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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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7 ㅣ No.3970

1. 구원

구원이란,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여 한 처음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기에 눈이 너무나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을 취하시어 이루어 주셨으며,

이를 통해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는 완전한 제사이며, 이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체성사는 이를 계속 재현하고 있는 것이며 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그 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 교회는 단순한 이 세상의 인간적 조직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며,

천국의 성인들과 연옥의 갇힌 영혼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의 교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연대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교회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하여 세워졌으며 사도좌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 자체는 그 안의 인간의 불완전함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거룩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내용이 제가 알고, 믿고 있는 가톨릭의 구원관입니다. 

 

2.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 점을 포기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다른 종교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종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도

우리 가톨릭 교회와 연결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말합니다.

가톨릭 교회를 온전히 알게 된 이후에도 교회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분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면 교회의 존재 의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선교에 소극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오해했거나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교가 중요하지 않다면 왜 인류복음화성이 있겠습니까. 

 

3. 프로테스탄트와의 차이

이미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프로테스탄트와의 차이를 말씀드리면,

 

첫째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가톨릭은 원죄로 인해 인간의 눈이 많이 어두워졌다고 보지만

그래서 스스로 구원은 절대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구원은 은총을 통해서 오지만, 인간은 교회를 통해 구원사업에 동참하게 됩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원죄로 인해 인간은 장님이 되었다고 봅니다.

 

둘째, 성사의 문제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동방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성사가 그 자체로써 효력이 있다는 이른바 사효성의 이야기이자 그리스도 신비체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합니다.

'성서에 없는데? 증명할 수 있어? 원죄 때문에 완전히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지? 인간은 그저 구원의 객체일 뿐이야'라고요.

그 결과 가톨릭은 세례를 통해서 깨끗해지고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인간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구원되었다고 쳐준다'고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았는지 못받았는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알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아주 더러운 상태로 캄캄한 밤에 뭔가에 이끌려 아버지의 집에 찾아갔다고 합시다.

아버지를 알게 되고 그 품에 안기는 순간 우리 몸과 옷이 깨끗해지고 아버지와 기쁜 마음으로

관계회복을 한다는 것은 가톨릭의 입장입니다.

반면 우리는 정말 더럽고 추한 존재이지만 안아 주시며, 그 품 안에서 '저는 더러워요. 추해요'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안기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집에 찾아간다는 것도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는 회의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캄캄한 밤 정도가 아니라 눈이 멀어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프로테스탄트식 논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단죄되었습니다.

 

셋째, 성전의 문제입니다.

계시는 글로 쓰여진 것과 입으로 전승된 것이 있다는 것인데요,

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역시 미약하나마 이를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역시 프로테스탄트는 부인하지요. 이유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프로테스탄트에도 수 많은 분파가 있고 견해가 너무나 다르지만

프로테스탄트즘의 출발은 바로 저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그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세상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성인의 통공입니다. 바로 연옥교리의 출발점이지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말입니다.

성사도 마찬가지지요. 성찬의 전례에서 사제가 밀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히 변화시킨다는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안 보이니까요. 증명이 안 되니까요.

완전타락한 죄인이 인간이 그런 것을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에 있다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알 수가 없거든요.

제일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문자화되고 눈에 보이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완전하게 복원시키기 위해서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하면서 분석합니다.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는 미사에 자주 참례하여 함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나누는 사람이지만,

모범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책상에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구원은 연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끓어오르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어떨까요?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말이지요.

성사에 동참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지상에서의 여정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과 성화의 과정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자 교회에 따뜻함을 불어 넣어 주시는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가톨릭 신자가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당황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대체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톨릭 교회 내에는 그러한 개인적인 확신과 열정을 확인하는 용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당신은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음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정확한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임 교황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이 가톨릭 신자의 구원관을

살짝 보여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 그리고 이웃과 사랑을 나눌 때 천국을 느낄 수 있습니다."

 

p.s. 1. 책을 한 권 추천합니다.

랄프 맥키너니 저 , 이재룡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대 가톨릭의 위기 진단"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읽어 보십시오.

 

p.s. 2.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구석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구원을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버렸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열정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열정의 근거가 주로 성경뿐이어서

협소한데다가 성사를 무시하는지라 제도화되지 않아서 열정이 식어 버리면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설령 냉담을 하더라도 스스로 신자라고는 말하는 경우가 많지요. 

 

 

부록.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퍼왔습니다. ^^;;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839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유다인들과 교회의 관계.

새로운 계약의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자신의 신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주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하신”332) 유다 민족에 대한 유대를 발견한다.333)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과 달리 유다인들의 신앙은 이미 옛 계약의 하느님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유다 민족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로마 9,4-5).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로마 11,29).

