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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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 꺾어지지 아니한 뼈 (요한 19: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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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11 ㅣ No.147491

 

(공동번역성서) 2021. 6. 11 [연중 제10주간 금요일(예수성심대축일)] 도란도란글방

 

 꺾어지지 아니한 뼈 

 (요한19:31-42)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아멘.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 달라는 그런 요구를 합니다. 다음날이 과월절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거룩한 큰 날에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을 것을 요구한 것은 당시 사형수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관습에 의한 거죠?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 병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어요.

쇠몽치나 쇠몽둥이를 갖고 십자가 아래로 가서 그 사람들의 무릎을 꺾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횡격막이 막혀서 질식해서 죽는 거예요. 그러니 무릎을 꺾어버리는 거죠 근데 예수님에게 와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해요~. 대신 한 병시가 옆구리를 찔러서 피와 물이 쏟아집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 그 시신에게까지 손상을 입히는 그런 인간들의 악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악함이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도 있을 겁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두고 볼 때에 선뜻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병사들이 예수님 다리만 안꺾었냐는 거예요. 병사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을 알고 그리했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다리를 꺾는 것은 죽지 않은 죄인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죽은 죄인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는 작업이었거든요. 이건 죽은 거다,라는 확인 작업이 무릎을 꺾는 거였어요, 다리를 꺾는 거였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병사들은 죄수들의 죽음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죄수들의 다리를 다 꺾어야 돼요, 근데 예수님의 다리만 꺾지 않은 거예요. 또 하나 이상한 건 예수님의 옆구리만 창으로 찔렀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면 같이 달린 강도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는 것이 옳은데~ 예수님의 옆구리만 찔렀단 말이에요.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시켰다는 거예요.

 

(요한19:36-37)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성경이 이루어지려고 예수님의 뼈를 꺾이지 않게 하셨고 옆구리를 찔리게 하셨다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분명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다, 라는 것인데 먼저,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는다, 라는 내용은 시편 34편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시편34:20-21) 20 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하시리라. 21 그의 뼈들을 모두 지켜 주시니 그 가운데 하나도 부러지지 않으리라.

 

이 말씀대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사건이 예수님의 '의인됨' 을 보여주기 위해 다리를 꺾지 않은 거예요. 시편 34편은 '하느님께서 의인을 보호하시고 건지신다'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편이거든요? 의인은 하느님께서 뼈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뼈가 절대 꺾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근데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전부 뼈가 꺾여야 돼요. 근데 단 한 분만 뼈가 꺾이지 않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사건은 이 세상에 유일한 의인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라는 것과 그러한 의인이 세상에게 죽임을 당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분명 성경은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드디어 십자가 위에서 의인으로 증명되는 어떤 분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게 뼈가 꺾이지 않은 의인이 십자가의 대속 事役을 통하여 죽어야 할 자들을 세상에서 건지게 되는 완벽한 모형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탈출12:46) 46 어느 집이든 한 집에서 먹어야 한다. 고기를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 뼈를 부러뜨려서도 안 된다.

 

이거요.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의 과월절에 관해서 지시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희생에 의해 죽음의 과월, PASS OVER. 죽음이 그냥 넘어가는, 죽음의 과월을 그냥 경험하죠? 근데 그 어린 양은 뼈가 꺾이지 않은 어린 양이어야 돼요. 그거 꺾으면 안 돼요. 민수기에도 똑같은 지시가 나옵니다.

 

(민수9:10-12) 10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너희와 너희 후손들 가운데 누가 주검에 닿아 부정하게 되거나, 먼 길을 나선다 해도,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를 지내야 한다. 11 이런 이들은 둘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라.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파스카 제물을 먹어라. 12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되고, 뼈를 부러뜨려서도 안 된다. 파스카 축제의 모든 규정에 따라 그것을 지내야 한다.

 

율법이죠,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은 뼈가 꺾이면 안 돼요. 뼈가 꺾인다라는 것의 의미가 더러운 것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예수님의 뼈는 꺾이면 안 돼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의인이니까. 근데 성경의 다른 곳으로 가면 조금 상반된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뼈가 꺾였다는 거예요.

