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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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보기 * 교회야, 세상과 함께 울지 말라 (루가7,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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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19 ㅣ No.147674

(공동번역성서) 2021. 6. 19. 성경바로보기

교회야, 세상과 함께 울지 말라 

(루가7,31~35)

3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과 같을까? 32 마치 장터에서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아이들과도 같다. 33 너희는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34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35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 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

 

아르헨티나에는 성녀라 일컬어지는 에바 페론의 무덤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톨도스(toldos)에서 농장의 요리사인 어머니와 농장주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바가 열여섯 살에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입성을 하여 결국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일국의 국모가 됩니다. 그녀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의 후광을 입고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 부의 재분배를 실천한 공로로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민초들의 성녀로 추앙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에바 페론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되었는데도 그녀의 무덤에는 항상 싱싱하고 새로운 꽃들이 사시사철 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그녀를 잊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매일같이 그녀의 무덤에 참배를 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아르헨티나 방문 동안에, 없는 시간을 쪼개어 에바 페론의 무덤을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숙소 근처에 있는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향했었습니다. 그건 그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비타라는 뮤지컬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에서가 아니었습니다.

대학시절, 에바 페론이라는 여자가, 제가 좋아하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의 뮤지컬 에비타의 주인공이며 실제인물이란 것을 알았을 때 저는 그녀의 포퓰리즘(populism)에 대해 선배들과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기영합주의로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 독재의 기반을 다졌던 그녀의 결국이 어떠한가를 보기위해 그녀의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오직 성공이라는 것을 목표로 하여 아르헨티나의 수도로 입성을 한 에바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자신의 얼굴과 몸을 무기로 하여 접근을 합니다.

꽃다운 소녀시절에 지방 공연을 온 유명한 탱고가수와 하룻밤 잠자리를 하고 그를 좇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를 한 그녀는 방송국 관계자들이나 정부 관리들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한 후 배우가 되기도 하고, 성우가 되기도 하고, 모델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1944년에 아르헨티나의 산후안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아르헨티나 전체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곳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 행사에서 통일 장교단의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다음 해에 대통령에 당선이 됨으로 해서 갑자기 스물여섯의 나이에 영부인이 된 것입니다.

 

열여섯에 고향을 떠나 창녀와 방불한 삶을 살며 오직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던 에바가 결국 몸뚱아리 하나만으로 수도입성 10년 만에 여자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에바는 전 세계 상류 사회 여성들의 유행을 이끄는 여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사치와 낭비의 표본으로 삽니다.

유럽의 상류사회 여성들이 에바 페론의 옷차림과 보석들과 악세사리들을 앞 다투어 따라했을 정도로 에바 페론의 낭비벽과 사치는 극에 달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에바가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성녀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복지정책으로 인한 부의 재분배를 실행에 옮긴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세계경제 7위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국가의 부가 전부 상류 지배층에 의해 갈취가 되어 유럽으로 흘러 나가고 있었습니다. 에바는 그 상류층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줌으로 해서 가난한 민중들의 인기를 독차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바는 소외계층의 근본적 원인 해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민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마구잡이식으로 복지정책을 폄으로 해서 아르헨티나 경제를 오히려 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르헨티나가 지금처럼 가난한 나라가 된 것에 그녀가 많은 공헌을 했다는 것이지요.

