라지고 대립하는 우리나라를 위해 또 다른 십자가가 되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로 함께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025년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2025년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펼치신 구원의 역사가 그 정점에 이른 것입니다. 알렐루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는 자식도 하나 없는 75세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축을 이끌고 풀을 찾아 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 자기 소유의 땅은 한 평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고, 그 백성이 살아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고 즉시 떠났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이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를 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 광야 여정을 거쳐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고, 다윗 왕은 이 땅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이루어주신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 땅이 마치 하느님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른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온갖 우상숭배를 하다가 이민족에게 정복당하고 많은 이들이 유배를 떠납니다. 남의 나라 땅에서 수십 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땅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참된 신앙인의 공동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유배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고자 굳은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과 의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긴 역사가 증명하는 진리입니다. 구원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때가 온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파견하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속죄 제물로 희생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그리고 그분은 죽으셨으나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고, 그분의 부활로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실 때 주신 자유와는 아주 다른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영원한 생명과 함께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경은 주님의 십자가상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이 은혜로운 사건을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라고 선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십니다.”(2코린 5,19) 이 말씀은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떨어져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욕심과 의지로 하느님의 품을 떠나 갈라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불화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화해라고 부릅니다. 이 화해는 갈등을 일으키던 두 사람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화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의 품을 떠나 불화가 생겼는데, 그 죗값을 하느님께서 치러주시고 화해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들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아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 세상에 화해의 사도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화해를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 2,24) 화해는 죽은 관계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화해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이웃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형제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진심으로 돌보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화해의 길입니다. 가난한 형제들을 진심으로 도와줄 때 우리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기 세력에 대한 욕심보다 정의를 실천하는 데에 헌신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에 매우 필요한 화해의 길입니다. 중요한 직분을 맡은 사람일수록 구성원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모든 직분은 공동체를 성장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화해의 진리를 배우며 살아가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면 이 힘을 잃어버립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고,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존재이기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비와 화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 부활의 축하 인사를 드리며 주님을 닮은 화해의 사도로 살아가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알렐루야!
2025년 4월 20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2025년 부활 메시지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부활, 새로운 시작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그분의 빛과 희망을 새롭게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모든 믿는 이에게 은총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주님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승리인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가장 위대하신 분께서 스스로 미천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 존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비참한 모습의 죽음을 선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전례를 통해 하느님 죽으심의 신비에 참여하였습니다. 하느님 죽으심의 신비를 체험한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역사 속에 함께 하고 계심을 힘차게 선포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삶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선사합니다. 새로운 희망 새로운 전환점은 주님 부활이 우리에게 일러준 희망에서 시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희년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는 희망이 단순한 낙관주의 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활동 안에서 찾아야 하는 확고한 믿음과 신뢰임을 일깨워줍니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신 분이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발치에서 죄 없으신 아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셨습니다. 슬픔에 압도당하는 가운데 다시 한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24항 참조).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희망을 우리 교구 청소년에게서도 발견합니다. 청소년 모임 ‘또래 사도’ 모임에 참석하여 청소년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구장 공석 기간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여전히 청소년들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하느님 부르심에 청소년들은 기꺼이 응답(fiat voluntas tua)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제와 수도자 성소의 감소 지표가 드러나고 있지만, 이들의 사제와 수도자가 되고 싶어 하는 열망은 성령께서 청소년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일깨웁니다. 희망은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신앙 실천 속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희망은 바로 친교, 참여, 사명을 이루려는 시노드 교회 전체를 위한 영적 쇄신의 힘 입니다.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우리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주님 부활의 증인이요 하느님의 협력자(1테살 3,2),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순례자는 여행자처럼 가지지 못한 것을 계속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하느님이신 ‘당신’께 마음을 여는 사람입니다. 희망의 순례자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소중히 여기며 단순한 현실에 익숙해져 이를 ‘여유’롭게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찬미받으소서」, 223항 참조).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급변하는 사회,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기계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망의 순례자인 사제 수도자 평신도는 소외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특히 노인들이 희망의 순례자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합니다. 