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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예수가 죽어야 율법이 완성된다. (마태 5,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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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09 ㅣ No.147443

 

 

(공동번역성서) 2021. 6. 9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도란도란글방

 

 예수가 죽어야 율법이 완성된다. 

 

(마태복음 5:15-20)

15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16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20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언뜻보면 너희들의 착한 행실 그게 바로 빛이고 그렇게 착한 행실로 너희는 아버지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으며 다 이루는 것이니까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쳐야 천국에서 큰 자다. 다 우리의 행함을 아주 강요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잖아요. 전혀 반대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15절을 보면 집안 모든 사람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엔테오이키아’, 이렇게 오이코스가 집이니까. 엔테오이키아그 집, 그 성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육()인 성전 안에 빛을 갖고 있는데 이 성전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는 그런 모양을 그리고 있죠. 세상의 빛은 성전 안에서 우리의 몸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예수로 비추어지는 빛, 말씀의 삶을 말하는 거죠.

16절은 우리 몸 안에, 성전 안에 그렇게 빛을 두는 것, 이걸 탑칼라에르가’ ‘그 일이에요. 우리 안에 빛을 두는 그 일’, 거기에 그런데 칼로스’ ‘칼라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그게 착한 그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착한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빛을 두는, 말씀을 두는, 아들을 두는, ‘그 일’, 착한, 선한 일이다.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뭐 꾀나 착한 일을 하면 그걸 보고 사람들이 야~예수 믿고 사람들이 저렇게 착해지는구나~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여기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번역이 된 그 어구는 우리 안에 빛을 두는 것, 아들을 두는 것, 그걸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절대적인 선을 가리키는 아가또스로 쓰이지 않고 선한 일이라고 했는데, ‘아가또스가 아니고, 그게 절대적 선이거든요. 그런데 칼로스가 쓰였어요. 왜 그럴까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는 아들로 빛으로 전해지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율법으로 전해져서 이게 죽음으로 끌고 가는 그런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에요.

 

(2고린2,14-16) 14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5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지만 16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향기의 구실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빛이 칼로스상대적으로 다른 부류에게 다른 모양으로 전달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칼로스에요. 착한 행실. 절대적인 아가또스가 안 쓰였단 말이에요. 그렇게 내 안의 빛을 담고.. 빛을 증거하고 예수를 이렇게 전이하게 되는 그런 자로 살게 되는 그 상태, 쉬운 말로 내 안에 그리스도라는 아들을 낳아서 그걸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삶을 살게 되는 그 성도의 상태, 그게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거기 때문에 하느님이 능력이 나타났다.에서 하느님의 영광인 거예요.

구약의 예언서나 시가서에 쭉 나오잖아요. 우리의 선함과 우리의 악함이 하느님께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서는 또 착한 일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라~ 이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요. 일관성이 없잖아요. 그게 성경을 율법으로 규례로 규범으로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빛의 이야기는 빛이신 예수를 증거 하도록 그 성전안의 빛,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시는 그 하느님의 능력과 그 열심,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독사(영광), 능력이 드러나는 거니까. 하느님의 하신 일이란 말이에요.

착한 행실은 우리 성도 안에 하느님께서 행해 놓으신 일을 가리키는 거란 말이에요. 그 착한 행실이라는 어구와 본문 19절의 말씀을 연결해서 이해를 해 보세요. 착한 행실은 빛이신 예수님을 성전인 우리 안에 담고 그 예수를 빛을 이렇게 낳는 거예요. 아들을 낳는 거라고 그러잖아요. 그게 착한 행실이라고 그랬어요. 19절은 그러한 착한 행실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 라고 이렇게 풀어주는 거예요. 행하며 가르치는 자 포이에오그게 행하다.’ 라고 이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자가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다.

 

(마태5,19) 19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가장 작은 계명이라는 게 이게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명이라는 걸 지킨다고 하면서 지극히 작은 것, 예수로 그걸 해석해 내지 못하고, 그걸 버리고 명령과 규례로만 지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천국은 다 큰 자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천국에 합당치 않은 자다. 라는 뜻이에요. 크고 작은 차서를 지금 규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앞에서 그 안에 빛을 두는 것. 이게 착한 행실, 그 일,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들을 마음에 두고 아들로 그 율법, 예언자를 이해하여 그걸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 천국에 합당한 자다. 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니 조금만 방심하면 성경은 전부 율법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어요.

 

