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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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보기 / 천국을 위한 고자(鼓子) 이야기 ?(마태1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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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26 ㅣ No.147873

 

 

(공동번역성서) 2021. 6. 26. 성경바로보기 

 

 천국을 위한 고자(鼓子) 이야기 

 

(마태19,1-12)

1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는데 2 사람들이 또 많이 몰려 왔으므로 거기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3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5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7 그들은 다시 '모세는 '아내를 버리려 할 때에는 이혼장을 써 주라' 고 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다. 8 예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9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10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12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 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 들여라.'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의하면 2013년 한해 한국 내의 결혼대비 이혼율이 무려 49%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물론 통계청의 통계와 보건복지부의 통계산출 방식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걸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아무튼 결혼대비 이혼율의 폭발적 증가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단언하건대 이혼율은 앞으로 더더욱 폭발적 증가추세를 견지하게 될 것이고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도 점점 경홀히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현상 속에서 단순히 결혼의 의미상실과 이혼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가슴 아파해야 할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이 구속사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해석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해석학적 공동체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 결혼은 소중한 것이라느니, 성도에게 있어서 이혼이라는 것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는 등의 조잡한 결론을 맺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정말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 속에서 인간과 종교와 도덕과 윤리에 대한 교훈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 종교, 도덕, 윤리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들에 대한 교훈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하느님의 은혜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책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오늘 본문 속에서도 예수를 찾아낼 생각을 해야지 이혼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는 유()의 가난한 교훈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올바로 해석을 해 내기 위해서는 먼저 이 이야기가 어떤 문맥 속에 담겨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18장 서두의 어린 아이 이야기와 이 본문 바로 밑에 붙어있는 또 다른 어린아이 이야기로 샌드위치처럼 싸여 있습니다. 병행 구절이 들어 있는 마르코복음에서도 이 이혼의 이야기는 똑같이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샌드위치 구조는 그 양쪽의 빵이 속을 강화하거나 샌드위치 속이 양쪽의 빵을 구체화 하는 식의 구조라 했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은 그 양쪽의 어린아이 이야기와 뗄래야 뗄 수없는 긴밀한 연계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오늘 본문의 앞쪽 빵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18:1-5)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물었다.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 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누가 위대한 자(큰 자)인지를 놓고 다투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위대한 자입니까?’ 제자들이 누가 위대한 자(큰 자)인지를 놓고 싸웠다는 것을 너무 쉽게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싸웠다는 것은 누가 훌륭한 자인지를 겨뤘다는 것이고, 그건 누가 더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내어 놓고, 누가 더 열심 있는 선한 삶을 사는 자인지를 겨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로 따지면 누가 더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누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취 물을 많이 내어 놓았는가를 자랑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게 나쁜 건가요?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의 다툼과 물음 속에 어린아이 하나를 투입시키십니다. 그리고는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이 대척점에 그려지지요?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겸손하지 않으면,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그런 협박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천국의 존재양식에 대해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누가 크고 작은가와 전혀 무관하게 사는 곳임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크고 작음의 구별이 있는 곳은 타락한 이 세상입니다. 여기가 바로 어른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어른들이란 세상이 창안하고 요구하는 고착된 사고체계를 갖고 사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크고 작음의 가름전쟁 속에서 큰 자에 속하기 위한 전투를 하며 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땅의 인간들의 삶은 모두가 게임 같습니다. 땅을 많이 차지해야 이기는 바둑, 상대편의 왕을 먼저 제거해야 이기는 장기, 상대방을 먼저 때려 눕혀야 이기는 수많은 격투기 경기, 경마, 축구, 야구, 포커, 노래방, 미술대회, 음악 경연 대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등 모든 게임이 다 어른들의 고착화된 사고체계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들입니다.

이겨야 하고, 크게 되어야 하고, 먼저 때려 눕혀야 하고, 먼저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한 게임에는 절대 용서와, 사랑과, 믿음과, 화해가 가입이 되면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른들의 세상입니다. 어른들의 세상은 그 자체가 게임입니다.