이 희망의 절정에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부 히폴리투스는 희망의 순례에 동참하는 교회를 ‘배’라는 상징으로 소개합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개의 닻을 가진 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돛을 그 중심에 가지고 있으며, 성령의 바람이 이끄시는 곳으로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다양한 소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이 배에 승선 하여 ‘친교’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을 상징하는 바다에는 다양한 풍파가 있어 때로는 교회를 위기 속에 몰아넣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여받은 ‘사명’에 헌신하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의 ‘참여’는 위기를 극복하고 배를 하느님의 나라로 잘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타르굼주석단편」, S5,41.42 참조). 이 배는 하느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 가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는 공간, 곧 우리 마산교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확고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 선조들을 통해 전해 받은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희망의 순례자들이 교회를 위해 살았던 거룩한 전통에 바탕을 둡니다. 피를 흘리며 신앙을 간직한 희망의 순례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전하고자 했던 짧은 한 문장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이었습니다. 우리도 전심으로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살아갈 우리 교구를 성모님과 우리 교구의 순교 복자들의 전구에 맡겨드립니다. 우리 교구민 모두가 주님 부활의 기쁨 속에서 다 함께 희망의 순례에 동참 하길 기도합니다. 평화의 모후님! 복자 신석복 마르코, 구한선 타대오, 정찬문 안토니오, 박대식 빅토리노, 윤봉문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5년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 교구장 이성효 리노 주교
2025년 부활 메시지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2025년 주님 부활 대축일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2025년을 ‘희망의 순례자들’을 주제로 한 희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해 주님 부활 대축일은 여느 해보다 더 뜻깊고, ‘은총과 희망’을 가득 안고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희망’을 부르짖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더 좋은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로마 4,18)고 고백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굳건하였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유달리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절망케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회, 경제, 정치 등이 불안하면 우리 신앙의 삶도 그만큼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외적인 어려움이 닥쳐도 주님을 향한 믿음과 그분이 내리시는 희망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 안에서만 찾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믿음 안에서 찾아낸 희망이 진정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당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큰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고, 금방이라도 새 왕국을 이루실 분으로 보이셨던 그분이 하루아침에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크게 낙담하였습니다. 그분의 죽음에 하느님은 왜 끝까지 침묵을 지키시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하느님께 분개했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몇몇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루카 24,13 이하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전쟁과 그로 인해 아무런 탓 없이 희생되고 죽어가는 사람들, 예상치도 못한 자연 재앙들, 세상의 불의, 약하고 선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고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들! 하느님은 아무런 대답도 않으시고 어떠한 벌도 내리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우리들 역시 하느님께 분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때나 지금 이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대답은 오직 ‘부활’입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셨고, 우리 역시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희망 근거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성을 온전히 보존해 줄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구원을 얻고, 희망을 안으며, 새로운 미래를 바라봅니다. 이번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희망’입니다. 어려울수록 더 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 없다.”(루카 1,37)는 믿음이 우리에게 희망을 더해 줄 것입니다. 2025년 ‘희망의 순례자들’ 희년에 맞는 주님 부활 대축일이 우리 모두에게 또 다른 희망으로 다가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아멘.”
교구장 손 삼 석 요셉 주교
2025년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친애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신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1. 부활의 신비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셨던 무덤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고 무덤 안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믿고 따랐던 분을 잃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슬픔과 고통 속에 잠겨 있던 이들에게 ‘빈 무덤’ 사건은 또 다른 충격과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빈 무덤을 바라보며 놀라워할 뿐, 아직 주님의 부활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 20,9 참조).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가려져 있던 제자들의 눈과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어 부활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불신으로 꿈틀거리던 마음에 확고한 믿음을 주시어 옛 삶에서 벗어나 부활을 증거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요한 20장, 루카 24장 참조). 2.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았던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건네시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받던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빛과 희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죽음 속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초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 곁에 함께하시며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시며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3.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한 관심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국 중심의 첨예한 자본주의 계산법을 바탕으로 전쟁 무기, 첨단 기술과 경제력을 앞세운 강대국들은 전쟁과 환경파괴로 인하여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음에도, 또한, 환경파괴로 인하여 후손들의 삶의 터전이며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가 크게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들은 당장 눈앞에 놓인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와 미래 세대를 위한 삶의 터전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연대해 나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몫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고자 하는 이들 곁에 머무르며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4.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기도와 실천 우리나라와 온 국민은 지난해 12월 3일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큰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정치적 이념과 진영 갈등으로 극심한 분열, 불목, 다툼, 폭력을 마주해야 했고, 나라 안팎으로도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큰 시련과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와 국민이 정치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민주주의가 보다 무르익기 위한 ‘성장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2.3 계엄령 이후 격동의 시간을 보내며 우리 국민은 양극으로 갈라져 탄핵 찬성과 반대 입장이 되어 극심한 불목과 분열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긴 숙고 끝에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였고, 우리나라는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새 대통령을 잘 선출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을 때입니다. 