(마태복음517) 17 예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과 예언서는 모세오경, 구약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그 구약을 플레로’ ‘꽉 채워’ ‘Full Fill’ 이라는 뜻이거든요.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을 꽉 채우러 왔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이 구약은 미완성인 거죠. 예수가 오지 않으면, 거기에 끼어들지 않으면 구약은 말씀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심지어 죽이는 것 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을. 구약을. 예수로 결론나지 않는 구약은 악한 것이다. 그 말은 단순히 예수님이 율법의 세목을 다 지켜서 우리에게 전가시켜줬다. 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님은 율법의 세목을 다 지켜서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게 아니라 율법의 심판, 율법의 그 저주를 다 받아내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더 이상 당신의 백성들을 참수하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다 지키러 온 게 아니라 그 율법에게 맞아 죽으러 온 거라니까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예수그리스도와 그 율법과 예언서를 그 구약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견해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어요. 그 하나는 예수님이 특히 구약에 핵심을 구성하는 율법에 대해서 철저한 반역의 의지를 가졌다. 그 율법은 아니야~ 저거는 부셔야 돼.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예수님이 오히려 율법 아래에 예속되는 정서를 공공연히 표방했다. 라는 그런 의견이에요. 그래서 십일조를 내라.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고 또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셨던 것이다. 이렇게 주장을 한단 말이죠. 이렇게 첨예하게 두 가지로 대립이 되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며 그 구원은 온전히 하느님의 은혜로부터 나왔다. 라는 의견을 강조하는데 있어서는 전자 쪽의 의견이 기울어지는 것 같지만 소위 말하는 성화의 차원에 들어서면서부터 구약의 율법을 믿음의 잣대로 들이미는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한마디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라는 거예요. 지금요.

아니 딱 꼬집어 그걸 율법이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냥 말씀이라고 이렇게 두리뭉실 이야기를 하죠. 그건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이렇게 소홀하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은 다 지켜내야 되는 거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되는 거야~ 채워야 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뿌리를 따라 올라가 보면 역시 율법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논리가 성경을 규범에 대한 강박 같은 걸로 변질시켜 내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보면 답답한 거예요. 안 되거든요. 신명기 28장으로 가면 그러한 후자적 접근이 얼마나 우매한 접근인지가 잘 나타나 있어요.

 

(신명기28,1.15.20-22) 1 그러나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땅 위에 사는 만백성 위에 너희를 높여 주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성심껏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20 야훼께서는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을 뒤엎으시어 뒤죽박죽이 되게 하실 것이다. 당신을 저버리고 못할 짓을 한 까닭에, 마침내 너희를 쓸어버리시리니, 너희는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21 야훼께서는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로 하여금 염병에 걸려 끝장나게 하고 마실 것이다. 22 야훼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병을 내려 너희를 치시고 무더위와 열풍을 몰아오고 깜부기병을 내려 너희를 치실 것이다. 이런 것들이 덮쳐 와 너희는 결국 망하고 말 것이다.

 

이 무슨 내용인지 아세요? 이거? 염병 폐병 열병 깜부기병, 여기 보면 야훼의 말씀이라는 게 나오고 명령과 규정이라는 게 나오죠. 하느님 야훼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로 축약이 되는 하느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가 말씀이다. 라고 요한복음 1장이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예수란 말이에요. 그런데 유한의 이성, 현상계의 이성은 그것을 명령과 규정으로 밖에 인식을 못해요. ? 그 말씀 안에 담긴 예수는 무스테리온’ ‘비밀이거든요. 그래서 이 유한이 말씀을 대하게 되면 그걸 반드시 명령과 규정, 도덕과 윤리 수준으로 밖에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간디 같은 사람, 루소 같은 사람이 이걸 다 명령으로 규정으로 규범으로만 본 거예요. 그리고 그걸 지키려고 애를 썼던 거죠. 오죽하면 법정 스님 같은 분도 이 산상수훈을 그렇게 칭찬했겠어요. 정말 훌륭한 경전이라고. 그러니 유한에 갇힌 인간들이 율법과 예언서 즉 말씀을 예수그리스도를 이해를 한다. 라는 건 언어도단이에요. 그러한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명령과 규정으로 받아들이죠.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명령과 규정이 되면 반드시 그것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가지고 상벌이 나누어지게 되요. 그래서 신명기 28장의 복 받는 자들의 이야기와 저주받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말씀이 나오고 이게 명령과 규정이 되면 너희들은 지켜야 되는데 그래 지켜봐 그럼 복 준다. 그런데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어~ 15절 이하. 저주 받는 거예요. 명령과 규정이 되면 상벌이 있어요. 그러니까 상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은혜 아래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말씀을 명령과 규정으로 그들은 법 아래에 있다라는 증거란 말입니다.

신명기 2820절을 보면 당신을 저버리고 못할 짓을 한 까닭에 란 어구가 나오죠? 그건 그를 잊는 것이 악한 행위이다. 그러니까 말씀 속에서 예수를 발견해 내지 못하고 어디다 빼먹고 말씀에서 예수가 빠져버리면 명령과 규정만 남죠. 그게 악이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 명령과 규정에 그냥 묶여 버리는 거예요. 예수가 말씀이 아들이 빠져 버리면 마음에 아들이 없는 자,

하느님은 분명히 그 마음에 당신의 영을 두겠다고 했잖아요. 새 언약에서. 에제키엘 36. 예레미야 31장에서.

그리스도의 영 예수그리스도가 아들이 그 안에 있으면 반드시 성경을 아들로 보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아들로 이해하게 되어 있는데 그 아들이 없을 때에는 명령과 규정으로 보게 되고 거기에 묶여 버리는 거예요. 아들이 주는 은혜에 의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아들이 빠져 버리면 명령과 규정에 그냥 묶여 버린다니까요.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거예요. 거기에 심판이 떨어져요. 어떻게 떨어지는지 보세요.

