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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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보기 / 포장마차 참새구이보다 못한 나 (루가1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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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7-04 ㅣ No.148063

 

 

(공동번역성서) 2021. 7. 4. 성경바로보기

 

 포장마차 참새구이보다 못한 나

(루가14,7-14)

7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 가서 앉아야 할 것이다. 10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14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

 

최근 몇 개월간 저의 마음을 짓눌러 온 것이 이제 더 이상 그런 가증스러운 무대에 서고 싶지 않다라는 거였어요.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고 그 나라는 우상의 위상을 위해서 설교까지도 이용해 먹는 그런 저의 실체를 제가 점점 더 깊이 알아가고 있는 마당에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저의 실체가 점점 더 하느님 앞에 저에게 드러나고 있는 이 마당에 설교자라는 타이틀이 제 어깨에 얹어 있는게 너무 버겁고 부담스럽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하느님의 은혜를 그렇게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 삶으로 체험하고 있거든요. 이제 정말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이 너무나 절실하게 험되어져서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 자신에게 자기 속의 더러운 오물들을 계속해서 들키고 있는 사람이 회중들에게 바로 그 죄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당신들은 죄인입니다'하고 말을 하는게 쉬울 것 같으십니까? 너무 아파요. 고통스럽습니다. 내 안의 것을 다 들켜버려서 아프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폭로하는 것이 아픕니다.

? 설교의 일차 수신자는 바로 저이기 때문에 제가 소리지르는 대상이 바로 저거든요. 그러면 여러분은 설교를 들으면서 '바로 저 사람의 상태가 저렇구나'라고 알아버릴 거란 말입니다. 그게 아픕니다. 왜 저는 여전히 저라는 인간을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게 자존심 상하거든요. 그런데 설교를 해야 되기 때문에 해야 돼요. 그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는 못 해줄망정 우리는 계속해서 죽어야 되고 죽어 갈 것이다라고 그런 독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게 아파요. ?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지 않아도 삶을 살아가는게 아파 죽겠는데 그들의 상처에 계속 소금을 뿌리는 역할을 하는 제가 너무 버겁습니다. 부담스러워요.

하기 싫습니다. 뭐 대단한 명예가 있고 뭐 대단한 돈벌이가 된다고 계속 이 일을 해야 되는가 사명감은 어디 갔냐라고 물어보실지 모르겠지만 그런거 버린지 오래 됐습니다. 그런거 저에게 없어요. 무슨 사명감이 있습니까? 저 같은 인간에게... 없어요. 자기 자신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이가 무슨 사명감이 있습니까!

왜 사도바울로가 말년이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웠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왜 모든 이들이 다 그의 곁을 떠나갔는지...

디모테오후서 4장을 읽으면서 예전에는 굉장히 의아해 했는데 거기서 그러잖아요. '디모테오야 다 떠나갔다. 나 이제 곧 죽을 것 같은데 다 떠나갔다. 이 감옥이 너무 춥구나. 올 때 잠바 좀 갖다 줄래'

이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유언 같은 거였습니다. 설교자의 마지막이 이래야 된다면 저는 자신 없어요.

그리고 왜 그가 그의 사역 말년에까지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그 명예롭지 못한 타이틀을 스스로 붙들고 갔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좀 건져다오'라고 처절하게 외쳤던 그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하느님에게 들려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천국에를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입니다. 3층천의 예수님을 다마스코 길 위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고,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날 좀 건져다오'

죽음의 몸이 뭐예요? 내가 죽인 시체가 나에게 꽁꽁 묶여져 있는데... 이게 지금 썩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죽음(死亡)의 몸이에요. 바울로가, 그런 위대한 사도 바울로가 말년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인식했다라는 것입니다.

'나를 좀 여기서 누가 건져줘 지긋지긋해서 못 살겠다 이 몸뚱어리 속에서' 게다가 온 세상이 그를 버렸습니다. '다 떠났다 다 떠났다 디모테오야 잠바 좀 갖다 다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되심을 드러내는 도구요, 그릇일 뿐임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았던 거 같아요. 왜 우리는 예수라는 분의 전적인 도움만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드러내는 도구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예수를 도와서 하느님의 일을 성취하고 그 예수를 닮아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했다는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러한 자괴감 속에서도 여전히 나라는 존재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참으로 집요하죠. 더럽습니다. 집요한 죄성이죠. 그렇게 저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라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낱낱이 까발려졌어요.

저는 그런 제가 저에게 인식이 될 때마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이걸 목을 매달아서 죽여버리고 싶어요. 벌을 주고 싶어요. 삶이 힘들어서 공부하는게 버거워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책보는게 지겨워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더러워서 추악함이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지경까지 인식이 되어지는 그 상황까지 왔기 때문에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한 자들이라고 선언해 버려요.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은 가장 높은 상좌의 자리를 목표지점으로 해서 일로 매진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예수를 믿는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본문 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그 바리새인들의 두령의 집에 초청을 받아 들어가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잘 나와요.

여기서 바리새인들... 나쁜 놈들 이렇게 보지 말고, 그 자리에 나를 한번 넣어 보란 말이에요. ! 지금 하느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 앞에서 폭로되는지 한번 보란 말입니다. 이건 오늘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예수를 잘 믿는다는 교회에게...

청함을 받은 사람들에 상좌 택함을 보고 상좌라는 것은 높은 자리라는 뜻이에요.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 가서 앉아야 할 것이다.’

초대 받은 사람들이 상좌 즉 주인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으려고 지속적으로 경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차지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엑셀레권토라는 단어는 선택하다는 뜻의 에클레고의 미완료 과거형이에요.

헬라어의 미완료는 과거의 계속 되어졌던 일을 뜻하는 거예요. 계속 되어졌던 일.