많은 후세 역사가들은 그녀가 성공과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부자들의 재산을 이용하여 민중들의 인기를 샀다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한 대중의 민심사기, 인기 영합주의를 정치용어로 포퓰리즘(populism)이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것처럼 보였지만 뒤로는 온갖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독재를 즐겼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출세를 위해 몸을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성공만을 위해 달렸던 그녀가 서른셋의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부호들과 독립영웅들, 그리고 세계적인 학자들과 예술가들, 역대 대통령들만 묻힐 수 있다는 레콜레타 묘지에 묻힙니다.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인간 탐욕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한 고급호화 음택 단지입니다. 그녀의 묘지에 쓰인 대리석이나 관 등의 모든 재료는 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수해 온 것들입니다. 성공과 번영을 위해 모든 것을 올인 하여 달렸던 한 여인, 오직 성공과 부를 위해서 몸을 팔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환심과 인기를 샀던 그녀, 그녀가 최고의 자재로 만들어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레콜레타 묘지의 특징은 밖에서 안이 다 들여다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속의 관과 부장품들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에바 페론이 바로 눈 앞에 보입니다. 게다가 에바 페론은 미이라로 만들어져서 그의 시체에는 서른 셋 생전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녀의 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생전의 화려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최고급 관에 누워 최고급 대리석으로 꾸며진, 1m23천만 원에 육박하는 값비싼 땅에 여전히 자신의 세상 집을 갖고 있는 그녀가 지금 이 세상과 아무런 교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묘지에 매일같이 꽃을 꽂고 가고, 그 묘지 앞에서 통곡을 하며 그녀를 그리워하는데 정작 그녀는 그러한 시간 속의 현실과는 아무런 교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몸까지 팔아가며 달리고 달려서 결국에는 세상과 아무런 교통을 할 수 없는 몇 평 안 되는 묘지에 머무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 레콜레타 묘지에 무려 7,000기 이상의 묘지가 있는데 그들이 전부 에바 페론 이상의 성공과 부와 명예를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부 관 속에 누워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쥐들의 먹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레콜레타 묘지에 가면 고양이들이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몰려다닙니다. 하도 쥐들이 많아서 묘지 측에서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곳에 누워있는 시체들은 이제 작은 생쥐 하나를 쫓아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죽은 흙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엄청난 인물들의 무덤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기 이름 남기기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 무덤 하나하나에 최고의 자재를 쓰는 것은 물론이요 당대의 최고의 예술가들을 고용하여 화려한 조각과 작품 들을 묘지에 새겨 넣습니다. 진시황의 묘나 이집트 파라오들의 무덤들을 응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생전의 업적들을 사진으로 도배를 하기도 하고 개인 청소부를 고용하여 매일같이 묘지를 닦고 청소하게 하기도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반 이상의 묘지가 거의 쓰레기장처럼 변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문의 명예와 세상의 평판이 받쳐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명예의 전당, 레콜레타에 묻힐 정도면 거기에 묻힌 이들의 생전의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대가 못가서 가문이 몰락하고 돈이 떨어지게 되자 그 묘지가 폐허가 됩니다. 인간 세상 영화의 덧없음입니다. 쥐들만 가득하고 잡초만 무성합니다. 심지어 자손들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묘지도 그렇게 폐허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자식들의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어버린 그런 부모는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의 영광과 인기와 이름을 챙기기 위해 살던 이들의 결국인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과 인기와 명성과 성공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포퓰리즘을 이용해서라도 기어코 쟁취해 내려는 악마적 속성의 최후. 그게 레콜레타 묘지 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에 에바 페론과 똑같이 서른셋에 돌아가신 어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에바 페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어려운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목수의 아들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돌로 떡을 만들 수도 있었고,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하늘의 천사들이 수종을 들러 내려와 그 분의 발을 받쳐야 하는 하늘의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몸을 치장하기 위해 사치를 하지도 않았고 보석으로 멋을 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대중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매일같이 오병이어로 뻥튀기를 해 주시지도 않았고 변변한 무덤도 없어 다른 이의 무덤을 잠시 빌려 쓰셔야 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왕으로 추대하겠노라고 찾아 온 무리를 피해 산으로 도망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렇게 변변한 무덤 하나 남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쓸쓸히 죽어간 그 분을 승리자라, 왕이라 칭하십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다가 갑니다. 하나는 자기의 이름과 평판과 인기와 힘을 챙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름 남기기, 흔적 남기기의 욕망을 끊임없이 공격당하다가 결국 인간의 이름 남기기의 욕망이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흔적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를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 하고 후자를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부인하다 가셨습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힘을 소유하고 이름을 남기고 멋진 명성을 쟁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워지고 털리고 빼앗기다가 결국 이름까지 빼앗기고 예수의 이름을 받아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부화뇌동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루가 이렇게 일갈을 했던 것입니다.