 

(시편51:9-10) 9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 10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게 한 뒤에 나단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지적받은 뒤에 지은 시편이죠, 다윗이 자신의 죄인된 실체를 낱낱이 고백해요. 자신은 밧세바를 범하기 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라고 이야기해요. 아예 자기는 모태에서 죄인으로 태어났다,라고 이야길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아니, 확신하고 있어요, 그 시편을 보면. 나를 깨끗케 하소서, 분명히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는 확신이 들어있어요, 그 시편에. 뿐만 아니라 그는 죄의 본질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어요.

 

(시편51:4-6) 4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5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6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

 

자기 앞에는 자기 目前에는 늘 자기 죄가 도사리고 있다,는 거예요. 보세요. 율법은 항상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데 쓰여요. 근데 자신은 하느님께만 범죄를 했다 그래요. 그럼 밧세바나 우리야는 뭐예요. 정작 피해자는 밧세바와 우리야 아닙니까? 근데 다윗은 자신이 하느님께만 범죄를 했다 그래요.

이 세상에 유일한 피해자는 하느님 밖에 없어요. 인간들은 다 가해자예요. 100프로. 그러니 죄라는 건,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인간들의 판단으로 규정되어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통용되는 개념인 거예요, 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죄라는 개념이 통용이 안돼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만 죄라는 게 통용이 되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인간 자신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행위만을 죄로 간주하죠. 인간이 최고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가리켜 죄의 증상이라고 이야기를 하지, 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죄는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그걸 죄라 그래요. 그게 유일한 죄예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죄.

따라서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 중에 저건 진짜 죄다!라고 단정하여 규정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 안 믿은 거예요. 그걸 '성령 모독죄' 라고도 이야기해요. 그것만 용서 못 받아요. 예수를 믿는다라는 건 나라는 존재의 그 무가치함과 그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죠? 근데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건 여전히 나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붙드는 행위이므로 그걸 ''라고 하는 거예요. 죄는 어기면 감옥에 가고 지키면 상을 받는, 그런 인간의 선악구조의 틀에서 해석되면 안 돼요.

아무튼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그런 죄인으로 태어나요. 선악과를 먹었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면서 용서의 근거로 제시한 게 '꺾으신 뼈' 란 말이에요. 꺾으신 뼈~. 예수님의 뼈는 분명히 안 꺾여졌는데 다윗이 꺾으신 뼈로 내가 즐겁게 해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시편51편을 보면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방법까지 묘사를 하는데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예요. 분명, 오늘 본문과 출애굽기, 민수기의 내용으로 봐선 다윗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죠? 예수님의 뼈는 꺾이면 안 되잖아요. 근데 다윗은 예수님의 뼈가 꺾이셨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세요. 그래서 그분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될 수 있어요, 그분만. 유일한 제물이에요. 하느님 앞에 용납되어질 수 있는 제물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의인은 그분 딱 한 분이니까. 그런 면에서 그분의 뼈는 꺾이면 안 돼요. 그래서 안 꺾는 거예요. 근데 그분이 우리의 죄가 되셔서 완전한 죽음으로 들어가셔야 되죠? 그분의 완전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나는 거군요,를 다윗이 안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나를 즐겁게 하소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의 뼈가 십자가 위에서 꺾이지 않으면 그분이 의인이라는 증거고 그러나 그분이 완전히 죽었다라는 건 우리의 뼈가 꺾여야 할 그 자리에서 그분이 꺾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꺾으신 뼈로 나를 즐겁게 하소서,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왜 예수님의 옆구리만 창에 찔려야 되는가. 그것도 역시 구약에 예언이 되어있는 사건이었어요.

 

(즈가12:10) 10 나는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 위에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

 

바로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병사들의 창에 찔린 거예요. 근데~ 잘 보면 예수님의 찔림을 바라보고 -찌른 자를 바라본다 그랬으니까- 예수님의 찔림을 바라보고 슬퍼하는(哀慟), 그런 자들은 무얼 바라보게 된다 그래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라 말하고 있잖아요.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이 찌른 자를, 예수를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찔려 돌아가신 분을 위해 애통하게 된다,라는 거예요. 근데 그 애통이 어떤 애통이냐 하면 독자를 잃어버린 애통. 그리고 장자를 잃어버린 애통과 같을 거라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를 받으셨죠. 은총이 은혜에요. 그러면 하느님의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된다 그래요? 내가 예수님을 찌른 자구나~를 직시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애통(哀慟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어느 정도로 애통하게 되냐면 내 맏아들이 죽었을 때처럼 애통하게 된대요. 진짜 그러시냐고요.. 맏아들이 아직 안 죽어봐서 모르죠. 그게 얼마나 슬픈지~?