초청을 받은 바리새인들이 쉬지 않고 상좌다툼을 벌이고 있었단 말이에요. 서로 높은 자리에 앉을 려고 다툼을 하고 있는걸 예수님이 지켜보고 계셨다는 거예요. 거기서 보시고라고 번역이 된 에페코는 현재 분사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의 윗자리다툼 경쟁을 계속해서 지켜보시면서 이 교훈의 비유를 던지신 거예요.

그때 당시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착한 일을 제일 많이 한 사람들, 구제에 가장 힘을 썼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 어떤 사건이 터지자 그 사건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폭로가 되는지 보란 말입니다.

이게 사실은 그들의 정체였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식사 자리 배치는 U자형 테이블 중앙에 주인이 앉고 그 주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자리부터 상좌였어요. 저 끝이 말석입니다. 그 자리에 초청을 받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유대인 중에서는 다들 한자리 하던 사람들이잖아요.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열심히 싸웠다는 거예요.

그건 그들의 율법 지킴의 그 행위가 종교적인 그 열심이 결국 윗자리에 앉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라는 것을 폭로당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렇게 종교행위를 가지고도 자기의 영광과 인기와 만족을 챙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보라는 거예요. 지금 목숨 걸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의 행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으로 가면 예수님께서 보다 자세하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실체를 폭로해 버리세요.

 

(마태23,2-12) 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 6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7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란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 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9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율법 지킴의 행위들이 사실은 윗자리(上座)에 앉아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한 자아 성취와 자아 확장의 도구였다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무엇을 가지고도 자기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그러한 율법 지킴의 행위를.... 높아지기라고 규정을 해버리고 그렇게 자기 높아지기에 빠져 있는 자들은 반드시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저주를 해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낮아진다라는 것은 끝이 없는 동굴 무저갱으로의 낮아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옥 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율법 지키기나 종교행위들 마저도 자아 숭배의 도구로 쓰는 악당들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낮아지는 삶을 사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낮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동안 애써 선행도 하고, 선교도 가고,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고 했잖아요. 구제도 하고 낮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 그렇게 살았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런 삶을 똑같은 삶을 살았었거든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들의 삶을 높아지기라고 이야기를 해버리신 것입니다.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보자 말이에요.

우리가 그런 일들을 하면서 전혀 나에게 점수를 안 줬나요? 그런 일을 하는 내가 요만큼이라도 기특히자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건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똑같은 행위이고 그건 높아지기의 행위라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그 일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낮아지기의 삶을 살수 있냐고요. 그것마저도 우리는 높아지기의 삶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낮아지기의 삶을 살 수 있냐고요.

 

(루가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4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 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높아지기의 삶과 낮아지기의 삶의 표본이 등장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진짜 낮아지기의 삶을 사는 이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세리입니다.` 세리가 뭘 했어요? 뭘 했는데 주님은 그가 낮아지기에 삶을 사는 사람이다라고 평가를 해버리시죠.

감히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어요. ? 그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본인이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바라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느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는 이런 자입니다. 그 말 한마디 한 것 밖에 없어요. 자신의 죄된 실체를 올바로 자각을 하고 하느님의 자비(궁휼)에 자기를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의 절정이라는 거예요.

뭐 대단한 종교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대단하게 착한 일을 했다는 기록도 없어요. 오히려 그건 바리새인이 했어요. 너무 착하게 살았어... 욕심부리지도 않았고, 불의, 불법, 간음 아무것도 안 했어요.

거기다가 종교행위는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일 년에 한 번씩 단식하라고 율법을 적어 놨더니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네. 거기다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했대요. 이렇게 하는 사람 있어요? 여기서 그런데 이 착한 사람을 왜 높아지기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그러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지도 못하고 저는 이런 세리에 불과합니다. 하느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이 나쁜 놈을 낮아지기의 삶의 표본으로 제시하냐 말이에요. 하느님은 성도를 이 땅에 바로 그거 배우고 오라고 내려보내는 거예요. 하느님 일 도와달라고 보내신게 아니라... 바로 이거 알고 오라고 내려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의 목표지점이 바리새인의 삶과 가깝습니까, 아니면 세리의 삶과 가깝습니까?

탐욕, 불의, 간음, 불법, 행하지 말고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단식도 열심히 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자! 이게 오늘날 교회의 모토 아닙니까? 그런데 큰일 났어요. 예수님께서 그게 높아지기의 삶이래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 속으로 '아이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한 일이 아니니까 그러지, 진심에서 우러나서 그런거 탐욕 불의 간음 이런 거 안 하고 십일조 열심히 하고 단식 잘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셔' 그래요?

여러분의 진심이 얼마만큼 지속이 되던가요? 그놈의 진심이 도대체 얼마 만큼에 지속력을 갖고 있어요? 지속되지 않는 걸 진심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뭐가 진심이냐고요. 어떤게 진심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는 다 높아지려고 쑈한 것입니다! 내 만족, 내 자랑, 내 인기 챙기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연극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그걸 알고 오라고 우리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하느님 섬김의 행위를 손톱만큼도 행할 수 없는 그런 자들이에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윗자리 챙기기에만 집착하는 자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함을 합니까? 우리는 결국 나의 영광과 나의 가치만을 챙겨가져요.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하신다 그래요.

 

(마태23,13-16)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 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 가게 한다.' (14절없음)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16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고 하니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누구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이예요. 위선이 뭐예요? 나의 유익을 위해 열심 있는 종교행위와 착한 행위하는걸 위선이라 그래요. 성경이.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를 위선자라고 하느님이 아예 이름을 붙여 버려요.

그렇게 열심히 하느님을 섬겼고 종교행위를 했고 착한 일을 했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고 이름을 붙여 버린다니깐요. 그리고 니네는 다 죽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옥 간다. 그리고 너희들이 지금 제자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그 제자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거야.