 

(신명기28,21-22) 21 야훼께서는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로 하여금 염병에 걸려 끝장나게 하고 마실 것이다. 22 야훼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병을 내려 너희를 치시고 무더위와 열풍을 몰아오고 깜부기병을 내려 너희를 치실 것이다. 이런 것들이 덮쳐 와 너희는 결국 망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염병은 단순히 전염병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부수어 버리다. 라는 무서운 심판의 언어에요. 부수어 버려요. 깨버리다. 멸망시켜 버릴 거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그 부수어 버리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내용, 심판, 지옥 그걸 어떻게 설명하냐면 폐병, 열병, 상한, 학질, 한재, 풍재, 썩는 재앙 이렇게 나와요.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가 예라콘’ ‘쉐다파헤레브’ ‘하르후르’ ‘다레케트’ ‘카다하트에요.이게 다 열과 관계된 단어에요. . 물이 없음과 관계된 단어란 말입니다. 이게 다. 단순히 질병의 목록을 나열해 놓은 게 아니에요.

그 단어들은 전부 물이 없는 곳에 열만 가해짐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가뭄, 열병,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이런 거예요. 이거를 굳이 조선의 질병의 목록으로 해석을 해 놔가지고 뭐 알지도 못하는 단어를 그냥 대충 읽고 있는 것인데 그게 곧 멸망이요 지옥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거든요. 하느님이 그렇게 놔두겠대요. 그렇게 멸망시켜 버리겠다. 라는 거예요.

사막으로 광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예요. 기근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죠. 물이 없다. 광야, 사막, 말라비틀어짐 이게 뭐죠? 말씀이 없음이지요. 말씀의 기근, 기갈 그러죠? 그게 심판이에요 이게 지옥이에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그게 망하는 거예요. 그게 내 벌이다. 그랬단 말이에요.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말씀, 아들을 두지 않는 게 벌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전부 그 열병, 말라비틀어짐, 사막, 광야 이런 단어들을 여기다 지금 쭉 나열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인간들의 판단 기준이 ....인간들 자신에게서 나온 선악구조가 되어 버리면 인간들은 그 법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지켜내기 위한 분투를 시작하게 되요.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그 법에 묶여서 그 법 아래에서 자기의 가치를 챙기기 위해 이제 달리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 인간의 전체의 보편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거든요. 인간이 주인공이니까

 

그렇게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구조에 빠지게 되면 인간들은 반드시 발전과 성숙과 번영을 욕망하게 되요. 그게 인간들이 상정해 놓은 선이거든요. 그것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인데. 아무튼 인간들은 그걸 선이라고 여겨요. 그리고 정지, 변화 없음, 퇴보 이런 건, 악으로 여기죠.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을 약한 자, 실패한 자 이렇게 조롱하잖아요. 이게 악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번영한 자, 변한 자, 성숙한 자, 이건 선이다. 라고 자기들이 인간들이 그냥 상정해 놓은 거란 말이죠. 그리고 그 구조 아래에서 자기들이 상정한 그 법에 의해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거예요. 혈안이 되어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욕망하는 게 그거잖아요. 다스리고 싶고, 정복하고 싶고, 번성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게 우리의 욕망이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걸 명령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그게 옳은 거라고 생각해요. 하느님은 그 안에 메시지를 담아 놓은 건데 그걸 표피적으로 법으로 명령으로 그냥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그걸 욕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게 옳다. 선이다. 라고 자기들끼리 주장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어디서 그렇게 명령했습니까?

 

우리가 문화명령이라고 이야기하는,

(창세기1,27-28)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2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라. 네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말씀하셨죠? 복을 주시며.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려라 이런 명령이 떨어지고 있죠?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은 어떻게 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요?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그 십자가를 심어 놓은 거란 말이에요.

어떻게 알아요? 여기 보면 이 복으로.. 이것들이 복으로 주어지고 있는 배경이 하느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거기는 남자와 여자가 아직 분류되기 이전이죠?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하나인 남자와 여자가 아직 연합되어 있는 상태 그 사람에게 준 명령이란 말이에요.

창세기 2장부터는 남자 안에서 여자가 분리 나옴으로 말미암아 이제 선악과 죄, 타락, 뱀 이런 것들이 막 등장하는데 창세기 11절부터 23절까지는 사람이 아직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기 전이에요. 그래서 단수에요. 아담, 사람을 만들자. 그래놓고 하느님이 그 사람의 내용인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남자와 여자가 연합이 되어 있는 이 상태가 뭐죠? 예수그리스도가 죽음, 아담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옆구리가 뚫리고... 그 여자가 이 아담에 의해 아담의 것으로 이렇게 창조가 된 상태 이게 다 인정되고 이해되어지는 이 상태가 이 연합이란 말이에요. 나는 당신의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없으면 나는 존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게 남편 안으로 들어가 연합된 신랑과 신부의 관계란 말이에요. 이게 사람이란 말이에요. 사람. 하느님 나라의 백성, 그 자체가 십자가를 이미 함유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사람인 그 상태.. 이게 바로 생육이며 번성이며 충만이며 다스림이며 이게 나라라는 의미란 말이에요. 그래서 십자가가 예수가 그 배경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예수를 빼버리고 그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걸 명령으로만 받아드리면. 그래 열심히 노력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정복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분열이 있고, 다툼이 있고,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애씀이 있고 고통이 있고 피곤함이 있고 고단함이 있고 눈물이 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을 짓누르는 짐인 거고 그게 지옥이란 말이에요. 그걸 성취해 내느라 고단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그 삶 자체가 지옥이에요. 말씀이 없음. 예수가 빠지니까 뭔가 열심히 추구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 그게 다 무거운 짐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명기 28장에서 내가 너희들을 저주하고 심판할 건데 ...사막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말이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릴 거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 받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뭐 아닌 거 같은데, 살아 보세요. 말씀이 없이 그 어떤 것을 성취해 내도 우리에게 공허와 허무밖에 안 와요. 그걸 지옥이라고 그래요.