그러한 어른들 세상의 위대한 자(큰 자) 싸움이 종교와 일상으로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서도 경쟁이 일어납니다. 누가 더 열심히 기도하는가?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하는가? 누가 더 전교를 많이 하는가? 누가 더 착한 일을 많이 하는가? 누가 더 봉사를 많이 하는가? 등등. 그리고 그 성취 정도에 따라 반대급부를 바라게 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상급 운운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바로 그러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 자처럼 살고 있느냐를 따지고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가를 점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부모 의존적 존재로서의 어린아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세상의 고착화된 사고체계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딱지가 소중한 것입니다. 어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속에서 딱지는 무가치하고 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고착화된 세계관과 가치관이 없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쇠침대가 그들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딱지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성도는 그렇게 어른들의 고착화된 가치관과 사고체계에 의해 힘과 가치로 규정 되어진 그런 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자랑하는 자가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거기가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느님의 은혜로 건설이 되고, 하느님의 은혜로 운영이 되며, 하느님의 은혜로 통치가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들이 사는 것입니다. 거기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나라인 천국에서는 절대 위대한 자와 작은 자의 구별이 있을 수도 없고, 자기의 공로를 내세워 비교 상대적 우월감도 누릴 수없는 그런 곳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 합당한 대우를 요구하거나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만을 구하고 바라보며 사는 곳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어른들의 위대한 자 싸움의 일환으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열심이 오히려 주님의 전(殿)을 삼키는 행위라고 선언을 합니다.

 

(시편69:9-11) 9 당신 집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당신 향한 욕설이 이 몸 위에 쏟아져, 10 내가 단식하며 목메어 울었더니, 그것이 도리어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11 베옷을 걸치고 슬퍼했더니 도리어 남의 말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성전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자신을 삼켰다고 말을 하고 기도와 단식이 오히려 자신에게 욕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옛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속에서 행해지는 행위를 전부 기각해 버리시고 때려 부수셨을 때 제자들이 바로 이 구절을 떠올렸다고 하지요?(요한2:17)

그건 율법과 제사와 선행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복음과 연계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그 열심 있는 행위가 그를 삼켜버려 지옥으로 끌고 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계산하여 사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만 살게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모델로 하여 천국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해 아이들아하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마르10:24-25) 24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여기에서 얘들아테크논, 어린아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18장 서두의 어린아이 이야기는, 세상의 어린아이들인 제자들 앞에서 진짜 어린아이가 등장하여 그 세상의 어린아이들을 하늘의 어린아이로 끌어들이는 구속의 그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185절로 다시가 보겠습니다.

 

(마태18:5) 5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영접) 사람은 곧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어린아이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밟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순으로, 싫어 버린바 되시는 몸으로, 구유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인간들의 처음자리인 어린 아기로 연약하게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한 어린아이로 오신 예수의 삶을 이해하고 그 무익해 보이는 어린아이로서의 예수를 맞이(迎接)하는 자만이 천국의 어린아이로 편입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으로 가보면 예수님께서 뒤쪽 샌드위치 빵의 어린아이를 굳이 단수로 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르10:13~16)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13, 14, 16절의 어린아이는 모두 복수인데 15절의 어린아이만 단수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 땅에 어린아이로 오신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느님의 어린아이로 오셨습니다. 완전한 하느님 절대의존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말만했고 시키시는 일만 했습니다. 그게 어린아이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없습니다. 자신의 계산이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전혀 무관한 행보를 걷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어른들의 세상이 가치로 규정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고 오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딱지나 구슬처럼 보이는 연약함만을 입고 오셨습니다.

어른들의 세상은 절대 그 천국의 어린아이의 행색이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시하고 때리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하느님께서 택한 자들만이 그 어린아이의 삶, 십자가와 수난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어린아이를 맞이하고 똑같은 어린아이의 삶으로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어린아이 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호세아서로 가보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린아이들로 부르셨는지가 조금 더 명확해 집니다.