제가 그랬단 말입니다. 제가요. 되지도 않는걸 행한다고 죽어라고 이를 악물면서 하느님 원망하면서 하면서... 그걸 앉아있는 회중들에게 억지로 강요해 왔다니깐요. 계속해서 왜 못하냐고 욕까지 하면서... 주님은 주님의 공생애 내내 반복해서 자기를 높이려 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를 하세요. 그게 바로 죄의 본질이고 핵심이거든요. 죄는 다른거 없어요.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선악 구조로 정의해 놓은 그 죄. 그게 죄가 아니라... 그건 사건화된 죄죠.

총체적 죄가 있다고요. 그게 뭔지 아세요? 없음의 자리에 있어야 할 피조물이 있음의 흉내! 신의 흉내를 내는걸 죄라고 하잖아요. 그게 인간의 가치 챙기기요. 인본주의란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거기서 빠져나올 인간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간디나 슈바이처도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마르12,38-39) 38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39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루가20,46) 46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길다안 예복을 걸치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을 즐기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찾고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계속해서 반복하여 이런 말씀을 하세요. 이것은 인간의 자기 높이기와 자기 자리 굳히기의 행위는 무저갱으로 낮아지는 행위임을 경고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높이기의 삶을 사는 모델이 항상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에요.

그때에 가장 존경을 받던 사람들이 꼭 위선자의 모델로 등장한다 말입니다. 그들은 외양으로 볼 때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하던 사람들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할 만큼 도덕적 윤리적 양심적 삶을 훌륭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라 그랬어요. 모든 바리새인이 그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니깐요.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의로움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새인의 의로움을 발톱의 때만큼도 못 쫓아간다니깐요.

그런데도 바리새인은 욕은 하면서 왜 그들이 욕을 먹어야 하는지를 몰라요. 내가 바로 그 바리새인인 걸 우리가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낮아지기의 삶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의 노력으로 낮아지기의 삶을 한번 살아서 하느님께 공로로 업적으로 드려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어서 '그들이 바로 마귀다'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잔치 자리의 윗자리(上座) 배정의 권한은 잔칫집 주인이 갖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거기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아무리 윗자리를 택하려고 싸우고 다투고 지랄을 떨어도 나중에 자리는 잔칫집 주인이 다 정해줘 버려요. 근데 오늘날 교회는 안에서 그 싸움하고 있다니깐요. '내가 잘난 사람이야 내가 멋진 사람이야 성경 지식을 가지고도 그 짓들을 하고 앉아있어'

 

(루가14,8-10)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 가서 앉아야 할 것이다. 10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이거 읽고 또 '아이 그래 늘 낮아지고 말석에 앉자. 그러면 나를 높여 준다고 하시니까 말석에 앉자' 그러면 안 돼요.

그게 높아지기란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 말입니까? 계속 들어보세요

아무리 자기들 마음대로 윗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도 윗자리에 앉을 사람은 이미 주인의 마음속에 결정이 되어 있어요.

이걸 선택. 프리데스티네이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걸 하느님 나라의 완료성. 그 이야기를 지금 바리새인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의 모든 종교행위와 율법 지킴의 행위는 타락한 인간들의 자기 우상화 작업에 불과한 것이며,

아무리 인간들의 그러한 자기들의 행위로 윗자리 다툼을 벌인다 할지라도 하느님 나라의 윗자리는 이미 결정이 되고 완료가 되어 있는 것이므로 인간들의 자기 높아지기와 상좌 자리 쟁탈전은 하늘나라 윗자리 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라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주님이 계속 지켜보셨다그랬죠. 현재 진행형. '싸워봐 그래 열심히 싸워봐' 아이고 지금은 쟤가 이겼네 아이고 쟤가 지금 야 돌진해 들어온다 태클 들어온다 조심해라 보고 계셔요. 보고 계시는데 결국 나중에는 다 내려와 '이 자리 너! 이 자리 너!' 하느님이 주인이 정해주신다 말입니다.

그들의 이 세상에서의 윗자리 자리 쟁탈전은 윗자리 자리 배정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친다는걸 보여주는 거예요. 성도들아 이 세상의 실체. 아니 너희의 삶의 실체를 올바로 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의 삶도 실은 자기 높아지기와 윗자리다툼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느냐'는 것을 지적하시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이 세상의 실체가..... 그러한 좀비들의 세상임을 올바로 직시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만을 붙들라는 거예요. "하느님 저는 우러러 하늘도 바라볼 수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기도도 할 수 없어요. 하느님 자비를 조금만 베풀어 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이게 바로 예수님 옆에 달렸던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고백했던 그 강도의 고백과 똑같은 거예요. 그 세리의 고백과 강도의 고백이 똑같은 거예요. 그게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가 궁극에 해야 할 고백이란 말입니다. '난 이렇게 살았어요. 이렇게 착하게 살았어요. 쟤 보다는 낫죠' 고 사람이 낮아지는 거예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나쁜 놈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진짜예요. 진심으로 그래요. 그걸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들켜 버리는 거라니깐요. 성령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거 하신다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로움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랬지 언제 여러분을 예수처럼 바꾼다 그랬습니까? 우리는 예수처럼 바뀌는게 아니라 예수의 의로움을 덧입고 예수로 여겨지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갚을 거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11절에서 이렇게 이 비유의 핵심을 짚어 주세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치 우리를 보고 낮아지기를 시도해보라고 요구하시는 듯이 보이죠.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시도해 봤어요. 그런데 여러분 낮아지셨어요? 결국 우리는 그 낮아짐의 시도조차 내 만족으로 챙겨 갖잖아요.

'야 난 이렇게 잘 참고 있구나. 내 속이 썩어도 난 이렇게 잘 견뎌내고 있구나. 내 안에 이런 용서가 있다니 내 안에서 이런 사랑이 나온다니' 결국 잘난 척을 챙기는 거죠. 그게 낮아짐이에요?. 주님이 지금 그런거 하라고 하는거 아니잖아요.