 

(고후6:14~16) 14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짓지 마십시오.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이 될 수 있으며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습니까? 15 그리스도가 어떻게 벨리아르(악마의 이름)와 마음을 합할 수 있으며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무엇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16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단순히 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와 세상의 삶의 원리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체의식을 갖고 사는 세상 사람들과 예수가 나의 삶의 주체가 되어 살게 되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같은 방향으로 흘러 갈 수 있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聖徒)는 레콜레타 묘지의 그 화려한 무덤들과 같은 유의 명성과 인기와 화려함을 남기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무덤조차 찾을 수 없는 조용한 결국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가리켜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이요 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해 이 세상은 성도에게 있어서 원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적국에서 큰 벼슬을 하고 이름을 남기는 것이 하느님 나라 백성에게 자랑이 될 수가 있는 것인가요? 적국에서 이름을 남기는 건 역적입니다. 그렇게 적국에서 이름을 남기겠다고 하는 자들은 이미 적국으로 국적을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은 반역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성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바로 그 단단하고 굳은 마음을 제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자아 해체 작업이며, 지기 부인의 삶이며,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의 성도의 삶은 자기부인의 절정인 이름 없음의 삶으로 끝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는 이 세상에서 절대 유명해 지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렇게 평가를 해 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도 본인의 자랑이나 추구 목표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가 바로 이름 없이 죽는 자인 것입니다. 화려한 무덤 남기지 않고 죽는 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터 아이들의 놀이를 들어서 비유를 하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장터의 아이들이 피리를 불며 혼인잔치 놀이를 하는데 어떤 아이가 그 피리 장단에 춤을 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애곡을 하며 장례식 놀이로 바꾸었는데도 그 놀이에 참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선행을 가르쳐도 세상이 따라하지 않았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절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그 말씀을 쫒아 살 수가 없습니다. 그걸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리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종교 놀이를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종교 놀이를 하고 있는 자들은 타락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종교조차 자신들의 세상 적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자신들의 이름과 인기와 평판과 힘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섬긴다고 하는 신까지 이용해 먹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한 금욕의 삶, 도덕적 윤리적 바른 삶 등을 내어 놓기도 하고 엄격한 종교 행위를 내어 놓기도 합니다. 그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에 실용주의, 합리주의, 인본주의로 이름을 바꾸어 나타난 유대주의이며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실용주의와 합리주의, 성공주의, 인본주의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인간의 만족, 인간의 행복, 인간의 천국, 인간의 구원 등에만 있습니다. 그걸 자아 숭배 교라 합니다. 다른 신을 섬긴다고 너스레들을 떨지만 결국 그들의 신은 자기 배()입니다. 심지어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들도 그들도 모르게 섬기는 신이 있는데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아무튼 타락한 인간들은 종교까지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섬깁니다. 그래서 그러한 유대주의의 대표 격인 유대인들의 삶을 보면, 일 년에 한번만 하면 되는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으로 늘이기도 하고, 정결 예식 때만 행하면 되는 씻는 행위를 밥 먹을 때에도 행하고, 장터에 다녀와서도 행하고,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도 반드시 몸을 씻어 정결함을 유지하겠다는 기특한 행위들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는 안식일을 수시로 범하고, 손도 안 씻고 음식을 먹으며, 세리와 창녀들과 자주 어울리고,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는 자기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지독한 욕을 해 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종교 행위를 하며, 아니 종교 놀이를 하며 애곡을 하는데 예수님이 같이 울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본문 34절인 것입니다.

 

(루가7:34) 34 사람의 아들(人子)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사는 이 세상 아담의 무리(群像)들은 진화론에 근거한 역사 낙관론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엉터리 선민사상에 빠져 자신들의 결국은

반드시 화려한 다윗 왕국의 회복으로 끝이 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라는 자가 와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 밖의 광야에서 연신 회개하라를 외치며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역사 낙관론과 선민사상으로 하느님과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놈이 나타나 광야에 서서 웃기지 마라하고 초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본문 33절입니다.

 

(루가7:33) 33 너희는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회개하라, 메시아가 온다를 외치다가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라는 예언자는 그 메시아를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칭해졌던 것입니다. 그가 뭐가 잘나고 위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자라는 의미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 없었고 그 분의 부활을 목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그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본 정도가 아니라 그 분이 아예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그 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으로의 강림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작은 자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교회는 모두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하고 예수와 연합되어 하나로 살게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례요한은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가장 큰 자로 온 세례요한과 교회를 비교하여 교회에게 부어진 엄청난 하느님의 은혜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세례요한이 유대주의, 즉 인본주의의 역사 낙관론에 초를 치며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아니면 너희는 모두 가짜다하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역사관은 프로페틱 페시미즘 (prophetic pessimism, 역사 비관주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세상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프로페틱 페시미즘. 그런데 택함을 받은 소수의 하느님 백성들 이외에는 절대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비관적 시선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끝내 회개하지 않고 멸망할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도 저 속에서 이름을 남기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힘을 갖고 싶다라며 세상의 놀이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그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아, 지금은 너희들이 이 세상 속에서 큰 자됨을 꿈꾸며 아주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진짜 큰 자는 믿음으로 예수를 보고, 예수와 함께 동행 하며,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하고 세상에 초를 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이 피리를 불어도 함께 춤을 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함께 울지 않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을 지켜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기특한 종교 행위를 통하여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인본주의이며, 율법주의인 것이고, 유대주의인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총칭하여 땅의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로가 필립비서에서 이렇게 요약을 해 줍니다.