 

(호세11:1-3) 1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2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바알 우상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3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 본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린아이들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기 전의 어린아이들은 이 모양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기 전의 어린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안고 치료를 해 주려 해도 그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게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인 것입니다.

왜 자기도 힘이 있는데 자기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아버지의 말에 복종을 해야 하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어른흉내 내는 아이들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내치지 않으시고 고쳐내고야 마십니다.

 

(호세11:8~9) 8 에브라임아, 네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 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9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은 이렇게 어른흉내나 내고 있는 당신의 어린아이들을 진노로 멸하지 않으시고 천국의 어린아이로 고쳐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참으로 신비합니다. 진짜 하느님의 아기를 이 세상으로 보내셔서 그 아기 속으로 어른 흉내 내고 있는 철없는 아기들을 끌어당기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사9:5-6) 5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6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

 

바로 이 아기가 창세기 315절의 여인의 후손으로 난 아기인 것이고, 갈라디아서 316절의 그 자손인 것입니다.

 

(갈라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도 후손들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단수를 쓰지요? 그게 하늘의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하느님은 창세전에 당신의 어린아이들을 택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들로 택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여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만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선악의 판단을 하며 어른 흉내를 내며 삽니다. 누가 큰 자인지를 겨루고, 그 성취와 업적의 정도에 따라 보상도 기대하며 삽니다. 그 어른들에게서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게 요한묵시록 12장의 이야기입니다.

어른흉내 내는 교회가 어린 아기를 낳는데 그 아기가 잉태되는 순간 어른흉내 내는 어미가 아기에게 먹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에 완전한 어린 아기, 하느님 아버지께만 온전히 순종하는 천국의 어린 아기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기 예수를 낳고 아기 예수가 교회를 낳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현실을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131:1-3) 1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쫒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2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 3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

 

이렇게 젖 뗀 아기가 아버지만을 의지하여 사는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이 막 젖을 뗀 아기가 되어 아버지의 세계관과 아버지의 가치관으로 선악을 구별하며, 아버지의 은혜로만 존재하고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아니 나중에는 젖 뗀 아기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 속의 아기가 되어 어머니의 생명선이 닿지 않으면 도저히 존재가 불가능한 완전한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크냐를 재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오직 은혜라는 하늘의 사고방식은 절대 화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샌드위치 빵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단순히 이혼은 하면 안 된다는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란 건 미루어 짐작이 가시지요?

계속해서 마태복음 18장의 내러티브를 보면 그 어린아이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작은()자를 실족케 하는 자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태18:6-10) 6 '그러나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7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다. 이 세상에 죄악의 유혹은 있게 마련이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8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 가는 편이 더 낫다. 9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10 '너희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여기에서 작은 자(小者)는 당연히 앞서 언급이 된 어린아이입니다. 따라서 그 작은 자는 예수님을 포함한 예수님의 동생 어린아이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의 연약한 모습으로,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작은 자니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존재양식과 삶의 방식은 이 세상 나라의 존재양식과 삶의 원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의 존재양식은 각 개체가 완전히 비워지고 약해지는 가운데 하느님의 생명력이 가득 채워짐으로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소자를 그저 약한 작은 자로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 없는 자들의 세계관이니까요. 한마디로 그런 자는 절대 천국에 합당한 자가 아니라는 말인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작은 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고 하지요? 그건 주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의 수호천사 개념을 들어 설명을 용이하게 하시는 것인데, 히브리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각자의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을 때 거기 있던 비자가 제자들에게 베드로가 왔다고 하자 '베드로의 천사겠지라고 한 것입니다.(12:15) 그렇다고 진짜 수호천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수호천사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들어와 계시니까요.