그렇게 우리들의 낮아지기의 노력은 결국 자기 높아지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걸 감안할 때, 주님이 그러한 말씀을 하고 계신거는 아닌거 같아요.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서 성령을 받게 되는 자들은 낮아지는 삶으로 끌려가게 되고, '아 나는 아니구나! 하늘을 우러러 기도할 수조차 없는 자구나'라는 그 낮아지는 자리로 끌려 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은 끝까지 자기만을 높이는 자로 '이 정도면 괜찮죠'라고 자기만을 높이는 자로 살게 된다는 말씀이에요.

성도는 성령을 받고 자신들의 실체를 끊임없이 폭로 당하게 되고 좀비로 가득 찬 세상의 실체를 올바로 볼 수 있게 돼요. 그때 눈이 뜨였다고 하는 거예요. '아 이게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 좀비들의 세상이었구나! 언제든지 사회법 도덕 윤리만 없으면 내 목에 이를 꼽고 피를 뽑아 먹을 수 있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이 상이구나!' 영의 눈으로 그걸 보는 거라니깐요.

그걸 자각(自覺)하는 이들이 어떤 희망이 생기겠습니까? 여기서 떠나야지 그걸 희망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그럼에도 자신에 삶이 그런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삶이 좀비들에 삶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 나라는 인간은 하느님에 은혜가 없으면 단 한시도 살아있는 존재로 살 수가 없는 존재구나'

어떻게 그걸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내 삶이 좀비들에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나만을 생각하는가....

그러면서 하늘을 우러러볼 면목도 없이 하느님께 '하느님의 자비(慈悲)가 나에게 부스러기라도 떨어지기로 원합니다'의 자리로 내려가는 걸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진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하느님이 그렇게 끌고 내려가시는 거라니깐요.

요한복음 마지막 장.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내가)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밑에 이어지는 구절들 속에서 더욱 분명해져요.

본문 12절부터 기술이 되고 있는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그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어요. 한번 보세요.

 

(루가14,12-14) 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14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

 

요걸 읽고 그대로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요. 내가 뭔가를 베풀고 그걸 보답을 받으면 내 상급으로 하나도 안쌓이니까 나는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만 도와줄 거야. ? 복받을 라고. 상 받을라고. 이게 자기 높이기란 말입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에 초청된 자들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잔치에 청함을 받게 되는 이들은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이어야 한다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성도는 바로 이 세상에서 '나는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는 자구나'를 알고 가는 거예요. 그자들이 초청된다는 거예요. 잔치에.

여러분 오늘 본문 바로 밑으로 이어지는 비유를 한번 보겠습니다. 앞뒤로 이어지는 내용들을 한 내러티브 속에서 읽어 보면 이 내용이 뭔지 정확히 이해가 가요. 잘 보세요.

 

(루가14,16-23) 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을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 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21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 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며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하느님의 은혜는 '도대체 하느님 나라가 뭐야 구원이 뭐야' 멍하니 있는 자들에게 강권하여 그들을 붙들어 오는 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예요. 은혜라는 단어 자체가 갚을 수 없는 것 이라는 전제가 들어있어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갚을 수 없는 것을 공짜로 주는 걸 은혜라 그래요.

이 비유는 하늘의 왕이신 하느님의 아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관한 비유에요. 이게 요한묵시록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이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볼일을 핑계로 잔칫집을 향하지 않아요.

쉬운 말로 자기 볼일이 있는 사람은 그 볼일 때문에 남의 잔치에 안 가는 거예요. 거기 가서 시간보내는게 낭비거든요.

나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남을 축하해 줘야 돼?

성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사는 거라니깐요. 그게 찬양인 거예요.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프레이즈 찬양.

그런데 자기를 위해 사는 이들은 남의 잔치, 예수의 잔치에 가서 찬양할 마음이 요만큼도 없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이 지금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잖아. 그런데 나를 섬긴다고 지금 쇼하고 있지 않니' 이거 계속해서 폭로시키는 거예요. 쉬운 말로 자기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그 볼일 때문에 절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찬양하거나 챙겨주는 곳에 가지 않아요.

그게 좀비들의 세상입니다.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일이 너무 바빠서 남의 잔치에 축하하러 가는 일이 귀찮은 거예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과 종교행위와 착한 일에 대가들 아니었습니까.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런 율법 지킴이나 선한 행위들이 전부 자기 일상 챙기기의 일환이었음을 또 한 번 폭로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너희들의 일상. 바로 너 챙기기였잖아!

그러니까 니가 하느님의 잔치에 초청받았는데 안가는거 아니야!

그 말은 뭐냐면요. 자기를 초청한 주인에게 갚을 거리를 마련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그들이 율법 지키기와 종교행위와 착한 일 등으로 하느님 앞에 자기를 잔치에 초청한 분에게 뭔가 갚을 거리를 마련하는 자들인데,

그들은 사실은 이 주인에 잔치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연결하여 그 내러티브 속에서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의 개혁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느님 앞에 갚을 거리를 준비한다니깐요. 그래놓고는 조금도 유치한 놈들은 이 땅에서 그걸 또 복으로 받겠대는 거예요. 무슨 교회가 예수를 믿습니까? 나만 믿어요. 내 것만 위해요.

21절을 보면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불러 모으시는데 그건 고대시대 당시에 부정하고 무력하고 불가능한 자들의 대표들이었어요.

그러한 자들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강권적으로 임하여 그러한 갚을 거리가 없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강권적으로 임하여 잔치로 불러드리는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래야 그들이 하느님의 말을 들어요. ? '나는 티끌이고 내가 한게 아무것도 없고, 아니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의 말만 들어야 되는구나!' 성도는 이 땅에서 그거 배우고 가는 거라니깐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는 너무 뭔가를 너무 많이 해. 그리고 돈도 너무 많아요. 그리고 다들 너무 착해. 예수가 필요 없을 정도로 다 착해.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 앞에 뭔가 갚을 거리를 챙긴다라는 거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되어 버린 아담의 행사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그러한 일들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하느님에 십자가 앞에서 보잘것없는 티끌이며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 안에 계신 예수에 의해서 예수의 행위로 진심어린 착함과 진심어린 종교행위로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까진 너무 멀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죄에 대하여, 의로움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씀을 통하여 삶을 통하여 배워야 되는 거예요.