 

(필립3:18~20) 18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 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름과 우리 자신의 영광과 인기와 힘과 평판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아 사는, 자아 숭배의 삶이고 그것은 전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며 그들이 지옥에서 멸망당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 앞에 납작 엎드려서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가 아니면 저는 존재조차 불가능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골로3:2-3) 2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3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마치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그 수많은 시체들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과 교통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도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고, 한국이 월드컵 4강에 들어가도 시체들은 전혀 기뻐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하늘의 시체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그들이 성취한 성공이나 승리, 소유의 다소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요구하는 율법의 행함도 무용한 것이 되고, 다른 이들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시체들에게는 그러한 세상 놀이의 재미가 전혀 느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해도 괜찮고, 못 생겨도 괜찮습니다. 시체는 자기 몸에 명품을 두르는 것도 시시해 지고, 자기 들은 살았다고 박박 우기는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야 합니다. 그게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고, 세상의 애곡에 따라 울지 않는 하늘의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오히려 하늘의 백성들은 세상의 환호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세상의 애곡 속에서 환희를 챙길 수 있는, 그야말로 이방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지요? 우리는 세상의 힘 앞에서 수시로 넘어집니다.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부럽고,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내 자식이 졸업식에서 상이라도 받으면 어깨가 우쭐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철장을 들고 백마를 타고 우리의 인생 속으로 출격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검과 언약의 철장으로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옛 사람의 기대와 희망을 시간 속에서 하나하나 죽여가십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레즈는 우리 인간 속에 수많은 애벌레 자아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벌레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내용은 미숙함과 다 자라지 않음, 그리고 다수입니다. 인간 안에는 수많은 다수의 자아가 애벌레처럼 미숙하게 꿈틀대고 있다가 그게 의식의 표면에 닿게 되면 그것이 자아로 표출이 되게 되고 그것이 그 순간 그 인간의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수시로 변개하는 고정되지 않은 미숙한 것이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어떤 사실(fact)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대한 반응이 줄곧 한가지로 나오지 않지요?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어떤 때에는 호의 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불쾌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인간은 어떤 동일한 사건을 직면하면서도 그 사실(fact)를 매순간 다르게 주관화하여 인식을 합니다. 들레즈는 그것을 애벌레 자아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진짜 자신의 자아가 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을 크고 질긴 막으로 둘러 싸 버립니다. 그 막을 방어기제라 불러도 좋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애벌레 자아들을 방어기제 같은 막으로 감싸고는 이것이 나의 자아라고 근사하게 연극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어느 순간 스스로의 연극에 속아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선행과 착한 일과 종교 적인 열심을 내어 놓으며 이게 바로 나다라고 하면 세상이 다 속습니다. 세상에 의해 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막이 그 사람의 자아로 평가를 받고 그 자신에게도 그게 자아가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말씀의 칼로 그 인간 속, 수많은 애벌레 자아를 감싸고 있는 방어기제로서의 막을 찢어발기십니다. 그리고는 그 꿈틀거리는 애벌레 자아들을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내십니다. 루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루가2:35)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칼이 되셔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면서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 속의 애벌레 자아를 둘러싸고 있던 자기 방어기제의 막, 그 가면이 찢기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의 미성숙하고, 더럽고, 조변석개하며, 탐욕에 가득 찬, 자기 밖에 모르는 진짜 자신을 폭로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자아로는 그 어떤 노력과 열심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절대 하느님과 화해를 할 수 없다는 것도 처절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무능력과 불가능함 속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자기 배라는 신을 향해 꿈틀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옛 자아를 조금씩 죽여가시는, 쉬운 말로 자기부인의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수많은 애벌레 자아를 완전히 빼앗기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처럼 주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또 빼앗기다가 결국 주인이 왔을 때 모두다 빼앗기는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자신의 이름을 위해, 호화로운 무덤 자리 마련을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았던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요구하는 장면에서 도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루가3:3,7-9) 3 그리고는 요르단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8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세례요한이 율법과 유전에 의해 하루에도 열 두 번 씩 물로 씻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건 율법과 유전에 의한 그들의 씻음이 전혀 무가치하다고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열심히 씻고 있는 그들에게 다른 물과 다른 씻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례를 받겠다고 나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느냐?’하고 야단을 칩니다. 세례를 받으라고 해서 나왔는데 욕만 실컷 얻어먹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의 유대주의는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근거로 행복과 구원과 상급에 도달하겠다는 인본주의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회개의 세례란, 나의 모든 가능성을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주의 자들은 그 세례마저 자신들의 열심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게 자신을 우상삼아 살고 있는 모든 아담군상들의 본성입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 세례마저 천국에 들어가는 도구로, 너희들의 업적과 공로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구나, 아니다. 세례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라는 절박한 은혜의 필연성에 대한 자각이 있는 자들의 항복 선언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면 세례요한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종교행위와 선행을 독려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안 그러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게 된다고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단순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착한일이나 종교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이미 유대인들이 잘하고 있었던 것이란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해 놓고 그 구체적인 세목을 제시하는데 그것을 잘 보시면 그 열매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루가3:10-14) 10 군중은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1 요한은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2 세리들도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요한은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 내지 말라' 하였다. 14 군인들도 '저희도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이것들이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충고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제시하는 것은 자기부인입니다. 세례요한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 무리들에게 입을 것, 먹을 것의 여분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자아의 행복과 구원을 스스로 쟁취하려 하는 자들이 미래의 희망을 위해 쌓아두려 하는 삶의 잉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옷을 두벌씩 겹쳐 입는 사람 없고 한 끼에 두 끼 식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두 벌 옷과 두 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투 하는 것은, 자기 주체의식에 사로잡힌 자아 숭배 교 신자들, 옛 아담에 속한 자들이 스스로의 안위를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하느님 모독 행위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단순히 구제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이 세상의 자아 방어기제들을 놓아버리라는 충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만의 성공과 명성을 위해 사는 옛 사람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성공적인 미래를 꿈꾸며 삽니다.