그 모든 게 다 인간들이 라는 개별적 자아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지옥이 역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거란 말이에요. 자아를 챙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때 하느님이 하느님의 백성들을 거기서 빼내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그렇다면 그러한 지옥이라는 역사 속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첫 번째 하실 일이 뭐겠어요. 인간이 주체가 되면서부터 그 심판이 생겼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거기서 빼내기 위해 해야 될 첫 번째 일이 그 주체, 자아를 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흐물흐물하게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다시 끌어 내리는 게 구원이에요. 그래야 인간들은 자기의 선악구조로 남과 자기를 판단하지 않게 되고 거기에서 자유가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우리 인간들이 상정한 그 법에 의해 조바심 내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고, 쪽팔려 하고 이런다니까요. 그거에 종속 되어 사는 거예요. 그걸 지옥이라고 그런다니까요. 그게 도대체 뭐라고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올인하며 사는 거예요. 자아가 독립을 하면서 선악구조가 생기고 그 선악구조에 의해 인간들을 묶는 법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자아를 차압해 버리세요. 당신의 백성들의 자아를 원래의 창조의 자리, 없음의 자리로 부수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선악의 주체의 자리에서 해고시켜 버려요.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

하느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구축하고 있는 생육과 번성과 정복과 충만, 다스림 등이 성공이 아니고 승리가 아니며 복이 아니다. 라는 걸 가르치신단 말이에요. 예수가 복이다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이 역사를 종횡무진 달리면서 자아로 쌓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제 하나하나 끊어 내는 작업을 하시는 거겠죠.

 

(마르코10, 29-30) 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나와 복음 때문에~ 이게 위하여가 아니에요. ‘헤네카가 부사인데 때문에~에요. 나와 및 복음 때문에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자식, 토지가 떠나간 자는, 그가 떠나는 게 아니라 이것들이 떠나게 만드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게 떠나간 자는 금세(今世)에서 ’, 지금이에요. 지금. 지금 그것들을 다른 종류의 것으로, 이 백배가 헤카톤타플라시온백배, 이게 플라소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그게 빚어내다. 창조하다. 이런 뜻이에요. 창조의 언어에요. 그것들이 떠나가고 지금 창조의 영역의 것으로 백배, 지금 너희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좋은 것. 창조의 영역에 있는 좋은 것. 그걸로 준다. 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영원한생명이래요.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아 확장의 재료로 쓰여지는 집, 토지,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 자식 이렇게 떠나가는 과정을 겪어 내게 되어 있다. 라는 거예요. 그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 이것도 우리에게 영원한생명과 구원을 주는 생명을 주는 재료가 되는 게 아니구나~ 를 알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떠나가는 거예요. 예수로 밖에는 우리에게 생명이 영생이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 거구나~ 를 아는 거, 이게 떠나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다 잘라내서 알거지가 만든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고아 만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뭐에요? 그 모든 것들이 다 우리 인간들이 자아의 확장의 재료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 토지, 재산, 형제, 자매, 아버지, 자식 이게 다. 그러니 이것들이 오~ 이게 내 생명이 되는 게 아니구나~ 예수가 내 생명인거구나~ 이거를 알게 되는 거, 그래서 예수에게 내 삶을 이렇게 투신하는 걸 자기 부인이라고 그러고 그게 예수와 접붙여지는 영원한생명인 거예요.

 

왜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유한한 거기 때문에 내가 그걸 생명으로 붙들고 있으면 그게 죽을 때 나도 죽는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가 내 생명이 될 때 ...내 모든 것을 투신한 존재가 예수가 될 땐.... 그 분이 영원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바꿔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일취월장, 승승장구 아니에요. 절대로요. 성공번영 부흥, 이런 거 아니에요. 왕창 깨지는 거예요. 부수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육이 살해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보석이 오롯이 그렇게 드러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요한묵시록에 보면 하느님의 백성들을 다 보석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 나라가 보석으로 되어 있다는 말 아니라고 했어요.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에요. 교회, 신부라고 했어요.

우리가 보석이라는 건 우리가 갖고 있는 질그릇이라는 육을 역사 속에서 다 박살나는 거예요. 부숴뜨림을 당하는 거란 말이에요. 당신은 사랑받기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살해당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 육인 당신이 죽어야 그 안에 있는 예수가 보석으로 드러나는 거라니까요. 그게 그리스도교에요.