 

(마태22,8-10)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치집은 손님으로 가득찼다.

 

보세요. 종들이 나갔어요. 첫 번째 초청을 받은 자들은 갚을 거리를 마련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일상을 챙기던 자들이었고, 그건 결국 라는 우상을 챙기는 삶이었다라는게 이제 폭로됐어요. 그게 첫 번째 초청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안와요. ? 삶의 주인공이 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잔치에 안 온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초청을 받는 이들이 있어요. 이게 로마서의 이야기거든요. 그들이 누구냐하면 이방인들이에요. 갚을 거리가 없는 자들이에요.

절룸바리, 병신, 소경, 가난한 자인데 그자들이 어떤 자들이냐 하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에 들어있는 사람들이에요. 느님 나라에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악한 자 선한 자가 다 들어있다니깐요. 선한 자만 골라가라가 아니라 말입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데리고 와라. 강권하여 데리고 와라. 내 자리 채워라.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이 땅에서의 인간들이 규정해 놓은 선한 일, 착한 일을 몇가지 더 하고 덜하고가 우리의 천국입성에 요만큼도 영향을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하느님의 말을 듣는게 선한 거고, 악한 것은 하느님의 말을 안듣는게 악한 거라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유익을 챙기기 위해 너무너무 근사해 보이는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게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면 그 착한 일이 다 죄인데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선하고 착한 것을 우리가 분별하여 판단한다 말입니까?

그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잖아요. 하느님이 그건 안된다고 에덴에서 쫓아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선약의 판별을 우리처럼 하게 됐으니까 쫓아버리자. 그런데 왜 우리가 그걸 하고 있냐 말입니다. 성도라면서...!

우리가 죄인들은 율법과 제사와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달아야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먼저 줘봤더니 그 유대인들이 율법과 제사를 갖고, 이걸 열심히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걸 주신 분을 기쁘게 해드릴려고 했다니깐요. 고걸 죄라고 하는 거예요.

'아 우리는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에 하느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살아낼 수 없기에 이 제사의 형태를 통과하여 무죄한 자격있는 어떤 분이 나의 모든 죄를 가지고 대신 드려져야 용서를 받는 율법을 다 지킨 자가 되는 거구나'를 깨달아야 되는거예요.

하느님은 성경말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하고 착한 사람되서 내 일좀 도와달라고 이 땅에 보낸거 아닙니다.

그건 천사 하나가 다 할수 있어요. 천사보다 귀한 내 백성. 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기 위해 내려보낸 거라니깐요.

그런데 전부 술 끊고 담배 끊으면 왔다야. 이게 그냥 신앙생활의 어떤 척도가 되어 버렸어. '야 넌 어떡게 예수 믿고 아직 담배도 못끊었어. 예수믿고 어떡게 아직 술도 못끊었어' 여러분 차라리 그럴거면요 술을 드세요.

그리고 '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술하나도 못끊는 쓰레기입니다. 하느님에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 자리로 내려가세요. 차라리 그 잘난거 하나 끊구서 나는 예수 잘믿는 사람이죠. 천만의 말씀.

우리 모두는 죽는 날까지 모양과 형태가 다른 집착과 중독에 다 빠져 있어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알콜중독, 마약중독만 중독입니까? 우리는 더 더러운 중독에 다 빠져 있다니깐요. 나의 위상을 높이고 나의 인기와 영광을 챙기기 위한 중독에 다 빠져있단 말입니다!

그래놓고 이 인간 세상에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이 정해놓은 그 몇가지만 죄로 규정해서 거기에 중독되면 나쁜거!

우리 인간은 그렇게 악해요. 자기를 지켜내가 위해 남들을 그렇게 지적하고 폄하하고 폄하시켜서 나의위상을 높이는 거예요.

자기는 더 더러운 중독에 빠져 있으면서... 고거 감추기 위해 몇가지 중독 집착을 지적하여 거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령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갈 수 없어요! 오히려 율법과 제사와 말씀을 가지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만족과 가치와 영광을 챙겨요. 그게 오늘날 교회의 신앙생활이라는 거예요.

 

너무 잘난 인간들이 많아요. 성당 안에... 나는 기도 많이 해요. 헌금 많이 해요. 착한 일 많이 해요. 봉사 많이 해요.

그게 여러분에게 자부심으로 와있다면 여러분은 그걸로 지옥갑니다. 바로 고 사람들이 처음 초청받은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하느님의 잔치에 절대 못들어 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의 일상에만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하느님 앞에 갚을 거리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주님은 잔치에 초청을 받는 자들은 갚을 거리가 없는 자여야 한다고 하셨어요. 개판으로 살라는게 아니에요. '나의 이런 훌륭한 행위가 하느님 나라에 조금도 도움이 안되는 구나' 그거 깨달으라는 거예요.

열심히 사세요. 착하게 사십시오. 허나 그것 때문에 천국가는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혈의 공로로 천국 가는구나' 그거 깨닫고 가라는 거예요.

그 하느님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을 사람들을 하느님은 갚을 것이 없는 강권하여 초청을 받는 자라고 규정을 해버리세요. 그리고는 그들은 주인이 주는 예복을 입고 있는 자들이다고 이야기하죠.

 

고대시대 때 잔치는 항상 주인이 잔칫집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예복을 하나씩 건네주게 되어 있어요. 주인이 만든겁니다.

아니요. 저는 제 예복 따로 갖고 왔는데요? 그 사람은 잔치에 못 들어갑니다. 항상 주인이 주는 예복만 입고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그 예복 입지 않고 자기가 만든 더 훌륭한 옷 입고 아무리 훌륭한 옷 입고 앉아있다 할지라도 그거 쫓겨나요.