지금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작은 자로, 어린아이로, 약자로 보인다고 해서 그걸 약함으로 못남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뵙는다는 건, 그 작은 자들이 하느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게 진짜 강함이며,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어른들의 육적인 사고방식 으로는 절대 그 천국의 존재양식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과 자신의 행위 자신의 열심과 노력을 자기의 것으로 챙깁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로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종교에 귀의를 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마다 손을 찍고 발을 찍고 눈알을 뽑는 기특한 열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건 은혜를 아는 작은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의 전형이지요. 그렇게 해서 온몸이 다 불에 던져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렇다고 그들의 죄 성이 해결이 됩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말씀은 손발을 찍을 각오를 하고 죄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작은 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작은 자로 편입이 되어, 작은 자로 사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발이 찍혀야 할 때, 바보 같고 어린아이 같은 우리 주님의 손발이 찍힌 것이고, 우리의 눈알이 뽑혀져야 할 때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의 눈이 뽑힌 것입니다.

그 무력한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하느님께서 직접 그들을 보호하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잃은 양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역시 어린아이, 작은() 자라는 단어가 계속 이어집니다.

 

(마태18:12~14) 12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13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14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작은 자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 작은 자가 목자에 의해 찾아질 때 하늘 아버지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자의 정의가 내려지지요? 작은 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길을 잃지 않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길을 잃어버린 자였는데 아버지에 의해 찾아진 자라는 은혜와 자비의 인식을 갖고 사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흔 아홉이라는 숫자나 그들이 가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아버지가 찾아 주시지 않았다면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던 자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을 소중히 보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작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잃어버렸던 양을 찾는 데에 잃어버린 양이 투입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엄밀히 말해 하느님으로부터 잃어버림을 당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과 하나였던 하느님의 아들뿐입니다. ‘잃어버림이라는 개념의 전제는 하나였음입니다. 하나였던 존재만 잃어버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이 하느님과 하나일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그 한 몸이신 당신의 아들을 고의로 잃어버리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들로부터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절한 외침을 들어내시고야 마십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흘 후에 아들을 영원 속으로 되찾아 올리십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감히 잃어버린 양, 작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양들이 이리 같은 세상으로 파송이 될 때, 그들이 목자가 없는 것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엉뚱한 가짜 목자를 쫒아 살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목자, 명예라는 목자, 관계라는 목자, 인기라는 목자, 평판이라는 목자를 쫒아 삽니다. 그들에게 진짜 목자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것을 전교라 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그 목자는 양들을 위해 어린양의 모습으로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살려내는 목자입니다. 그게 잃어버린 양을 기뻐하신다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18장의 내러티브는 이미 양쪽으로 분류가 된 형제와 가라지들을 분별해 내어야 하는 교회의 이야기로 맥을 이은 후에 여러분이 잘 아는 용서의 비유로 건너갑니다.

그 용서(容恕)의 비유에는 세 층의 계급이 나옵니다.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입니다. 그 층과 층 사이에는 관계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의 관계가 설정이 되고,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을 받은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의 관계가 설정이 됩니다.

먼저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의 관계는 용서와 은혜의 영역 안에서 성립이 됩니다. 임금은 용서하는 분이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용서 받는 자입니다. 그렇게 두 층 사이에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우산 아래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관계가 등장하는데 그 관계에 임금이 개입을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탕감 받은 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까지 참견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한 것입니다. 임금은 자기가 빚을 탕감해준 어떤 존재가 독자적인 질서체계를 따로 챙겨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임금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은 존재는 그 임금과의 용서의 관계 속에서 다른 관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내가 용서를 받았으므로 다른 이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식의 그런 용서의 촉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기가 20만 년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입니다. 그건 갚을 수없는 무한의 빚인 죽음의 빚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는 간절함과, 가족들 모두를 동원하는 열심 등으로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채권자가 빚을 없애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임금은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소액입니다. 그런데 그 빚을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그 소액 채무자를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그는 지금 임금과 자신과의 용서의 관계가 자신의 삶을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독자적인 질서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선악구조라는 것입니다. 임금과의 용서의 관계가 그의 다른 관계와 전혀 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도저히 해결할 수없는 죽음(死亡)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힘을 합쳐 그 빚을 갚아 준 것도 아니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여 탕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늘 임금께서 거저 그리고 완전히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온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서 여전한 옛 사람의 잔재가 보입니다. 그 때 자신의 멱살을 부여잡고 네가 이러고도 구원받은 신자냐?’하고 스스로에게 체벌을 가합니다. 절망이 되고, 우울해 지고, 낙담이 되지요? 이 용서의 비유는 바로 하느님 은혜의 온전 성을 설명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용서의 관계를 벗어나 네 독자적인 율법체계를 갖고 다른 관계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를 듣고 내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날 감옥에 넣으실 지도 몰라라고 초조해 하는 것이 감옥에 들어갈 일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반대지요?