대통령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력, 국민을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권력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라를 위해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해야 할 것입니다. 조기 대선을 치르며 다시 일어서야 하는 우리 사회의 건실한 미래를 위하여 교구민들께서 열성을 다해 기도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5.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희망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와 함께 우리는 정기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년을 지내며 자비롭고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게 됩니다. 사순 시기를 마치고 부활의 기쁨에 머무르는 신앙인은 주님께 희망을 둔 ‘희망의 순례자’로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에 앞서 열리게 될 ‘수원 교구대회’를 준비하며 청년들이 실천하는 영성운동에도 온 교구민이 동참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인류의 빛이며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의 순례자들’이 가고자 하는 길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도록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의 전구(轉求)를 청하도록 합시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5년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2025년 부활 메시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우리도 부활의 “새로운 삶”(로마 6,4)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소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나날이 우리를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떠한 불안도 두려움도 가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것만을 두고 희망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희망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며, 그래서 현세의 어떤 어려움도 잘 견디고 극복하면서 새로운 희망으로 삽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시며(에페 2,12 참조) 그분께서 친히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1베드 1,3)을 주셨기에, 주님 부활의 삶 자체가 우리들의 희망이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삶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에 직면할 때, 그리고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고, 다시 살게 하며. 그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ㄱ)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ㄴ) 사랑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라.나는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오늘날 우리는 전쟁, 불의, 빈곤, 절망 그리고 얼마 전 우리나라를 덮친 산불 재난 등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우리 삶의 여정 한가운데서 우리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주님 부활의 능력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된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또다시 곳곳에 부활의 싹이 돋아납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힘 입니다. 가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고질적인 불의와 사악함과 무관심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어떤 것이 생명의 싹을 틔우고 언젠가는 열매 맺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땅 위에 끈질기고도 강인한 생명이 솟아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선이 다시 꽃피고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아름다움이 새로 생겨나고 역사의 풍파를 거치며 변모됩니다. 가치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인간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늘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이고 모든 복음 선포자는 그 힘의 도구입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곳에 이 새로운 세상의 싹을 틔웁니다. 그 싹은 잘려도 다시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 역사에 면면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헛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살아 있는 희망의 행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276, 278항)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우리 삶 자체가 부활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섬김을 통해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됩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용기를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위기를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십자가와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활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로 우리가 누리게 되는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어떠한 시련도 위기도 십자가와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새롭게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과 은총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
2025년 부활 메시지
† 찬미예수님,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제자들은 무덤을 향해 새벽길을 달렸습니다. 세상은 죄와 죽음의 어둠에서 동트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갔습니다. 무덤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외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헛소리로 여겼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에게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제자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1코린 15,12).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갑니다”(시편 19,5). 기쁨의 부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온 유다지방으로, 유다지방에서 유럽으로, 아시아로, 시간을 넘어, 세기를 넘어, 우리 시대 우리 귀에까지 퍼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셨습니다”(1코린 15,4).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주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보시게 좋게 창조한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완성하시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인류는 오랜 옛적부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꿈을 꾸어 왔습니다. 아이들 동화 끝에 항상 빼놓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 사람들은 오래 사는 법을 여러 가지로 찾았습니다. 자손을 낳아 대대로 족보를 이어가기를 희망했습니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이름 석자 남기는 것을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건넜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부활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장차 부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20).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그리고 장차 우리의 부활을!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2025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2025년 부활 메시지
알렐루야!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어둠을 물리치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 빛이 우리 각자와 우리 가정과 온 세상에 두루 비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주님은 수난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지금 우리 사회의 상황을 보면,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평화를 간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큰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던 정치적 위기는 한고비 넘겼지만, 마음의 통합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또한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요동치는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큰 불안을 안겨 줍니다. 기후 위기로 인한 각종 자연재해는 두려움을 일으키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은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향한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 큰 돌과 같습니다. 