주인이 그러죠. 저놈 끌어내서 포박하여 끌어내서 영원토록 이를 갈게 하여라. 그러잖아요. 지옥보내라는 뜻이에요.

기특하게 주인에게 폐끼치지 않겠다고 자기옷 갖고 왔는데 그 놈은 끌어내라 그런다니깐요. 예복 그거 안입으면 안돼요.

그런데 그 예복이 아마포라 그랬잖아요. 그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그랬죠? 가볼까요.

 

(묵시19,7-9)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 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아마포)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9 또 그 천사는 나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또 이어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이들이 누구였어요? 마태복음에서는 저는 자, 병신, 가난한 자, 소경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이 있대요. ? 그들이 깨끗한 아마포(모시) 옷을 입고 있대요. 그런데 그 아마포는 옳은 행실이래요. 이게 무슨 말이냐 말이에요. 그 아마포가 요한묵시록 7장에 가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가 나와요.

 

(묵시7,13-14)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그 하얀 아마포, 깨끗한 아마포(세마, 모시)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어린 양의 피에 씻겨진 거예요. 우리가 뭔가를 해서 만들어진 옷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에 씻겨진 거예요.

그 어린 양의 피에 의해 깨끗하게 씻겨진 자들만 천국갈 수 있다라는 이 은혜의 복음을 이해하는 걸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입는 거예요. 우리가... 그게 옳은 행실이에요.

 

요한복음 618절에 보면은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제자들이 물어요.

주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옳은 행실을 하오리이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하느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게 바로 일이다. 하느님의 일이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느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게 하느님에 일이다. 내 일이다. 라는 것은 니들 뭐 대단한 일 해서 나에게 공로로 갚을 꺼리로 가져올려고 하지 말고 니들은 처절하게 너희들의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는 큰일날뻔 했구나!’ 이제 선악과 먹지 말라 그러면 먹지 말아야지. 하느님에 말을 들어야지.

저희는 너희 말을 들으라 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 꼭 들어야지! 그리로 내러가서 오면 되는 거야. 그게 나를 믿는거야. 그게 옳은 행실이고 그게 하느님의 일이란다.

그런데 다른 행실 갖고 와서 이거 옳죠? 선하죠? 깨끗하죠? 라고 하는 놈은 그 행위로 지옥 보낸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

바로 그 다음에 니들이 한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그게 그 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행한게 없기 때문에 내 행위는 예수의 행위로 덧칠 덧입혀 진다 말입니다. 그때 내가 천국가는거 이걸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사회봉사 많이하고 사회개혁에 힘쓰고 구제에 힘쓰고 봉사에 힘쓰는 그 깨끗하고 건강한 교회들이

그 은혜를 이야기하는 이들을 짓밟습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고 예수의 자비만 붙들고 살아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고 그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이들이 오히려 그를 밟습니다.

 

요한묵시록에 두 증인 나오죠? 그 두 증인이 누구라 그랬어요? 교회. 예수님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게 교회란 말이에요. 똑같은 단어란 말입니다. 마터(martyr) 순교자에요.

그 증인이 바벨론 길가에서 죽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 두 증인이 죽는 곳을 어디라고 이야기하냐면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 그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 어딥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유대교의 중심입니다. 그러면 두 증인이 어디서 죽는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죽는다 말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열심히 섬긴다고 하는 교회에서 두 증인 진짜 하느님의 순교자들은 거기서 죽어요.

갚을 거리 열심히 챙기고 있는 그들에게 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십자가는 인본주의자들에게는 너무 가치 없는 것이거든요. 왜 자존심 상하게 우리가 그렇게 은혜만을 의지해야 되냐고 여러분은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입니다. 교회에게 죽을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관심도 없어요. 여러분을 왜 죽입니까? 교회 안에 들어온 가라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그게 첫 번째 초청받은 자들이었어요. 바리새인, 율법학자, 유대주의.

오늘날 교회는 마치 자기 제사를 지키기 위해 무죄한 동생 아벨을 때려 죽인 카인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 같아요.

열심히는 드려요. 최선을 다해서 드려요.

그런데 내 제사 챙겨주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으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무죄한 어떤 이를 죽여 버려서라도 내 제사를 챙기는 거예요. 왜 내 제사를 폄하해?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제사와 율법지킴을 지키기 위해, 아벨로 오신 예수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역사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오늘날에 아벨들이 분명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그분의 말만 듣는게 성도의 본분이다라는 것을 그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복음만을 꼭 붙들고 있는 그 자들이 하느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는 그 자들에게 맞아 죽을 것입니다.

거기가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에요. 유대주의(종교교리, 사회교리)의 중심.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되는 거예요.

나의 위상에 조금이라도 흠이 되는게 있으면 그 대상이 하느님일지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악한 심보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 속을 뒤집어 보면 항상 나라는 자아가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런 자들. 그러면서도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잘난척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그런자들. 그래서 설교를 해도 자기 자랑이고 컬럼을 써도 온통 자기 자랑 투성인 그런 자들.

아닌 것처럼 겸손으로 온유함으로 심지어 자기 비하로 근사하게 포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게 더 교활한 자아 숭배요 자기 확장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들키게 될 때 우리는 정말 스스로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져야 돼요. 그런데 하느님이 바로 그 자리를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무엇을 해도 윗자리, 자리 쟁탈전에서에 그 자기 승리를 위해서만 살아요. 높은 자리 쟁탈전에 자기 승리를 위해서만 살아요.

여러분 우리들에게 취미가 어디있습니까? 재미가 뭐예요? 다 그냥 내 꼭대기 자리챙기기의 전쟁일 뿐이에요.

월드컵 그 안에 나 집어 넣어놓고 싸우는 거예요. 내가 싸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되던 말던 조사버려서래도 내가 이기면 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인생 아닙니까?

