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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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세요(연중 5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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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pppcho] 쪽지 캡슐

2001-02-04 ㅣ No.1968

안녕하세요? 올해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참 눈이 많이 오지요? 눈이 잘 오지 않을 때는 눈이 좀 왔으면 좋겠다 라는 바램을 가졌었는데, 올 해는 너무나 눈이 많이 와서 이제 좀 그만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그러세요?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을 하면서 사는 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나'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요즘에는 아파트에 많이 살기 때문에 좀처럼 보기 힘들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쉽게 볼 수 있었던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보통 집 문 앞에 쓰여져 있는 글씨인데요. 그 단어는 "개 조심"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요즘에는 보기 힘들지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개를 무척이나 무서워했지요. 그래서인지 친구 집에 놀러가서 그 집 앞에 이 단어가 쓰여 있으면 들어가기를 상당히 꺼렸습니다. 한번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어머니 친구 분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 '개 조심'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이었어요. 더군다나 그 집 대문이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을 다했지요. '혹시 저 문을 통과하면 송아지 만한 개가 나를 물지는 않을까?', '저 열려있는 대문으로 개가 튀어나와서 나를 덥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그 집 근처에 가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지요. 들어갈까, 말까를 반복하면서 말입니다. 다행히 잠시 뒤, 어머니 친구 분이 나오시는 바람에 그 분 손을 꼭 잡고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집 대문에 붙어 있었던 '개 조심'의 개는 너무나도 작고 귀여운 강아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개'보다는 그 '개 조심'이라는 글씨가 더 무서웠던 것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자체보다는 그 이름을 더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지요.

 

가난, 실패, 체면, 패배, 좌절, 고독, 이런 부정적인 이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실상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자체인지를 아니면 그 이름 자체는 아닌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넌 가난해, 넌 실패할꺼야, 너는 패배할꺼야, 너의 체면은 구겨질걸, 등등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 그 말을 더 무서워하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시몬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이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과 비천한 자기가 같이 있다는 것, 그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즉, 그는 하느님의 아들과 죄 많은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 베드로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 그의 손을 잡아주시는 든든한 빽이 되시겠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괜히 내 안에 헛개비를 만들어서 스스로 두려움 속에 빠지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마태오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장차 신부님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시시의 프란치스꼬 성인전]을 읽고서는 감동보다는 걱정이 더 생기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 근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아무리 해도 성 프란치스꼬의 성덕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일 제가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갔을 때 하느님께서 저에게 너는 왜 프란치스꼬가 못 되었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그랬더니 본당 신부님이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절대로 하느님께서 너에게 그렇게 물어 보시지 않을거다. 다만 이렇게 물으실거다. '너는 왜 마태오가 못 되었느냐?고."

 

정말로 그렇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비교를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고유한 내 자신의 특성을 못살리고서 비관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꾸짖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하는 것은 우리 인간 세상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교하지 말라고 제 자신에게 말해도, 내 자신도 모르게 남들과 비교할 때가 참 많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나는 왜 차이점만을 찾고 있었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차이점을 찾기보다 공통점을 찾는다면 이 세상을 더 기쁘게 살 수 있을텐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토록 훌륭하고 멋진 사람도 나와 이 점에 있어서는 똑같다, 저렇게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는 사람도 나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가?"

 

아무리 자그마한 공통점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 내가 존경하는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사람인 이상 공통점이 최소한 한가지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자신감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바로 다른 사람과 내가 같다는 공통점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부족해 보이는 시몬 베드로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고,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세우셨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 좌절하신 분, 그리고 '나는 안돼'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책하시는 분들. 이제 용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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