그 돌은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큰 돌은 그분을 반대하던 이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면서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요한 3,19 참조)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곧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두 형태의 사랑이 충돌했던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자기 사랑과 타인 사랑이라고 하는 두 가지 사랑 간의 싸움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세상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은 자아 포기에까지 이르게 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집착하면서 자기편만 감싸는 ‘닫힌 사랑’으로 병든 이 세상을 ‘열린 사랑’ 곧 자기를 넘어서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참된 사랑으로 치유하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분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 듯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신명 21,23)라는 구약성경 구절에 비추어볼 때, 예수님은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예수님의 부활로 뒤집히게 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켜서 당신 아드님이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제자들은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으로 믿으면서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사도 2,42-47 참조).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놓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셨고, 하느님은 그런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평화의 원천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대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우리의 적대심마저 뛰어넘는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처럼 자기희생의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이기심의 큰 돌’을 치워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전부라고 우기면서 다른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선과 아집의 돌, 나눌 줄 모르고 모으려고만 하는 탐욕의 돌, 나만 잘 되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무관심의 돌, 자기 책임은 외면하고 남 탓만으로 일관하는 비겁함의 돌이 사라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승처럼 참된 사랑을 실천하면서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그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역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변화되면 세상도 조금씩 변화됩니다. 세상의 변화는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내 안에 있는 ‘이기심의 큰 돌’을 치워버립시다. 참빛이신 주님께서 내 마음에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사랑의 빛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우리 모두 제자들처럼 변화되어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기쁘게 세상에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저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평화의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2025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 손희송
2025년 부활 메시지
그리스도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과 모든 이들이 느끼고 체험하였던 감격과 행복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살아나신 주님 무덤, 부활하신 주님 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 염포 난 보았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부활 대축일 부속가) ‘파스카 희생제물을 찬미’하는 부활 대축일 찬미가는 이렇게 주님 부활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굴레에 머물던 모든 이들에게 큰 기쁨이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마침내 우리는 모두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간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되찾아 주신 실로 커다란 사건입니다.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빛의 자녀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부활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지난 삶을 버리고,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2코린 5,15) 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자 우리 희망의 기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20항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 모두가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인 부활의 기쁨은 우리 신앙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를 넘어 사회와 세상 구석구석에 퍼져 나가야 합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사도 4,20 참조) 것처럼, 우리 모두도 주님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순례자이자 희망의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러한 모습을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개인주의와 낙담 그리고 비관주의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공동체를 생각하기에 앞서 개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인 중심적 경향은 점차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앞세우려 하거나, 나아가 타인을 지배하려는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과도한 자기애로부터 생겨나는 집착, 독단적인 생각과 판단에서 빚어지는 자기중심적 경향이 그로 인해 나타나는 모습일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이라고도 표현되는 지나친 자기중심성의 현상들은 사회적 분열과 단절을 낳고 있습니다. 개인적 경향이 단체적 차원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상대를 단죄하고 모든 통교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지나친 자기애의 집착이 만들어 낸 개인주의로부터 지금 우리 사회는 분열과 단절을 겪고 있고, 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려 하지 않고, 대화하지 않는 현상들로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귀를 닫고, 눈을 감고, 마음을 닫은 이들과 그들이 모인 단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탄핵정국은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미래의 불투명성에 기인한 불안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헌법 재판소의 결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혼돈과 두려움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시대적 흐름 안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비관주의적 사고들과 국가적,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많은 이들에게 낙담과 절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서로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식별도 없이 선동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편견과 아집으로 둘러싸여 상대를 심판하려 하는 인간관계의 피폐는 모든 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과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우리 사회에 주님 부활의 선포는 더욱 간절한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 부활은 모든 이들에게 전해진 희망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선포합니다. 그는 전도 여행 가운데 자신을 죽이려 고발하는 유다인들 앞에서도 부활의 희망을 증언합니다(사도 24,10-21 참조). 사도 바오로의 증언과 같이, 구분과 단절 없이 모든 이가 부활의 기쁨과 희망으로 초대되었습니다. 부활을 믿고 희망함은 죄스런 옛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되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엽시다! 2025년 정기 희년의 성년 문이 열렸다는 것은 희망의 문이 열렸다는 것이고, 하느님 자비의 문이 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비로 천국문을 열어 주시어 희망을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각자가 닫고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부활하신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 부활의 은총과 기쁨을 느껴봅시다. 또한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해 봅시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고 눈이 열려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지금의 현실에 절망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선 희망을 향해 시선을 돌려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활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체험한 이로서, 불신과 의심을 벗어버리고(요한 20,24-29 참조) 믿음의 사회를 건설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기쁨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눕니다. 이 기쁨이 삶 안에 희망으로 가득 차 여러분의 삶이 더욱 주님 앞에 풍요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2025년 부활 메시지
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어둠의 온갖 세력을 물리치시고 마
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게 내리기를 빕니다.