그걸 그냥 놔두시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근사하게 쇼하고 연극하다가 영원한 지옥불에 불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냥 그런 존재에요.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꼭 붙드세요. 그 자리에서 우리 안에서 예수가 조금씩 보여질 수 있어요.

하느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근사한 자로 만들어 내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신으로 저는 자로 소경으로 가난한 자로 죽이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갚을 게 없다는걸 알거든요. 여러분의 삶에 하느님이 십자가로 그렇게 공격해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때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르8,35)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이 말씀을 열심히 전교하자거나 순교해야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의 창조는 욕망하는 인간을 죽이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리신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 내놓고 죽어라가 아니에요. 우리는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내 영광 챙기는 자들이기 때문에 죽으면서 지옥 가요. 그런거 하지 마세요. 그거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는 반드시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새롭게 살려낼 것이다 라는 거예요. 그럴 때 그런 일이 너희 삶에 일어날 때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 사역(事役)은 이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잃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목숨을 잃어야 산대요. 이 역설을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살려달라 그러세요? 죽여서 영생 주시겠다 그러는데 왜 살려달라 그러세요? 그 잔치에 관심 없다는거 아닙니까?

 

오늘 비유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욕망하는 인간의 움직임은 항상 육신 이 몸의 안식을 향해 작동해요. ? 이유는 인간의 육신이 그 옛 자아가 욕망하는 인간의 삶에 근거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에서 욕망하는 인간의 삶에 근거는 바로 나예요. 내 육신 내 자아.

아니라고 얘기하지 마세요. 제발... 아닌데요? 저는 제 자식 위해 사는데 그 자식이 나잖아요. 그 욕망하는 인간들은 전부 육(), 자기 몸을 삶의 근거로 하여 살아요.

만약 지금 여러분에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것은 현재 자신의 몸의 현실성이 그 편함의 장 속에 속해 있는 것일 뿐이에요. 세상이 저주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은 현재 자신의 몸이 육이 괴롭힘 당하는 장 속해 있기 때문인 거예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결국 욕망하는 인간에게 그 주변 환경. 이 세상의 가치는 자신의 몸이 겪는 안식 여부에 달려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사랑한다니깐요. 나를 사랑한다니깐요.

아닌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희망으로 저는 너무 기쁜대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거기 진짜 무슨 사건이 하나만 딱 떨어져 보세요. 그때도 진짜 그 마음이 지속되는가... 아니잖아요. 금방 원망 튀어나오잖아요.

몸의 안식을 향한 그 욕망하는 인간의 그 탈주선은 비거룩의 장에서만이 아니라 거룩의 장까지 파고 들어요. 그 집요한 죄성, 그러므로 욕망하는 인간에겐 거룩의 장인 교회 조차도 자신의 몸을 위한 도구로 전락이 되고 마는 거예요. 나만을 위해서 존재해 주기를 원해요. 교회가 그리고 맴버들이...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회란 욕망하는 인간의 그 몸의 안식을 도와주는 욕망의 각축장이 될 잠재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단 말입니다. ? 바로 그 욕망하는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든지 그렇게 변절될 가능성을 품고 있어요.

아니 처음부터 그래요. 가능성이 아니라.

교인들은 자신의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종교행사에 열심을 내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목자는 거룩이라는 가면을 쓰고 죽음의 굿판을 벌여 버리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다 잘될거야. 열심히 살자. 착하게 살자' 죽음의 굿판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자기 높이기라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높여 주면 그 자리에 머뭅니다. 목자가 마음 한번 잘못 먹으면요. 이 머리들이 다 나의 세력이 되기 때문에 이거 놓치기 싫어서 반드시 앉아 있는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게 되어 있어요. 그때부터 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렇게 자기의 가치나 영광을 챙겨갖는 자리로 절대 갈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의 삶을 십자가로 십자가를 향하여 간섭을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부터 성도는 자기의 뜻대로 살던 내 역사의 현장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십자가의 길로 한발 한발 내딛게 되는 거예요.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파요. 그래서 성도의 삶을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청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그대로 쫓아살게 돼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로 병신으로 저는 자로 소경으로 살다가 가셨어요.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세상에게 뚜들게 맞으시다가 결국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자작극입니다. 하느님의 계획하신 거니까.

십자가는 하느님이 계획하신 것이니까. ? 내 백성들아 배우고 오라고. 배우고 오라고! 자신들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무죄한 아벨을 때려죽이는 이 세상의 카인들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배우고 오라고. 오늘 날도 그 십자가는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곳 예루살렘에서 두 증인이 못박혔잖아요. 우리가 거기서 죽는다 말입니다. 그리고는 카인들의 실체가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카인의 실체도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냥 신앙생활은 심플해요. 그런 거에요.

내가 없음의 자리로 그냥 내려가 버리는 거예요. 그냥 하느님의 언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살다 가시면 돼요. '세상은 이런 거군요.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세상에게 이렇게 맞아 죽어야 되는 거군요' 이거 그냥 도구로 보여주고 가는 거예요.

 

하느님의 일은 뭘 돕는게 아니라 그냥 도구로 쓰여지는 거예요. 도구로 쓰여지는 자들에게 착하게 살아, 너는 겸손하게 살아, 온유하게 살아, 도구로 쓰여지는 거예요. 그건 하느님이 살게 하신 거니까. 그렇게 살았어도 내꺼 아니기 때문에 자랑 없는 거고, 도대체 하느님의 은혜는 어디까지 덮는가를 보여주고 와라! 살다 와! 그러면 가는거에요.

그냥 도구에요. 우리는.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위해 사는 자들이지.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내 소원을 성취하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서 그런 유치한 그리스도교가 나왔어요. 도대체가.

 

(골로1,15-17)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누가 누구를 위하여 창조된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창조된 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함부로 그분을 불러 내려서 심부름 시키고 그러세요? 굶으면서 심부름 시켜. 기도제단 쌓으면서 심부름 시켜.

