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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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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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4-19 ㅣ No.111550

 

2017년 4월 1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제1독서 사도 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복음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200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선종하면서

남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세요.”
죽음 앞에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죽음을 앞두고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기에 급급할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 지금 당장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클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후회 속에서 과연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마지막 말씀인

“나는 행복합니다.”는

더욱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더불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기에 이 세상에서의 삶이

행복했음을, 그리고 이제는

더 큰 행복의 삶으로

건너갈 것을 굳게 믿으셨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그냥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물론 죽음에 대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을

갖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죽음이

끝이 아님을 우리들에게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벌써 2,000년이 지났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과거의

한 가지 신화 정도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지 못하니,

그 결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후회만 할 뿐인 것이지요.

정말로 믿지 못할 하나의

사건일 뿐일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역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아직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떼어진 빵 조각이

그들의 닫힌 눈을

열어 주는 열쇠였습니다.

빵을 나누는 순간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고,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당신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죽음 앞에서 분명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태양이 어김없이 솟아오르듯

마지막인 것만 같은 순간에도 새

로운 희망이 움튼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앤드류 매튜스)

엠마오 추정지인 라투룸의 성당.

"천 번의 두드림"

(‘좋은생각’ 중에서)

한 젊은이가 고생 끝에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갈수록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기분 전환할 겸 산책을

나섰다가 나이든

석공을 보았다.

석공이 망치로 큰 돌을

내려치자 반으로 쫙 갈라졌다.

다른 돌 역시 마찬가지였다.

깜짝 놀란 그가 물었다.
“어르신, 힘이 대단하시네요.

타고난 겁니까,

아니면 비결이 있습니까?”
석공은 껄껄 웃었다.

“젊은이, 난

평범한 사람이라오.”

그러곤 돌을 내밀며

자세히 보라고 말했다.
단단한 돌에는 미리

쪼아 놓은 작은 구멍이

여러 개 있었다.

 어찌나 촘촘히 구멍을

냈는지 꽤 긴 시간을

들인 것 같았다.
“여보게, 한 번 쳐서

돌이 갈라진 게 아니라네.

갈라지지 않은 천 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네.”
우리들은 단 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천 번의 두드림 끝에

돌이 갈라질 수 있는 것처럼,

리 삶 안에서도 이러한

계속적인 두드림이

있을 때가 더욱 더 의미 있고

행복하지 않을까요?

2001년, 삼종기도를 하시는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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