올 해 보편교회는 은총의 희년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희망의 순례자가 되기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생활함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희망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지향에 따라 저는 주님의 부활을 희망의 관점에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2. 우선,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했던 몇몇 여자들에게서 희망의 작은 몸짓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늘 깊이 느끼며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추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태가 돌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고 묻히시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망연자실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짓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밀려오는 두려움에 마냥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절망과 어둠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비관론에 빠지지 않았고, 그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단순하고 특별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그들은 집에서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유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그들은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마르 16,2)을, 곧 역사를 새롭게 바꾸는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땅속에 묻힌 씨앗처럼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우시려는 중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굳은 신뢰와 사랑으로 그 생명이 피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 발전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고”(2코린 4,8) 희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번 위헌·위법적인 12.3 비상계엄의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환난에 억눌리지 않고 참된 자유와 평화를 간절히 희망한 사람들 덕분입니다. 곧 참된 민주주의를 희망하며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들 덕분입니다. 3. 이어서 복음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두 번 선포함으로써 여자들에게 희망의 불이 더욱 타오르게 합니다. 한 번은 그들이 매우 이른 아침 무덤에 갔을 때 천사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그들에게 장엄한 부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나머지 한 번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10)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이나 강조된 “두려워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여자들은 마음 한쪽에 남아있던 슬픔과 공포를 말끔히 떨쳐버리고 이제 희망을 온전히 품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의 이 희망은 안이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넣어 주신 선물입니다. 특히 무덤에서조차 생명을 생기게 하시는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12항)는 확신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십니다. 따라서 이 희망은 삶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굳건히 지탱해 주고, 결코 주저앉지 않게 해 주는 힘입니다. 현재를 용기 있게 살아내고 미래를 담대하게 바라보게 하는 참된 힘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격려의 말로서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라고 되풀이하는 세상의 막연한 희망과 다릅니다. 우리의 희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고 성실하시며 온전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편에 계시고,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의 모든 상황, 특히 우리의 고통과 불안과 죽음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악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에, 우리를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로마 5,5 참조).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희망할 수 있고 반드시 희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마음 한쪽에서 속삭이는 어둠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헛되다고 비난하며, 우리의 용기를 꺾고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교활하고도 나태한 목소리입니다. 이는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단념하게 하는 희망의 적으로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어둠의 생각에 맞서 용감하게 싸울 것을 바라십니다. 이러한 싸움을 위해 우리는 먼저, 슬픔과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일이며,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안에 갇혀있지 말고, 주님을 향해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께서 들어오시게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과 사랑과 생명을 주시도록 그자리를 마련합시다. 이리하여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희망이 더욱 굳건해지도록,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 사랑의 업적을 기억할 것을 크게 강조합니다(루카 24,6 참조).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미 행동하셨고, 지금도 행동하고 계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절망에 사로잡힌 삶을 다시 일깨우고, 미래의 희망에 마음을 활짝 열게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셨던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을 잃게 됩니다. 5.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이 시기에,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어드립시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인 여자들처럼 어둠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이행하며 희망의 불을 지피는 신앙인이 됩시다.