840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구약의 하느님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서로 유사한 목적, 곧 메시아의 오심(또는 재림)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그들 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르고 오해하는 비극 속에서 세상 끝날까지 그 모습이 가려진 메시아를 기다린다.

841 이슬람 교인들과 교회의 관계. “구원의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이슬람 교인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334)

842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과 교회의 관계는 먼저 인류의 공통적 기원과 공통적 목적에 따른 유대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민족의 기원은 하나이고, 그 궁극 목적도 단 하나 곧 하느님이시다. 좋으신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거룩한 도성에 뽑힌 이들이 모일 것이다.335)

843 교회는 다른 종교들이, 알려지지 않으셨지만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결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선한 것과 참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336)이라고 생각한다.

844 그러나 사람들은 그 종교적 행동 양식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오류와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는 피조물을 더 섬기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 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337)

845 성부께서는 죄 때문에 흩어지고 길 잃은 당신의 모든 자녀를 다시 모으시기 위하여 온 인류를 당신 아들의 교회로 불러모으고자 하셨다. 교회는 인류가 그 일치와 구원을 되찾는 곳이다. 교회는 “화해를 이룬 세상”338)이며, “주님의 십자가의 돛을 활짝 펴고 성령의 바람을 받아 이 세상을 잘 항해하는”339) 배이다. 교부들이 즐겨 쓰는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는 홍수에서 유일하게 구해 주는 노아의 방주에 비유된다.340)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846 교부들이 자주 반복했던 이 단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이해할 때, 이 말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사람들은 마치 문과 같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341)

847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342)

84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만 아시는 길로, 자기의 탓 없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실 수 있다. (신앙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343)) 그러나 교회는 복음화의 필요성과 동시에 그 거룩한 권리를 가진다.”344)

   교회의 보편성이 요구하는 선교

849 선교 명령. " '구원의 보편 성사’가 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교회는 그 고유한 보편성의 내적 요구에서 또 그 창립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한다.”345)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850 선교의 기원과 목적. 주님께서 내리신 선교 명령의 궁극 원천은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이다.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346) 그리고 이 사명의 궁극 목표는, 바로 인간들이 사랑의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시는 친교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347)

851 선교의 동기.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 선교 의무와 열성의 원천이라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재촉합니다”(2고린 5,14).348) 과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1디모 2,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앎으로써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구원은 진리 안에 있다. 진리의 성령의 활동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위임받은 교회는 그들에게 진리를 전달해 주기 위해 그들의 희망을 맞으러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선교적이어야 한다. 구원 계획이 보편되다고 믿기 때문이다.

852 선교의 길. "교회의 모든 선교의 주역은 성령이시다.”349) 성령께서는 선교의 길에서 교회를 이끄신다. 이 선교(missio)는 “계속되며 또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missio)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 나가야 한다. 곧, 가난과 순명과 봉사의 길, 또 죽음에 이르는 자기 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그 죽음에서 승리자가 되셨다.”350)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351)

853 그러나 교회는 그 나그넷길에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그리고 복음이 맡겨진 자들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352) 경험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참회와 쇄신”353)의 길로 나아감으로써만 “십자가의 좁은 길”354)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355) 사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356)

854 바로 이러한 사명을 통하여 “교회는 온 인류와 함께 걸어가 세계와 함께 동일한 지상 운명을 체험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어야 할 인류 사회의 누룩으로서, 또 마치 그 혼처럼 존재한다.”357) 선교 활동은 인내를 요구한다. 우선 이 일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시작된다.358) 그리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는359)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고 지역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이어진다.360) 이러한 노력은 민족들의 문화 안에 복음을 토착화하는 과정으로 접어들게 된다.361) 그리고 실패를 겪는 일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과 집단들 또 민족들과 관련하여 교회는 그들을 오로지 단계적으로 만나고 파고들며 또 그렇게 하여 그들을 가톨릭 교회로 온전히 받아들인다.”362)

855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향한 노력을 요구한다.363) 과연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세례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 자녀들에게서 교회가 그 고유의 충만한 보편성을 실현하는 데에 장애가 되고 있다. 더욱이 교회 자체로서도 그 현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충만한 보편성을 드러내기가 어렵게 되었다.”364)

856 선교 임무에는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의 존경 가득한 대화가 포함된다.365) 믿는 이들은 “마치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과도 같이 이미 민족들에게 있는 진리와 은총”366)을 더욱 잘 알게 됨으로써 이 대화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민족들에게 베푸신 진리와 선을 공고히 하고 보완하며 향상시키려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367) 그들을 오류와 악에서 정화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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