우리가 주님의 기도문을 공부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그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율법의 기각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지요? 은혜의 시대가 열려 율법대로 처벌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된 것처럼 우리의 죄가 그렇게 은혜로 용서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용서의 비유는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취소하겠다는 협박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의 용서가 너희들 안으로 뚫고 들어가 버렸으므로 율법에서 자유 하라는 응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그 용서의 비유가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베드로가 스승님 우리가 용서를 몇 번이나 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만 하면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때 주님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491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라 했지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것은 7X7X10 즉 완전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7X7 하면 생각나는 게 있으시지요? 바로 희년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채무가 변제가 되고 노예가 풀려나 안식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 희년. 그 희년의 완성자로 예수께서 오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너는 용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를 물으심으로 해서 넌 누구를 사랑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받아야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장면과 똑같은 그림인 것입니다.

진짜 용서, 영원한 용서는 하느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나의 모든 죄가 하느님에 의해 완전하게 용서가 되었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들이 100 데나리온 짜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빚을 그 어떤 조건도 자격도 묻지 않고 거저 탕감을 받은 은혜의 사람들은 그 임금과의 용서의 관계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 하고, 그러한 자기부인 아래에서 진짜 용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만 비로소 죽음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존재라는 것이 명료하게 인식이 되면 될수록,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백 데나리온 짜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입니다. 나와 세상이 부인이 되고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가 오롯하게 가슴에 새겨질 때 하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 끝에 붙어 있는 비유가 오늘 본문의 이혼에 관한 충고와 고자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관성 있는 십자가와 은혜의 이야기를 이어가시던 주님께서 갑자기 이혼하면 안 된다로 이야기를 바꾸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양쪽을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감싸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혼 문제를 거론합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면 이혼을 해도 괜찮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 하냐는 것입니다. 고대시대에는 남성 우월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인구 계수에도 끼지 못할 만큼 천대를 받았습니다. 히브리 남자들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이혼 규례를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신명24:1-4) 1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지만, 2 그 여자가 나가 지내다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는데, 3 둘째 남편도 그 여자를 싫어하게 되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집에서 쫓아 냈다든가, 둘째 남편이 죽었다든가 할 경우에 4 그 여자를 내쫓은 처음 남편이 이렇게 몸을 더럽힌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는 없다. 이런 짓은 야훼께서 역겨워 하시는 짓이다. 이런 짓을 하여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시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 죄를 입혀서는 안된다.

 

히브리 남자들은 1절의 수치 되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여, 여자가 밥을 잘 못해도 이혼을 했고, 이웃집 아내보다 못 생겨도 이혼을 했고, 바가지를 긁어도 이혼을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이혼 규례를 해석한 것은, 그들의 율법관 속에서 가정은 거룩하고 잡음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 때문에 남편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는 가정에 불화가 생기게 됨으로 그 불화의 싹을 아예 잘라 버리는 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올바른 처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혼을 남발한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그러나 그러한 이혼의 남발은 거룩을 수호하겠다는 기특한 발상이라기보다는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정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함부로 아내를 내어 쫓지 말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혼 증서를 써주고 헤어지라는 항목이 기입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그건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혼을 하려거든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이혼을 하라는 것은 너무나 함부로 이혼 하는 자들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것이지 이혼을 합법적으로 승인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힐렐 학파가 도에 지나치도록 이혼의 남발을 옹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음행한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은 간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한 몸이 둘로 갈라지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걸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둘로 갈라지면 죽으니까요.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성도에게 있어서 이혼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을 피력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절대 잊지 마세요. 지금 이 비유의 내러티브는 어린아이, 작은 자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용서의 은혜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질문을 받으시고 어디서부터 설명을 하시냐면 창세기부터 시작을 하십니다. 본문 4절 이하를 보세요.