자 그렇게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아확장의 재료를 차압당하고 몰수당하는 삶을 살게 되요. 그래야 자아가 해체되니까. 이게 나였는데 이걸 뺏어 가야 자아가 해체되고 그래야 선악구조, 우리 인간의 선악구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선하다고 그러면 선한 거고 악이라고 그러면 악이에요.

하느님이 넌 내 백성이야~ 그러면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 맞는 거지. 라고 했을 때, 거기에서 잠깐 몇 초 자유로워질 때, 이걸 천국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이 몸뚱아리가 하느님의 백성들이 육적 자아가 몽땅 하느님에 의해 차압이 되고 예수를 머리로 한 그냥 하나의 교회가 될 때 거기는 개별적 자아가 다 몰수당하는 거니까. 교회죠.

그때에는 거기가 진짜 천국이 되는 거죠. 그걸 배우는 게 신앙생활인데 어떻게 여기에서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올바른 그리스도 신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냐고요.

 

토지, 집 다 마찬가지죠. 그게 우리의 자아구축의 재료가 되면 우리는 조바심을 내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 모으려고 하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게 우리에게 고통이 되는 거예요. 불안함이 되는 거예요. 그게 지옥이라고 그래요. 자아가 살아 있을 때. 그러한 것들이 하나하나 끊어져 나가고 하느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해서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한 평가나 판단에 자유로운 그 상태를 하느님의 통치, ‘바실레이아’ ‘천국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결정하고 합의하고 상정한 선악의 틀에서 빠져나와서 하느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나를 투신할 때 우리는 잠깐 잠깐 그런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게 너무 좋아서 그 자유를 오매불망 이렇게 바라게 되는 걸 소망이라 그래요.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곡해하여 그것을 명령과 규례로 받아서 죽어라고 달리는 게 지옥이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에서 눈물, 고통, 아픔 이런 게 다 오는 거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상태는 예수에서 시작하여 예수로 완료되는 하느님 나라와 언약에 대한 몰이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거라고 그랬죠 이걸 이해하지 못하니까 주체를 챙기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말씀을 이해하면 그 안에 이렇게 객체로 들어가게 되는데 시작이요 끝인 예수라는 말씀을 이해 못하니까 자기가 주체가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서 지옥이 생긴다고 했잖아요. 경쟁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고 전쟁이 생기고 그걸 말씀이 없음. 기근, 기갈이라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그걸 지옥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명기 28장이 심판의 상태, 저주의 상태를 에라콘 쉐데파 헤레브 하르흐에르 다레케트 카다하트 등으로 표현한 거라고 그랬죠? 열기, , 가뭄, 바짝 말라비틀어짐 이런 거.그 상태에 말씀, 예수라는 생수를 부어서 촉촉하게 아들로 살려내는 게 구원이라고 그랬어요.

교회에서는 다른 거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신명기 2822절의 그 단어들 열기, 바짝 마름, 사막, 광야 이런 단어들을 다 합쳐서 꽉꽉 짜서 헬라어 한 단어로 만들면 휘레토스에요. 그게 루가복음 4장에 나와요.

 

(루가4,38-39) 38 예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 때 시몬의 장모가 마침 심한 열병으로 앓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부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39 예수께서 그 부인 곁에 서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하시자 부인은 열이 내려 곧 일어나서 사람들을 시중들었다.

 

(여기 시몬이라는 단어가 사막, 광야, 말씀이 없음 이런 뜻이에요. 시몬이 베드로 반석이 되어 이제 말씀을 생수를 뿜어내는 자로 바뀌는 게, 이게 시몬 베드로가 갖고 있는 뜻이죠.)

여기 병이라는 단어는 안 나와요. 헬라로 원어로 보면. 그냥 열기에요. . 시몬, 광야, 사막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열이라는 게 나와요. 이게 신명기 2822절에 나오는 그 단어들을 다 축약하면 이 단어에요. 이게. 열이에요. . 열기. 마르게 하고, 바짝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푸석푸석하게 하고, 물기를 없애는 거. 이게 열이에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있던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 바로 다음에 붙어 있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회당안의 귀신 이야기는 단순히 귀신 들려 미친 사람을 예수께서 고친 사건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에서 귀신 들린 자 라고 번역이 된 헬라 어구가 푸뉴마 다이모이유아카타르뚜 라고 그랬어요. 푸뉴마는 성령인데 다이모니아아카타르뚜가 뭐에요? 왜곡된 영, 부정한 영, 그런 존재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말씀이 영이요 푸뉴마, 생명이다.

그러니까 왜곡된 영, 부정한 영, 이건 왜곡된 오해된 말씀 이게 유대인의 회당 이걸 요한묵시록에서는 사탄의 집단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다이모니아 이걸 마귀라고도 이야기하고 하는데, 사실 그 행간에 들어 있는 그 메시지를 catch 를 해야 되는 거죠. 단순히 귀신, 귀신 들린 자, 그걸 고쳤대 그러까 우리도 예배당에 가서 귀신 들린 자 많이 고쳐야 돼,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왜곡된 말씀, 오해된 말씀, 이걸 사도바오로는 다른 복음이라는 말로도 고쳐서 써요.

