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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440 십자가의 의미, 그 종류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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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몬 [SimonHan] 쪽지 캡슐

2002-01-21 ㅣ No.1441

 

1. 십자가의 배경과 의미

 

헬라어’스타우로스’는 동사 ’히스테미’(어근은 ’세우다’라는 뜻)에서 온 것이며, 본래 ’수직 버팀대’ 또는 "말뚝"을 뜻하였다. 범죄자는 말뚝에 매이거나 말뚝에 질러 꿰는 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 ’스타우로스’는 땅에 박은 말뚝을 뜻했으며 그 위에 "T"자 형으로 횡대가 가설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말은 이 횡대만을 뜻할 때가 있다.

 

십자가 처형 방법은 동양에서 기원하였다. 그리고 페르샤인들로부터 이 방법을 배워 온 자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이었다. 그후 로마인들은 카르타고(Carthage)의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이 방법을 배웠으며 사형 방법으로 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노예, 도적, 암살자, 등속 및 반란을 일으킨 속주민에게만 십자가형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시민이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극히 희소했다(Cicero,In Ver 1. 5. 66).따라서 바울이 참수형에 처해졌던 반면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보도하는 전승은 로마인들이 민중의 등급을 서로 구별한 관례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사형수는 언도가 내려지자마자 쇠나 돌이 붙어 있는 가죽 채찍으로 심한 매질을 당했으며, 이 때 이미 빈사상태에 빠졌다. 그 다음 사형수는 횡대를 어깨에 메고 이를 처형장소까지 운반하여야 하였다(Plutarch, De Ser. Num. Vind, 9.554 A). 사형수는 죄명을 기록한 판을 목에 걸고 있었으며 처형지에서는 옷을 전부 벗어야 하였다. 그리고 기존하는 말뚝 위에 새로 가설한 횡대 위에 처형관들은 사형수를 매어 놓거나 못박았다. 십자가 형틀에는 버팀대가 가설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사형수가 팔에 가해지는 압박을 덜기 위하여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군인들이 사형수의 다리를 꺾음으로써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죽음은 서서히 진행되기 마련이었다(요19:31).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팔레스틴에 있어서 십자가 처형은 일상 다반사였다고 한다(Antiq. 17. 10. 10:2.5.2: Wars, 2.12.6,13.2,14.9:15.1.1). 두 명의 도적이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과는 달리 산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형수에 대한 형벌을 강화하고 사형수에게 공개적인 창피를 주기 위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 위에 매달아 놓을 때가 많았다(민25:4, 수10:26, 삼상 31:30). 또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였다 (신21:2223).

 

그러므로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것이었다(고전 1:23, 갈3:13). 이 점은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키케로(Cicero)는 "십자가라는 명칭 자체를 로마 시민의 몸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로마 시민의 생각과 눈과 귀에 닿지 않도록 하라" 고 쓴 적이 있다(Pro Rab. 5)

 

 

2. 예수의 십자가

 

헬라어 ’스타우로스’가 신약에서 예수에 관해 사용될 때 이는 문자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문자적으로 이 말은 예수를 처형한 도구를 뜻한다. 예수는 심한 채찍질을 당한 후 그 자신의 십자가(엄밀하게는 십자가 횡대, 요 19:17)를 처형지까지 운반하여야 했다. 물론 이 십자가는 무거운 나무토막이 아니었으나 이미 쇠약해진 예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막15:21, 비교. 고후13:4). 그 다음 예수는 십자가 횡대에 못박혔으며 (비교 요20:25), 이미 처형지에 가설되어 있었던 수직 버팀대에 매달리게 되었다(마27:35). 여기서 수직 버팀대에 매달리게 되었다 (마27:35). 여기서 예수는 스스로 예기한 바 있었으나(20:18,19) 도저히 회피할 수 없었던 (막15:32)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문자적 의미를 훨씬 넘어서서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와 구속사업의 완성이었다.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고전1:18), 즉 인간과 하나님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을 허물어뜨려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또 형제와 더불어 함께 살 수 있게 하고(엡2:16), 만물을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나누는 화평과 조화로 이끌어 가며(골1:20), 인류의 죄를 속죄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게 한 장본인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2:14), 항상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의 우주적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의 우주적 권세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해방하기에(2:15) 충분한 강력한 힘을 세상 속에 방출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 수단을 상징한다.

 

십자가는 범죄자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에게 가해진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인류를 대신하여 예수가 당했던 고난과 수치와 굴욕을 상징하며(히12:2), 가장 악하고 가장 비천한 인간을 들어올리기 위해 그가 기꺼이 짊어지셨던 대속의 행위였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목적을 표상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죽음을 예수에게 부여된 최고의 임무로 계획하셨으므로(행2:23, 마16:21, 20:18,19, 요18:11 비교해 보라) 십자가는 이러한 임무의 상징이며, 예수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이 뜻에 대한 예수의 자발적인 복종을 상징하게 되었다(막14:36, 빌2:8)

 

 

3. 그리스도인의 십자가

 

십자가를 지는 일, 십자가는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문자적 및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십자가 처형은 팔레스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었고 사형수가 그의 십자가를 처형지까지 운반하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후예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처음에는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하였을 것이다(마16:24,참고 요12:26). 즉 예수의 후예들은 이 말씀을 자기들도 예수와 꼭 같은 물리적 처형 수단을 통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을 예언하는 말로 이해하였다(마23:34). 이러한 예언은 초대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곧 실현되었다(베드로에 대한 십자가 처형 전승과 롬5:3, Hermas, Vis. 3.2.1. 과 비교해 보라).