 

(마태19:4~6) 4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5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하느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는데 그 둘을 한 몸으로 엮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남자라는 성과 여자라는 성 이외의 한 몸이라는 또 다른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천국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구별이 무용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무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는 그 둘을 한 몸으로 선언해 버리십니다. 거기에는 아주 심오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1:26~27) 26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26절에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형상(形狀, 모습)이라고 당신을 복수로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27절에 보면 자기 형상이라고 단수로 표현을 하시지요? 그건 바로 삼위 하느님의 연합의 관계로 관계 되어지는 어떤 존재를 창조하실 것임을 암시 하시는 것입니다. 복수이면서 단수가 되는 어떤 존재.

그게 남자와 여자, 부부 아닌가?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 각기 다른 두개 성이 한 몸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쉬운 말로 연합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연합이라는 것은 신과 신, 그리고 신과 피조물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절대 연합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신과 인간이 수직적으로 연합이 될 때 그 신을 머리로 하여 인간들이 수평적으로 연합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도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은 예수라는 하느님의 아들이 남자가 되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 온 하느님의 손에 의해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어 여자, 즉 하느님의 백성들을 창조해 내어 한 몸으로 연합이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2:21~24) 21 그래서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22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시자 23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24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성경에서 잠은 항상 죽음을 메타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죽고 옆구리가 뚫리고 갈비뼈가 적출이 됩니다. 거기에서 여자가 탄생이 되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는 남자와 여자가 아닌 제 3의 성의 존재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도 천국의 백성들을 표현할 때 아들과 딸들이라는 구별된 성별을 기록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페1:4-5)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몸이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그 분과 연합하여 구원받게 되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용될 수 있는 용어가 아닌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하느님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로 하느님과 인간의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하느님과 연합을 깨고 세상의 다른 힘들과 연합을 도모했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됨을 추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타락이라 합니다. 그러니 타락이란 도덕적 윤리적인 흠이라기보다는 자기 노동에 의해서 축적된 그 힘만을 의존해서 살아야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느님 백성들의 음행이라 합니다. 간음이라 합니다.

그 때에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들이 갈라질 수밖에 없지요? 그게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들의 이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아 간 인간의 가능성의 총합을 율법이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신부들이 하느님과 이혼하고 율법과 재혼을 한 것입니다.

신명기는 그것을 간음이라 합니다. 그건 이혼당해 마땅한 사안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신랑이 직접 내려오셔서 자기 아내의 후부를 죽여 버리십니다. 그게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7:1-3)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법률에 정통한 사람들이니 말씀드리겠는데, 법률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2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자기 남편에게 법적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3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법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간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를 붙들고 있던 율법이라는 남편이 죽고 우리는 다른 남자, 즉 우리의 원래 신랑인 예수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는 연합, 한 몸 되기를 모형 화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세례에 의해 성도의 삶에 하느님의 짝지어 주심이 온전히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현실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그들을 가정으로 묶으심으로 해서 그 안에서 설명을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몸이라는 것이 자기를 비워 신랑의 능력과 성품과 됨됨이를 충만히 받아야 하는 절대 순종과 절대 의존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인간이 타락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의존하여 그 분의 지체로 살던 자들이 자신들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 몸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려는 분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말은 애틋하게 그리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그렇게 조종하려 할 때 남자도 여자를 다스리려 합니다.