2025년 부활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2025년 주님 부활 대축일 사목 서한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 님 부활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의 가정 에 부활의 축복을 보내드립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 경에서 당신에 관해 기록된 말씀들을 설명해 주시면서 그들의 눈 을 열어주셨고, 성찬례를 통해 그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 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 고 인사하시며, 부활의 은총을 나누어 주시고 부활의 증인이 되라 는 사명을 주셨습니다.(루카 24,36-48; 요한 20,19-23 참조)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로도 참된 평화가 도래하지 못한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수 많은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 및 산불 피해로 고통받는 이들, 끝없이 이어지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 고향을 떠나 살아야만 하는 이주민들이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우리 교회는 그들을 치유하는 평화의 노력에 동참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빛은 결코 어둠 속에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옛말에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권력도 십 년을 못 가고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 다는 뜻입니다. 이는 꼭 권력이나 꽃에만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많 은 일들의 대원칙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그런 길입니다. 또 새옹지마(塞翁之馬) 란 사자성어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좋은 일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나쁜 일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 리의 한 번뿐인 삶의 여정이 단순히 인간적인 어떤 영달만을 바라는 삶이 돼선 안 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파면되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엄청난 순간을 지켜보았습 니다. 비록 2025년 4월 4일의 이 사건은 그날 이후 역사 속 한 장면으로 지나가겠지만, 그것이 주는 성찰은 영원히 유효할 것입니다. 지난 123일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이들이 서로 갈라 져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가운데 극심하게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 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는 결코 '당연한 것'도,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모두의 각성과 참여, 분열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결실'입니다. 다행히도 성숙한 시민들의 저항과 민주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국가 위기 상황을 조금은 벗 어난 듯합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세상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우리가 이 번 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서로를 보살피며 민주주의를 가꾸어 간다면, 분명 새로운 희 망과 미래를 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만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의 닻을 끌고 가야 할 책임이 있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언제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진정 한 평화의 외침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오늘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제안하시는 '평화의 장인'으로서, 인간적인 세상이 주는 적대감과 혐오, 폭력이 아닌, 경청과 사랑, 연대의 문화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교 공동체가 걸어 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가 이 위기를 넘어서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와 정의로 운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며, 우리가 두려움 과 혐오를 넘어 사랑과 희망을 선택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참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의 욕망과 죽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부수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으로서 평화의 사도가 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분열과 죽음이 아닌 존중과 생명 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그 은총을 널리 전하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기쁨에 넘쳐 지내는 일상의 삶은, 죽음의 문화, 힘의 논리를 버리고 친교와 참여, 사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신이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부터 참된 평화를 살아가는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2025년 부활절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비오
2025년 부활 담화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사순 시기 동안 파스카 축제를 정성껏 준비하신 모든 분께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1.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루카 24,1)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입니다.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을 때도(마태 26,56 참조),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루카 23,49). 그리고 무덤을 보고 예수님을 어떻게 모셨는지 지켜보았습니다(루카 23,55).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을 밤에도(요한 20,19 참조), 이들은 주님을위해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루카 23,56). 그리고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아직 모두가 잠든 때 그러나 주님의 부활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시간에 예수님을 모신 무덤을 향합니다. 이 여인들 역시 주님을 잃은 슬픔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 모두를 떨쳐내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 참조). 복음 속 여인들처럼, 우리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1요한 4,10-11 참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었고, 하느님과 화해와 사랑을 살아가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큰 슬픔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예수님을 위해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처럼, 우리도 세상살이의 모든 근심, 걱정과 불안을 떨쳐내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로마 6,11) 살아갑시다. 사랑으로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이들처럼, 하느님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됩시다. 2.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은 돌은 굴려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빈 무덤 앞에 선 이들은 당황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완전한 실패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흔들어 놓습니다. 여인들은 사랑하던 이의 죽음보다 더 큰 상실감에,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허무함에 어찌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빈 무덤 앞에 선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르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올바르고 선한 삶을 살아가려 열심히 노력하지만, 성공보다는 실패가 그래서 허무함과 실망에 흔들립니다. 세상의 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처럼, 어리석음처럼 보입니다(1코린 1,23 참조). 