 

예수는 또한 그의 제자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은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기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예수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또는 ’자기를 보지 말고’) 작 십자가를 지고(누가는 여기에 ’날마다’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끊임없이)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막8:34-36).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바친다는 것이 죽이면서 예수에게 끊임없이 충성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거나 결정하거나 욕구를 발현시키는 요소인 자아를 거부하고 또 포기하고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더 이상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생각해서는 안되며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어떤 행동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George Mac Donald).

 

만약 예수의 경험에 있어서 십자가가 예수의 임무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크리스찬이 부름을 받은 삶의 임무를 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가 하느님이 부여한 특수한 임무에 헌신하면서 이를 완전하게 수행한 것처럼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누가복음 14:27절에 나오는 "자기 십자가"라는 말에 특별히 주목해 보라. 참고 요17:4). 이 때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생활, 즉 기독교적 가르침 아래 살아 가는 생활을 뜻하게 된다.

 

또한 십자가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여야 할 수치와 치욕을 상징한다(히12:2, 13:12, 참고. Ign. Trall. 11:2. Hermas, Vis. 3.2.1). 또한 십자가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것을 (그것이 바울의 경우처럼 제도화된 종교이든(갈6:14). 이그나티우스의 경우처럼 물질적인 것이든(롬7:2) 파괴해야 함을 뜻한다. 또한 십자가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러운 합일의 능력을 준다. 이러한 합일의 경지에서는 인간의 옛 죄악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지며, 새로운 희망과 힘이 그의 생활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갈2:19-20, 롬6:6).

 

기독교인의 십자가는 언제나 자발적인 것이다. 기독교인은 죄수와는 달리 십자가를 지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예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고 말함으로써 자발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던 것이다(막8:34). 이 구절에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속적인 행위를 한다거나 남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음으로써 타인의 죄를 속죄한다는 암시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스스로 채운다는 것(골1:24),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과 인간 됨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여러 개인들이 계속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시작한 일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자료: ex. "성서대백과" p 753-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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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모양과 종류

 

◎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교회 탄생 이후 역사 안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변천해왔다. 형태상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라틴식 십자가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식 십자가다.

 

◈ 라틴식 십자가라틴식 십자가는 십자가의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고 세로가 곧게 서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 다양한 모양과 이름의 라틴식 십자가가 파생한다.

 

▲켈트 십자가=영국 주변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켈트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사용하던 것을 ’켈트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라틴식 기본형에 원이 그려져 있다는 특징이 있고, 이 원은 영원 또는 완전을 의미한다.

 

▲고난의 십자가=라틴식 기본형과 달리 네 끝이 뾰족하다는 특징을 가진 고난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사순절을 상징한다.

 

▲베드로 십자가=기본형을 거꾸로 세운 것으로 67년경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베드로 사도를 상징한다.

 

▲고리 십자가=기본형 윗부분이 타원형의 고리 모양으로 된 십자가로 생명, 영혼, 다시 태어남,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주교, 대주교 십자가=주교 또는 대주교를 상징하는 이 십자가는 기본형의 가로 위에 작은 가로 하나가 더 있다.

 

▲교황 십자가=교황 십자가는 기본형의 가로 위에 작은 가로가 2개 더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그리스식 십자가그리스식 십자가의 특징은 가로와 새로의 길이가 똑같은 것으로 이를 기본형으로 하여 다양한 모양이 발전했다.

 

 

▲능력의 십자가=이는 그리스식 십자가 기본형의 네 끝에 직각으로 선을 그어 끝막음한 것이 특징으로 그리스 문자 T(Tau) 네 개를 짜 맞춘 꼴이다. 이 십자가는 치유와 회복을 상징한다.

 

▲십자문장형 십자가=이는 네 개의 라틴식 기본형 십자가로 짜인 형상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을 지닌다.

 

▲예루살렘 십자가=예루살렘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그림2-1)의 네 귀가 작은 그리스식 십자가 네 개로 메워진 형태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마르16,15)는 예수의 말씀을 상징한다.

 

▲캔턴 십자가=캔턴 십자가는 그리스식 십자가의 기본형 네 귀에 작은 그리스식 십자가 네 개가 독립된 형태로 들어 있는 것으로 예수의 양손과 발, 옆구리에 난 다섯 개의 상처를 상징한다.

 

▲X형 십자가=안드레아 성인이 십자가에 X로 매달려 순교한 것을 상징, 일명 ’성 안드레아 십자가’로 불리기도 한다.