그 왜곡된 말씀이 가득 찬 그 유대의 회당, 그 율법주의의 그 무리 그걸 고쳐내시는 게 ...회당안의 귀신 들린 자를 고쳐내는 말씀이 가서 그 왜곡된 더러운 말씀을 몰아내는 거예요. 참 성전이 가서 옛 성전을 부숴내는 그 이야기에요. 회당 안의 귀신을 쫓아내는 건, 거기에 붙어 있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게.

갑자기 왜 예수님이 시몬의 장로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여자를 고치냐고요. 옛 성전, 회당, 그 집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집에서 나와 그와 똑같은 종류의 집, 시몬의 집으로 가는 거예요. 시몬의 집이 뭐에요? 말씀이 없는 집, 구약, 옛 성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갔더니 거기에 아니나 다를까 열기, 바짝 마른, 사막, 광야가 있는 거예요. 그 집에.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거기에 물을 부어 그를 촉촉한 말씀으로 이렇게 살려 내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어요. 엘리야 때에 사르밧 여자, 엘리사 때에 수냅 여인.... 이 여자들이 전부 자기가 해놓은 마지막 걸 뺏기죠. 사르밧 과부는 밀가루 한줌 뺏기고, 수냅 여인은 기름 한 병 뺏기죠? 몽땅 다 뺏겨서 진짜 주리고 굶주린 자,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니까 밀가루가 퍼도, 퍼도 계속 나오는 풍년, 영생이 오고 기름이 부어도, 부어도 나중에 그릇이 없어서 못 부을 정도로 계속 나오는 이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 여자의 이야기.

열로 말미암아 거기에 나는 하느님의 생수 말씀이 부어지지 않으면 그냥 이걸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성도에게 반드시 끌어내고 말거든요. 거기에 하느님이 말씀을 붓는 거예요. 그 이야기에요.

그 여자들이 둘 다 아들을 뺏기죠? 자기 육의 소산, 나에요. 아브라함이 자식을 죽였을 때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가 육으로 낳은 것들은 다 뺏기고 새롭게 부활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 아들을 다시 받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 이야기하면서 전부 고생했다. 고생했다. 아주 박살났다. 이러면서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고, 라는 어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이 여자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 라는 건 뭐냐면 내 육적 아들을 뺏기고 부활의 아들 예수를 받는 거예요. 이 과정을 통과하는 걸,.. 아들을 뺏기고 죽은 자를 부활로 받는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고난의 목록 속에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고 가 들어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아무튼 그 여자, 시몬의 장모는 시몬의 집, 말씀이 곡해된 성전, 옛 성전, 유대인의 회당, 사단의 무리, 말씀이 없는 곳, 사망, 광야, 기근, 가뭄,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지금. 그래서 열이에요. .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열을 꾸짖었다고 그러죠. 그 단어가 뭐겠어요?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데를 제가 하나 찾아 드릴게요.

 

(디모데후42). 2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가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여기 책망하다가 바로 똑같은 단어에요. ‘에피디마오그러니 말씀과 관계된 단어란 말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그 열을 가뭄을 사막을 가르친 거예요. 던진 거예요. 공격해 버린 거예요. 회당 안에서 귀신을 말씀으로 공격해 버린 거나 똑같은 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와 그 집으로 들어갔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말씀으로 던졌어요. 열기를 공격했어요. 꾸짖었더니 열이 도망갔어요. 떠나버렸어요. 열이 떠났다는 건, 열이 어디로 도망갔다는 게 아니라 열이 그 사막이 광야가 뭘로 바뀌었다는 뜻이에요. 그 말씀이 떨어지자 그 여자가 일어났다 그러죠? 이 단어가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 단어에요.

 

(마태20,19) 19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 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이 단어란 말이에요. 이게 시몬의 장모가 열기를 뺏기고 일어나다. 라는 뜻이에요. 일어났어요. 부활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활. 그리고는 수종들었다고 그러죠. 너무 고마워서 부엌에 가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렇다는 말이 아니라 뭐 발 닦아주고 뭐 수건 갖다 주고 이런 수종이 아니라 이 단어는 디아코네오이 단어가 뭐냐면 디아코노스라는 단어에서 온 건데 이게 목자, 말씀을 전하는 자의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수종들었다는 건 말씀으로 갑자기 이 여자가 열이었던 사막이었던 광야였던 여자가 부활하여 일어나더니 갑자기 아들로 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더라는 뜻인 거예요. 말씀이 나오더라 라는 뜻이에요. 아들과 관계없던 자가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아들만 나와요. 십자가만 나와요. 예수만 나와요. 피만 나와요. 이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 라는 말이 어떤 말씀이겠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느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예 다른 후사는 다 뺏기고 아들, 예수라는 후사를 낳게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가 오셨다는 거예요. 율법과 예언서, 구약 .다른 말로 옛 성전...

또 다른 말로 이 현상계인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육적 후사를 내 놓으면서 그것으로 자아를 증명하고 자아를 확장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오답이고 예수만 정답이다. 라는 걸 예수님이 입증하러 왔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왔다 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약할 때 고린도후서 12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그러죠. 그 말은 내 은혜는 그 정도면 된 거야 임마~ 이 말이 아니라 내 은혜 케리스라는 건 모든 이에게 그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살고 있고 어떠한 상황과 사건에 직면해 있다 할지라도 그게 다 만족이라는 이야기에요.