 

그렇게 옛 사람 안에 갇혀 있는 과거의 존재가 현재라는 과정을 통과하여, 미래의 되고 싶은 지점으로 향하는 모든 활주로를 가리켜 희망이라 한다고 했지요? 인간은 바로 그 희망이라는 것을 위해 두벌 옷을 준비하고, 잉여의 먹을 것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바로 그 잉여의 비축 물들을 부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것 이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하면서 그들의 잉여 비축을 막고, 군병들에게는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남의 것을 탈취하지 말고 받는 월급으로 족하게 살라고 그들의 잉여 비축을 막습니다.

그러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한 마디로 이 세상 속에서의 희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정직하게 살라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완료되고 종결된 미래의 희망, 즉 영생과 구원이라는 소중한 유업을 소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희망이라는 것을 위해 자신 안에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을 감추어 두고 열심히 그것들만을 추구하느라, 완료되고 종결되어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소망의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세상 적 희망이 참 가치의 희망을 가리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타락한 옛 사람에서 비롯된 세상 적 희망을 쫒아 살게 되면 결국 죽음으로, 멸망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침투하셔서 그 희망을 부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소망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면서 도끼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또 다른 세례를 아울러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루가3:15-17) 15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으므로 요한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17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자신은 물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어떤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으셨지요? 성령 세례지요? 물세례의식은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모형 화하여 상징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3:5-7) 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물세례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모형 화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는 성도는 반드시 그 물이라는 것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서 비롯된 성령 세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세례라는 모형을 잘 공부하면 금방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로 가면 그 물세례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1베드3:20~21) 20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 가 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들뿐이었습니다. 21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올라 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당신에게 복종시키셨습니다.