 

▲T자형 십자가=그리스어의 T(Tau)자를 본떠 만든 십자가로 예언, 예수의 재림 등을 상징한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원인

 

◎ 못질 아픔보다 호흡곤란 고통 극심

 

2000년전 로마인들의 사형집행 방법 중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던 십자가형에 처해 돌아가신 예수.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겪은 고통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현대의 의학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지기 이전인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때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서는 지극한 고통 속에 성부께 기도하며 피땀 흘리시는 예수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루가 22,39-46), 이는 정서적 상태가 극에 달했거나 극심한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생하는 혈한증(血汗症, hematidrosis)으로, 바늘이 살을 찌르는 듯한 심한 고통을 수반한다고 의학자들은 말한다.

 

예수는 이어 유대의 배반으로 체포되어 대제관과 총독 앞에서 수차례 심문을 받고 태형과 함께 십자가형을 선고받는다(루가 22,47-23,25). 당시 로마는 모든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죄수를 기둥에 묶어 두고 죄수의 등에 태형(채찍질)을 가했는데, 이 채찍은 가죽끈에 작은 공 모양의 철이나 날카로운 양의 뼈를 붙여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의학자들은 예수가 깊은 타박상 또는 피하조직의 심한 손상을 입고 살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 출혈로 인한 쇼크 등을 당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더욱이 이전부터 시작된 혈한증으로 예수의 피부는 극도로 연약해져 있어 그 고통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이어 예수는 당시 로마의 관행에 따라 양쪽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양팔이 묶인 채 처형장소로 걸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데(루가 23,26-49), 이 때 예수가 진 십자가는 단지 횡목(십자가의 가로)뿐이었고 그 무게는 34-57㎏ 정도였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또 학자들은 예수에게 사용된 못은 길이 12.7-17.8㎝, 지름 1㎝정도의 끝이 날카로운 철대못으로 예수의 손바닥이 아니라 팔뼈 끝부분과 손목뼈 사이를 관통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된 예수시대의 유골들에서 이런 흔적이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고 손바닥에 못을 박았다면 몸무게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예수의 발은 겹쳐진 채 십자가의 수직기둥 정면에 고정되었고, 못은 발 중앙의 둘째와 셋째 뼈 사이에 꽂혔다.

 

이로 인해 예수는 양손과 발의 주신경들이 끊기는 고통, 즉 손과 발이 잘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십자가형에 앞서 받은 채찍질로 인한 출혈과 쇼크, 혈합저하 현상, 못을 박기 위해 땅에 누웠을 때 채찍질 당한 등이 다시 찢겨지는 아픔, 십자가 위에서 숨을 쉴 때마다 찢겨진 등이 거친 나무기둥과 부딪치며 생기는 고통 등 예수는 매순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의학자들은 예수가 이보다는 호흡곤란 상태로 더 극심한 고통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 못에 박혀 쭉 뻗은 팔과 어깨를 끌어내리는 몸무게는 숨을 들이쉬기보다 내쉬기를 훨씬 어렵게 만들고, 이로 인한 이산화탄소 과잉, 근육경련 현상 등이 한층 더 호흡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서 발을 밀어 올리고 팔꿈치를 구부리면서 어깨도 함께 들어 몸을 위로 끌어올려야 했다. 그러나 이런 동작은 못 박힌 발에 몸무게 전체를 싣게 되므로 고통이 극에 달하게 된다. 더욱이 팔꿈치를 구부리는 동작은 못에 박힌 손목을 돌리게 하고 팔의 신경을 손상시키게 되므로 고통은 가중되고 결과적으로 예수는 매번 호흡할 때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치명적인 산소부족(질식)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게 의학자들의 설명이다. 이때 당시 로마인들이 하듯이 죄수의 다리를 꺾어버리면 죄수는 수분 내에 질식사하게 된다.

 

결국 의학자들은 예수의 실제적 사인을 출혈로 인한 쇼크와 극도의 피로에 의한 질식으로 보고 그 외에도 탈수, 불규칙한 심장박동, 심장 쇠약 등의 요인도 배제하지 않는다.

 

지난 80년대 중반 미국의학협회지에 실렸던 이러한 내용은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예수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의 원인을 현대의 의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생생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살이 찢기는 아픔, 팔과 다리에 느껴지는 고통, 호흡곤란으로 점점 조여오는 가슴, 숨을 쉬기 위해 몸을 들어올리면서 느껴지는 손과 발의 극심한 통증 등은 예수를 몇 시간 안에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예수가 느꼈던 정서적인 고독감도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극심하지 않았을까. 전능한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아무런 반항도 없이 참혹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현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를 바라보는 서글픔, 그토록 사랑했건만 스승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제자들을 바라보고 느끼는 배신감과 허탈함 등으로 예수는 죽음과도 같은 처절한 고독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이 모든 고통을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견뎌냈다. 예수의 이 사랑을 생각하면 삶 속에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지던 우리 십자가가 한결 가볍지 않을까.

 

 

자료: 평화신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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