이 사람에게도 그 은혜가 만족한 상태로 있는 거고 저 사람에게도 이 은혜가 만족한 상태로 있는 거예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래 놓고는 내 은혜를 바로 그 뒤에서 내 능력이~ 로 바꿔요. 내 능력이 너희들의 약할 때 완전하여 진다고 그래요. 테텔레스타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 단어란 말이에요.

너희들이 약할 때 이게 질병이라는 뜻도 있지만 도덕적 연약함이란 뜻도 있어요. 개차반이라는 뜻이에요. 거기에서 내 능력 내 은혜가 완전해진다. 완성된다. 라는 거예요. 다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는 이렇게 훌륭해 졌어요. 말씀으로 이렇게 멋지게 변했답니다. 를 증명해 내는 게 아니라 그 스콜롭스가시, 사탄의 가시로 이렇게 푹 찔린 사람처럼 오죽하면 그게 말뚝이란 뜻이거든요. 가시가 아니에요. 몇 미터 되는 쇠꼬챙이인데 말뚝만한 쇠꼬챙이에요. 이걸 갖다가 옆구리에서 옆구리로 그냥 폭 뚫어버린 거예요. 포로들을 잡아서 이렇게 뻥 뚫은 거 그게 스콜롭스란 말이에요. 그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처럼 아프고 쪽팔리고 창피하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이런 자가 산 자다. 어떻게요? 내가 살렸으니까. 이렇게 하느님의 일하심을 증명해 내는 게 역사이며 인생인 거지. 여러분이 말씀을 갖고 뭐 대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건 이미 완료되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만 정답입니다. 이거를 빛으로 이렇게 들어내면서 사는 거예요. 증거하고 설명하고 전이하는 자로 살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빛이다. 예요. 너희는 빛이다. 역사와 인생은 예수라는 자손을 낳아야 사는 거지.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낳는다 할지라도 절대 살 수 없다는 거예요. 먼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어떻게 요약해 주시는지 한번 보세요.

 

(마태22,36-40) 36 '선생님, 율법서 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자 율법서가 여기에 나오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는 당신이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 라고 그랬어요. 테텔레스다이다 이루러 왔다. 는 거예요 . 완성하러 오셨다. 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율법과 예언서가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거래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이 말은 이게 똑같은 거다. 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이웃을 사랑하는 거다. 라는 뜻이에요. 이건 같은 이야기다. 라는 이야기거든요.

 

40절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두 계명 안에 모든 율법과 모든 예언서들이 매달린다.’ 예요. 이 두 계명을 이렇게 쭉 끌어올리면 구약,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이렇게 쭉 따라 올라온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율법과 예언서는 우리에게 명령과 규례로 준 거에요? 아니면 다른 의도로 준거에요? 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 구약 전체가 이렇게 매달려 있다는데 이걸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거예요? 아니면 다른 의미로 준거에요.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유한의 인간이, 현상계의 유한이 무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영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인식이 안 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 유한은 무한을 인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인식이 안 되면 사랑을 못해요. 솔직히 하느님 사랑하세요? 하느님이 누군데요? 어떤 분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창세기 11절이 하느님은 어떤 분이고요. 그 분은 시작이 어떻게 됐고~ 이렇게 설명을 안 하고, 그냥 하느님이 계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설명이 안 돼. 유한은 무한을 인식할 수도 없고 포착할 수도 없어요. 따라서 해석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어요. 더더군다나. 그런데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다. 에 매달려 있다면 이걸 지키려고 준 거겠냐고요. 아닐 거 아니에요? 이게 이 두 계명에 다 매달려 있는 거라며요. 그런데 이 두 계명이 뭐냐면 유한아 무한을 사랑해 봐라~ 라는 거란 말이에요. 그 무한을 사랑하는 게 어떻게 역사 속에서 드러나냐면 이웃을 사랑하는 거란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보자고요.

하느님을 유한이 무한을 사랑하는 게 수평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거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한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 사랑을 할 수 있어요? 못 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해요. 사랑이 뭔지를 알면 여러분이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요.

 

(요한14,9-10) 9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0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의 이야기를 하는데 하느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걸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 앞으로 한번 가보게요. 마태복음 316절 보세요. 유한이 무한을 사랑할 수 없고, 이 유한과 무한은 사랑으로 소통이 안 돼요. 그게 유한과 무한의 고랑이란 말이에요.

이 사랑으로 소통이 안 되는 이 관계를 불의라고 그래요. 이걸 소통되게 만드는 걸 화목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이 유한과 무한의 이 사랑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이 관계를 소통으로 화목으로 뚫기 위해서는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되어 들어와야 되요. 이걸 성육신이라고 그러고 십자가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17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기쁨 안에 있는 내 아들이다. 내 사랑이다 예요. 직역을 하면. 내 아들이다. 내 사랑이다. ‘아가페또스라는 형용사에 관사가 붙어서 존재적 개념을 나타내는 거거든요. 사랑하는 아들이다. 가 아니라 내 사랑이여 아가페여 내 아들이다 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사랑이에요. 아들 안에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꽉 차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들을 보면 사랑을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들을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내 마음이다. 아들에 내 마음을 닮았다는 거예요 아들의 삶을 내 사랑을 알라는 거죠. 이가 내 아들이고 이가 내 사랑이야~ 아가페야~ 신적 사랑 아가페야~ 그런단 말이에요.

