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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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께서 남기신 유품 한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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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5-09-27 ㅣ No.12544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루가 9장 57-62절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수사님께서 남기신 유품 한 박스>


저희 공동체에서 그간 모시고 있었던 할아버지 수사님의 임종과 장례식 때문에 한 몇일 바빴습니다. 돌아가신 수사님께서는 첫 한국 살레시오 회원이셨고, 한 평생 낮은 곳에서 굳은 일만 골라해 오신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돌아보니 수사님은 젊은이들로만 이루어진 저희 공동체에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기나긴 투병생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늘 장난스런 얼굴로, 손을 꽉 쥐시며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던 재미있던 어르신이셨습니다.


수사님을 묻고 돌아와, 수사님께서 머무셨던 방에 들어갔었는데, 어찌 그리 황망하던지요.  수사님께서 남기신 소지품을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사님의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고 떠나신 것은 겨우 낡은 옷가지 몇 벌, 이젠 구식이 된 라디오 하나, 쓰시던 안경, 틀니, 다 합해서 한 박스도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당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 않으셨던 분, 거의 외출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시며 공동체 안에서 머무르시던 분, 단 한 번도 공동기도에 빠지지 않으셨던 분, 언제나 먼저 팔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삽을 드시던 분, 참으로 좋은 모범을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건강문제로, 또 성소문제로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결국 ‘떠나기로’ 거의 마음의 결정을 짓고 수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수사님께서는 길게도 아니고 딱 한 말씀만 해주시더군요.


“서원한 수도자가 가긴 어딜 가! 그냥 계속 가! 가다보면 길이 생겨!”


단 한마디 말씀, 단순한 말씀, 투박한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선배로서 방황하는 후배에게 건네주신 참으로 값진 말씀이었습니다. 수사님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그 말씀을 이제 저는 후배들에게 다시 건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도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때 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었건만,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이쪽에 한 발, 저쪽에 한발,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주 돌아다보니 삶이 비뚤 비뚤, 흔들리고 방황하기 마련이지요. 뒤를 돌아보느라 앞에 있는 암초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된통 크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뒤를 돌아보다 큰 나무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기도 합니다.


한 평생,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하셨던 수사님, 아무리 큰 풍랑과 시련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던 바위 같던 수도자, 그리고 영예롭게도 가난하고 겸손한 수도자의 신분을 간직한 채 삶을 마무리하신 수사님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수사님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서원한 바를 죽기까지 지키겠다는 투철한 수도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앞만 바라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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