그 때 그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도출되는 것은 분리이지 연합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부부관계는 왜 우리는 이렇게 결혼을 하고도 한 몸이 아닌 둘로 살 수밖에 없는가?’를 배우고 예수와의 결혼을 추구하는 교훈의 장으로 주어진 것이지 애쓰고 힘써서 깨지지 않도록 지켜내도록 주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에페5:31~32) 31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2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이렇게 결혼 관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어떻게 혼인을 하여 한 몸이 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성도는 결혼이라는 한 몸 되기 프로젝트를 통과하면서 결혼을 통해서도 결코 한 몸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들을 폭로 당하게 됩니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두 몸일 수밖에 없는 타락한 인간의 실존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진짜 우리의 신랑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혼이라는 것은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도 결코 하나 된 몸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실상은 갈라져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각 당하는 한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부가 다 이혼한 상태입니다. 절대 한 몸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이혼한 사람들 보면서 혀 차지 마세요.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나 됨을 지키고 있는데 저 사람은 인내심이 없어서 둘로 갈라졌다는 식의 비난을 멈추시란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다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고멜과 같은 우리를 당신의 열심으로 찾아오셔서 결국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 은 삼십, 예수 그리스도로 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절대 갈라 설 수 없는, 제대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게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하고 안하고, 이혼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이나 이혼을 통하여 인간의 타락한 현실과 하느님의 한 몸 만들기 프로젝트인 구속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전7:24-28) 24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각각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 가십시오. 25 미혼 남녀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한 바가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26 지금 우리가 겪고 익는 재난을 생각한다면 남자는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7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와 헤어지려고 하지 말고 아내가 없는 사람은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남자가 결혼한다고 해서 죄를 짓는다거나 처녀가 결혼한다고 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결혼한 사람들은 세상 고통에 시달릴 터이므로 여러분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을 하고 안하고, 이혼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냥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과 하느님나라, 은혜와 자비를 잘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잘난 척을 한답시고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하고 너스레를 떱니다.

그 말은 정말 결혼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분명 간음이라는 죄를 짓게 될 텐데,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네요?’라는 말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무슨 재미로 결혼을 하냐?’는 인간의 정욕의 표출이기도 한 것입니다. 둘다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추구를 버리지 못한 죄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정말 너희가 그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면서 고자(鼓子) 이야기를 하십니다. 고자, 즉 성기능을 상실하여 결혼을 못하게 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첫째는 날 때부터 고자인 사람이고, 둘째는 사람이 만들어서 된 고자이고, 셋째는 천국을 위하여 된 고자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불가항력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결혼이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걸 율법주의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겠다고 스스로의 팔 다리를 찍는 그런 형국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그도 역시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정욕까지 해결할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된 사람, 즉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하느님께서 고자로 만들어 버리시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 예수님의 이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완성을 위해 당신 백성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자는 결혼에서 제외된 인물입니다. 바로 결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모든 연약한 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고전7:29-32) 29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30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31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2 나는 여러분이 근심 걱정을 모르고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하느님은 결혼이라는 것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권고하십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배우는 장이어야지 행복을 추구하는 장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천국을 위해 고자가 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혼을 하여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이 자기 행복의 추구의 현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배우는 현장이 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이 왜 하느님의 은혜로만 어린양과 혼인을 하게 되는 존재인지를 잘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가정을 통하여 자기들은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평생 가정 속에서 이혼한 자로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이혼하겠다. 이런 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다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필요에 의해 당신 백성들의 고자 됨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고자 되었다고 자랑도 하지 말고 고자 된 사람, 연약한 사람, 이혼한 사람, 고아, 과부 이런 사람들을 인간의 선악구조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차압당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선악구조에 의해 스스로를 판단하여 비관하지도 마시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여 비판하지도 마세요.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에 의해 주도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임을 잊지 마시고 하느님의 진짜 신부들로서 매일같이 분열과 갈라짐의 주역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폭로당하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더욱 붙드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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