하지만 천사들이 당황한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라며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을 기억한 여인들은 주님께서 십자가로 죄악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부활로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승리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빈 무덤은 허무와 절망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상징이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구원의 빛과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 됩니다. 여인들처럼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요한 5,38-40 참조).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경험한 일들을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담대히 선포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됩시다. 3.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여인들의 말을 들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그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 역시 주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며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과 눈을 열어주시기 전까지, 그들은 절망과 슬픔에 침통하였습니다(루카 24,17 참조).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비로소, 모든 두려움과 절망을 떨치고 부활의 증인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전 세계는 기후 위기와 재해로, 국지적인 분쟁과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도 재난과 갈등,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희망보다 절망과 불안에 흔들리며, 세상의 재물과 권력으로 자기 자신만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십자가로 드러난 하느님의 약함과 지혜를 살아갑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고 인내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구원과 영광을 온 세상에 전하며 새롭게 살아갑시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눈을 열어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리하여 ‘빈 무덤’만이 남겨진 것같은 절망과 허무의 이 세상을 살면서도, ‘부활의 승리’를 미리 맛보는 신앙의 증인,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 희망과 사랑의 표징인 부활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평화를 충만히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25년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종강 시몬 주교
2025년 부활 메시지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어둠을 이기시고 오늘 우리 가운데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주간 첫날 새벽 즉 주일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여인들이 향료를 준비하여 예수님을 모신 무덤을 찾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빈 무덤’(루카 24,3 참고)이었습니다. 당황하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6)라고 일러 줍니다. 여인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서둘러 길을 나섭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 신자들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서둘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영적 감동이 가득했던 ‘교구 청년대회’ 지난 4월 1일부터 3일까지, 2박 3일 동안 ‘제1회 군종교구 청년대회’가 음성 꽃동네 ‘사랑의 연수원’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군종신부님 70명을 포함하여 약 500명의 장병 및 군무원이 함께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두고, 우리 군종교구 젊은이들의 신앙 활성화를 위해 기꺼이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바쁜 공생활 중에도 종종 “한적한 곳”(루카 5,15)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셨던 것처럼, 우리 장병들도 바쁜 병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미사성제의 은혜로움과 함께 특히, ‘십자가의 길’ 기도를 통하여 영적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에게 인상 깊었던 프로그램은 장병들과의 ‘토크 콘서트’ 시간이었습니다. 장병들은 신앙과 인생의 궁금한 점들을 저와 함께 한 육·해·공 신부님들에게 질문하였고, 저희는 정성껏 답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시련을 겪게 하시나요?’ ‘토크 콘서트’에서 한 병사가 던진 질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왜 나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또 세상에 불의와 고통이 만연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각 개인의 고민도 있고, 가정과 사회의 부조리도 있습니다. 선하게 사는 이들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욕심 많은 이들이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각종 질병과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 등으로 무고한 이들이 의식주를 빼앗기고, 가난과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주신 빛과 생명 그리고 기쁨과 평화는 어디에 있는지,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스러운지 계속 묻게 됩니다. 이 질문에 한 군종신부님은 이런 답을 주셨습니다. “시련을 거름(비료)에 비유해 볼까요? 거름은 냄새가 지독하지만 나무를 튼튼하게 해주고 열매를 맺게 해준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리모델링’하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네요. 시련과 고통은 우리가 더 나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물론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내리시는 형벌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인간의 욕심과 교만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며 그것을 극복할 힘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 뒤 부활로 보여 주셨듯, 우리의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잘 이겨낼 때에 하느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큰 상급을 주십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올해 2025년은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주제로 함께 하는 ‘희년’(禧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은혜로운 희년에 ‘희망’이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앞이 캄캄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불투명한 미래에서 오는 두려움, 가정의 불화나 경제적 어려움, 우리 사회와 나라의 분열 그리고 세상의 폭력과 전쟁으로 인한 좌절과 파괴 등 이 모든 부정적 현실 앞에 우리는 기도하며,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희망은 우리에게 기적과 같은 충만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우리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백 살의 나이에도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말씀을 의심 없이 믿고, 희망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밑바닥을 향할 때에도, 회생의 작은 불빛이 꺼져갈 때라도 부활의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보장과 확언이 전무한 상태에서 믿고 바라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희망’ 속에 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십자가의 실패를 끝까지 감내하는 것이, 인간 생명의 밑거름이 된다.”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서전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오늘 부활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은 우리 모두, 다시금 좌절과 절망을 딛고 세상을 향해 외칩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우리의 발은 땅을 딛고 살고 있지만, 희망을 지닌 영혼의 눈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야 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가득히 받은 우리 모두, ‘기도하는 천주교 신자 군인’으로 충실히 살아가기를 다짐하도록 합시다. 다시 한번 부활의 축복이 여러분 가정과 부대에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5년 부활절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