 

물은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이미 홍수로 예표가 되었던 것인데, 성경은 그것을 세례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의 물은 심판의 물이기도 했지만 구원의 물이기도 했지요?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치워져야 할 것들이 모두 심판을 당해서 죽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소유만이 순결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율법과 유전의 의식으로 행했던 단순한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는 것 정도가 아니라(그건 얼마든지 인간의 방어기제로도 위장이 가능한 것이므로) 선한 양심, 즉 애벌레 자아가 폭로되고 제거된 후 선하게 재창조된 마음이 이 세상의 다른 힘들에게서 떠나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것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자요한이 물세례를 주면서 도끼가 이미 너희 뿌리에 놓였다고 말을 한 것은, 착한 일 많이 안하면 찍어서 불태워 버리겠다는 협박이 아니라, 세례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의 자아숭배 사상, 옛 사람의 희망이 찍혀지고, 하느님에 의해 완성이 된 희망에 의해 우리의 삶이 잠식되어지는 것임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라고 해 놓고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에게 너희들은 너희들의 힘으로 임박한 진노를 절대 피할 수 없는 자들이다라고 그들의 실체를 폭로시켜 버리고, 그러한 너희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도끼에 의해 옛 사람을 도륙 당하는 길 뿐인데 그 길은 너희들의 잉여가 폭격을 당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가 세례요한의 물세례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 얻은 성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각에서 시작이 되어 나는 불가능한 죄인임으로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대신에 우리 예수님께서 요나의 이야기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당신 자신이 저주의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정작 죽어야 할 내가 살아났습니다라는 복음의 이해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현실을 우리 삶 속에서 실제화 하여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만을 사랑하고, 내 가족, 내 집, 내 교회, 내나라, 우리 팀, 내 재산 만을 사랑하며 살았던 나의 애벌레 자아들을 폭격당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여정에 있는 자들은 세상이 환호하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외로워하게 되는 것이고 세상이 애곡하고 슬퍼하는 현실 속에서 기뻐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월드컵 경기의 승리로 환호하고 있는데, 저렇게 편을 가르고 싸우면서 내 편이 이겼을 때, 상대편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뻐하기만 하는 것이 인간의 죄 성인데, 하면서 오히려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것이 성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꼭 이겨야만 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자식들이 꼭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왜 내 자식이 어딜 가서 맞고 들어오면 그렇게 화가 납니까? 그럴 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지요? ‘이 놈아 인간과 짐승이 다른 점이 뭐냐?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천에 깔린 도구 하나 사용하지 못하고 왜 맞고 들어와?’ 아닙니다.

성도는 당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고, 비우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고, 손해 보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마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숙되어져 가는 성도는 세상의 가치와 힘의, 획득과 손실에 의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세상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자 됨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성도는 진짜 큰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큰 것이 무엇이라 했지요? 예수를 가까이에서 인식하고 바라보는 것이 진짜 큰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힘의 원리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이해가 되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루가7:35) 35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

 

분명 이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데 그 지혜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탄생한 하느님의 자녀에게만 옳다고 인정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옳다고 인정하셔야 하는 분들인 것입니다.

비록 이해가 가지 않고 설득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늘 옳으시다라는 마음을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하느님을 섬기는 시편기자가 실족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느 때에 실족할 뻔했다고 합니까? 세상이 오히려 자기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고, 부자가 되며, 죽을 때도 기운이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실족할 뻔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탄생된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들은 하느님의 지혜를 옳다 인정한단 말입니다. 쉽지 않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정말 오실 그 이가 맞습니까?’하고 묻게 하지요? 세례요한도 자신을 감옥에서 건져주지 않는 나약한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해가 안 갔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하시면서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강변하십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하여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수시로 의심합니다. 그건 옛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옛 사람이 살아있으면 희망이 함께 시퍼렇게 삽니다. 희망이 살아있을 때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와 원망과 불평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철장으로, 당신의 도끼로 우리의 옛 사람을 찍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그 승리로 향하는 길에 우리 삶에 때때로 찾아오는 예수님의 도끼질을 옳습니다하고 반기게 될 실력자들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뭐 대단한 거 하려고 하지 말고 잘 참아 내십시오.

 

세계 최고의 호화 유람선인 타이타닉 호가 빙산을 들이받고 박살이 나기 전에 그 배 위에서는 현란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의해 산산 조각이 나서 차디찬 바다 아래로 침몰할 때 그 배 위에서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라는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의 파티를 즐기느라 세상과 함께 피리 불며, 노래하며, 하느님 나를 잊고 삽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잔치를 엎어 버리시고 그 잔치 자리에서 통곡을 하심으로 그들의 입에서 찬송을 받아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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