성경 어디에 예수님을 종으로 부려먹으라고, 그런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그분이 주님이란 말입니다. 주인이 살고 오라고 하는 그 삶을 그냥 살다가 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밤낮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래요. 아니에요.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니까 나도 이거죠 나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요 이야기하고 싶은거죠. 사실은요. 아니에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수가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자각하는 사람이 가나안 여인의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개라 그랬습니다. 자녀에게 줄 것을 개에게 못준다. 그때 그 가나안 이방여인이 뭐라 그래요? '네 주님 저는 개 맞습니다. 개입니다. 그러나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그 부스러기는 먹잖아요. 그 자비, 그거 조금만 저에게 주세요.' 이게 성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전 개입니다. 이거 인정하는 거예요. 죽은 흙입니다. 티끌입니다. 그런데 이 개들이 겁대가리가 없어져갖고 주인을 막 시켜 먹어. 아니라니깐요.

우리는 그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개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만을 하느님 앞에 요구하는게 아니라, 저는 개입니다. 하느님이 소경으로, 저는 자로, 병신으로, 가난한 자로, 개로, 낮추실 때 저는 그렇게 내려갈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원래 개니깐요. 그러나 하느님 상에서 떨어지는 고 부스러기, 그 은혜, 그 자비, 저에게는 그게 필요합니다. 살려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저좀 기억해 주세요. 이게 갚을 거 마련하지 못한(없는) 자들의 처절한 고백이어야 되는 거예요.

뭘로 갚습니까? 우리의 그 잘난 착한 행위가 하느님 앞에서 뭘 그렇게 선해 보여요? 아닙니다.

면류관 가지고 주님께 드리세. 나 이만큼 갚을꺼리 갖고 왔으니까 면류관 씌워 주세요. 상주세요. 이게 마귀입니다.

여러분 하느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없음의 자리로 낮추실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낮춰지는 자가 높아지는 자입니다. 하느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갈 자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인 거예요.

루가복음 12장에 가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지키시는 존재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가 잘 나와 있어요.

 

(루가12,4-7) 4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겠다. 그분은 육식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이다. 그렇다.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다. 6 참새 다섯 마리가 단돈 두 푼에 팔리지 않느냐? 그런데 그런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계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그 흔한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주님께서 하느님이 참새도 지키시고 돌보신다 그래요. 그런데 머리털까지 세고 있는 너희는 어떻겠니 라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 하느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참새. 그 귀한 참새가 두 푼에 다섯마리씩 팔린대요. 마태복음에 가면 한 푼(, 1/16데나리온)에 두 마리 준다 그랬거든요. 그러면 두 푼에 다섯마리는 한마리 덤으로 줬단 뜻이에요.

하느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참새라는 존재가 너무 값어치 없이 취급당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게다가 참새는 팔리면 어디로 가요? 안주꺼리로 가는 거예요.

하느님이 지키시는데 왜 그렇게 덤으로 얹혀지는 인생처럼 그렇게 낮아져야 돼요? 내가 지킨단다. 그래서 참새 한마리에는 일만 달란트야 이래야 맞는거 같지 않아요? 내가 지킨단다. 그래서 참새는 한마리 덤으로 줘.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너희들은 개의 자리로, 낮아지는 자리로, 소경의 자리로, 거지의 자리로, 병신의 자리로, 저는 자의 자리로 내려가게 될거야! 세상이 너희들을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죽일 거거든. 그때 너희는 덤으로 팔려가는 그런 참새처럼 너희들이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사람 두려워하지 말아라. 걔네들은 너희들의 목숨만 죽일 수 있을 뿐이야. 그러나 하느님은 육신도 죽이고 지옥까지 보낼 수 있는 분이니까 그분을 두려워해! 그런데 그분이 널 지키고 있지않니? 안심해라!란 뜻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참새는 그러한 하느님의 처사에 수긍하면서 두 푼에 다섯마리씩 쳐줘도 항의하지 않고 그냥 팔려갑니다.

그게 참새죠. 인간만 절대 나는 그런 취급 못받겠다고 그 위대한 참새를 안주 접시에 올려놓고 잘근잘근 씹으면서 쇄주 한잔씩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참새처럼 못살아'

그래서 설교 제목을 '포장마차 안주 접시 위의 참새구이보다 못한 나'라고 적어 놓은 거예요. 참새는 하느님의 뜻에 수긍을 합니다. 모든 자연이 그래요. 맹수들도 배고프면 그냥 굶어 죽습니다.

맹수들이 농사짓는거 보셨어요? 나 오늘부터 육식 안 할래 나 오늘부터 채식할래. 그런 사자 보셨어요? 코끼리가 하마가 난 이렇게 등치가 큰데 왜 풀만 먹어야 돼? 나 오늘부터 고기 먹을래. 안돼요. 그렇게 풀먹어야 할 소에게 육식 먹여서 광우병 생기는 거예요. 그건 안되는 거예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는데 우리 인간들만 싫테요. 아주 그 참새를 씹어 먹어 버려요. 난 그렇게 못 살겠다는 것이죠. 참새처럼 살자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걸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 그러니 덮어주세요. 정말 면목 없어요. 제가 그동안 착한 일 몇개 한거 갖고 교회 봉사 몇개 한거 갖고 하느님 우러르며 그래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기도했었는데 이제는 우러를 수가 없네요. 그거 내꺼 아니니까 하느님 하늘 밥상위의 부스러기 은혜의 부스러기 조금만 나눠 주세요.' 그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오늘도 여러분의 아픈 마음을 위로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위로가 되는 날이 분명히 여러분의 삶에 올거에요. 여러분 그때까지 그냥 잘 살아 계세요. 그게 이기는 거예요. 뭐 대단한거 하여 이길려고 하지 마세요. 고 이길려고 하다가 높아지기의 자리로 또 올라갑니다. 살아 계세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를 가지고 폭격해 들어오실 때 그냥 견뎌내세요. 하느님 거기에서 안건져 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죽기 때문이에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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