 

(요한14,9) 9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아들, 우리에게 나타냈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사랑으로의 소통, 그 아들을 보냈다고 그래요. 그러면 보세요. 하느님의 사랑이 아들이 말씀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이게 이해가 되어져요 아~ 우리는 없음인데 하느님의 희생과 능력과 그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 만들어 준 거구나~ 이게 우리가 말씀, 아들을 받는 거잖아요.

그 사랑을 이렇게 받아 말씀이 내 안에서 충만하게 흘러넘치면.... 이것이 아들로 빛으로 말씀으로 흘러넘치겠죠? 그러면 그 사랑이 먼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아들을 보내어 우리 안에 모노게네스하나만 가진 자, 하느님의 사랑 그걸 가진 자를 모노게네스아들이라고 그래요. 그게 우리들이예요. 아들.

그걸 우리에게 아들을 부어줬을 때.....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아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삶으로 입으로 전하게 되어 있어요. 전이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입으로 설사 못 전한다 하더라도 모세처럼 말이 어눌하여 못 전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예수의 삶을 그대로 실제화 하여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아들을 사랑을 전이하는 자가 되요. 그걸 사랑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이것밖에 없어요.

 

(요한14,7) 7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하느님을 아는 걸 사랑한다. 라고 그러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자들아~ 가 아니라 교회야 너희들은 본질이 사랑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라는 뜻이에요. 사랑은 하느님께 속했거든. 그래서 그 사랑이 너희들에게 부어져서 ...

당연히 사랑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으니까요. 예수를 서로 살고 이야기 하는 걸 사랑이라고 하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그 안에 하느님이 없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다. 이렇게 쉽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되먹지 못한 인간들의 그 사랑, 이걸로 이해를 하면 요한1서는 하나도 이해가 안가요. 우리 전체는 그 사랑을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요한1서 읽으면서 전부 불안한 거죠. 내 안에 하느님이 없나~

우리의 사랑은 그냥 조변석개하잖아요. 이 사랑을 예수로 바꿔 보세요. 그러면 요한1서는 너무 쉽죠?

 

(요한14,11-12) 11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테텔레스다이완성하다. 라는 거예요.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사랑하는 이들이고 여러분이 예수가 완성해 놓은 율법과 예언서 그 사랑을 받은 분이란 말이에요. 11절에서 우리가 사랑을 받았으므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이 말이 헤일로빚을 지다. 라는 뜻이거든요. 바오로가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라고 그러는 거예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우리는 그 사랑을 반드시 흘려 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서로 서로 그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 사랑으로 소통하게 되어 있다. 이게 빚진 자예요. 받았으면 내 놓으라는 거예요.

 

(로마13,8-10)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10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

 

어떠세요. 하나로 다 통하죠. 이거 사랑의 빚진 자들아 사랑 내놔~ 서로 서로 사랑 내놔~ 남을 사랑하는 자, 그 예수를 내 놓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그러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왔다. ‘테텔레스다이이루러 왔다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사랑을 내 놓은 자는 율법이 이루어진 자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율법을 쫙 나열한 다음에)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게 그 사랑으로 완료됐다. 라는 뜻이잖아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요한14,17-18) 17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성당에서 자꾸 어떤 성숙의 단체공식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그렇게 괴롭히냐고요. 넌 예수를 믿는다며 그 모양이야~ 이러면서. 헌신의 정도가 그게 뭐니~ 그 사랑, 예수로 완료된 율법 그래서 노모스법이라고 하잖아요. 그거는 자유케 하는 법이에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새로운 법, 은혜의 법이란 말이에요. ‘노모스그 법아래 있는 자들은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제 망고땡이네. 막 살아도 되겠네. 이게 아니라 그렇구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 삶을 다 맡겨 놨으면 어떡할 뻔 했나~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 예수가 이렇게 이루어주셨대~..... 사랑하란 말이에요. 그게 말씀이 있는 자들이 삶인 거예요.

선악 구조아래서의 자신의 신분이나 성숙의 정도나 소유의 다소 등에 따라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등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그 사랑이신 예수 아들이신 예수를 아는 자들의 삶, 그걸 천국, 구원이라고 그래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자유.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서를 아들로 완성하시러 오신 거예요. 이렇게 유한과 무한의 화해를 위해서 사랑으로의 소통을 위해 예수가 오셨어요. 하느님이시며 인간, 하늘과 땅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 하늘과 땅으로 오신 공생애 사는 첫째 예수가 죽어야 율법의 일점일획이 완료되는 거예요. 하늘과 땅이 사라지면 사라질 때까지 율법과 예언서 일점일획이 완료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율법의 일점일획은 다 완성된다. 라고 성경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게 번역을 해놨지만 그게 그 얘기란 말이에요. 천지, 예수가 죽어야 율법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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