그러나 이렇게 추측해 보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가히 짐작이 가시죠. 근데 내가 예수를 찌른 죄인이라는 것이 그 정도로 여러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나요? 그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마태5:4)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슬퍼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펜떼오' '울부짖다, 통곡하다' 란 뜻이에요. 자기 자식이 죽었을 때 세상에 이런 악당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내 자식입니까.라고 부르짖을 때, 그때 쓰는 단어가 애통이에요, 펜떼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 찔린 모습을 보고 애통한다라는 건 "이 세상에 진짜 악당은 난데 왜 예수가 죽어야 됩니까?"라는 인식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게 애통이에요. 되지도 않는 눈물 질질 짜면서 괜히 쇼하는 거 말구~.

진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절실하게 자각을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당장 지옥 가야 되는데 ...왜 그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는가. 그걸 고백하는 걸 애통이라 그래요. 그게 되냔 말이에요. 잘 안되잖아요. 그걸 성취해 가는 걸 '하느님의 열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성도는 뭔가 업그레이드 되어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개발이 되는 게 아니라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아가는 그 자리로 성숙되어져 가는 거예요, 성도는요.

그러니까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이 우리를 죄인으로 계속 해석하여 우리 마음속에 심어줘야 해요, 그 해석을.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그것은 교만으로 쌓이게 되지만 성경이 나를 읽을 때 우리는 회개하게 된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열심히 성경 배워서 지키겠다고 난리예요. 지켜지냔 말이에요. 그게~.

지키긴 지키죠, 약발이 있을 때까지만. 하느님이 고작 그런 걸 요구하시겠어요? 예수의 피를 부어서? 아니란 말입니다. 그 예수만 의지하라고. 그분의 공로만 의지하라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거란 말이에요.

 

멍하니 살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은혜가 폭력적으로 뚫고 들어온 거 아니에요, 우리 안에. 그러면 그때부터 시작될 게 뭐냐고요. 왜 나에게 은혜가 폭력적으로 뚫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때부터.

그러니까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가 인제 드러나기 시작한다니깐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요. 성령이. 성령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받지만 그때부터 죄가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처절하게.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금방 성자가 되는 게 아니라 점점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져야 맞아요.

 

성당에 너무 잘난 인간들이 많아 가지고 밖에서 예수를 믿고 싶어 하는 진짜 죄인들이 차마 못 들어와. 이런 내가 어떻게 그 성당에 들어가서 미사(예배)를 드리냐고.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하러 왔다고 하는데 성당에 죄인이 없어요. 전부 의인들만 있어. 성당 안에.

아니라니까요, 건강한 교회는 죄인들이 죄인으로 폭로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예요. 아세요? 근데 오늘날 교회는 근사하게 위장을 잘하면 잘할수록 좋은 교회가 된다니깐요? 아니란 말입니다.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7:21-25)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데 뭐가 감사하다는 거예요, 지금? 그대로 놔뒀으면 죽었을 건데 이런 상태인 나를 하느님이 건져주셨으니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게 고쳐졌다는 게 아니라 나는 계속 그 상태로 폭로가 되는데 하느님이 그분의 의로, 당신이 마련하신 의로 건져주셨다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감사하리로다." 가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 한탄하다가 갑자기 감사하리로다.

애통함은 나의 죄로 인해서 의인이신 예수님이 죽으셨음에 대한 신자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진정한 애통함이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에서 자비하심, 은혜를 보게 되고 거기서 기뻐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애통과 감사와 기쁨은 함께 움직이는 거예요.

이렇게 하느님이 신자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면 신앙에 열심이 생겨서 교회 일에 착한 일에 더욱 부지런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내가 찌른 분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근데 지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병사에 의해 옆구리를 찔렸어요. 왜 찔렀겠냔 말이에요. 너희들이 찔렀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즈가랴서의 그 내용을 십자가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시는 거예요. "교회들아, 너희들이 찔렀다는 거 알아?" 물어보시는 거예요. "진짜 알아?

정리를 하면 하느님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게 하심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죄인된 자를 위해 보내신 의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거고요.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가 의인을 찌른 자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진심으로 은총을 받고 간구하는 심령을 받은 신자라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찾기 이전에 자신의 죄인 됨을 직시하면서 애통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 애통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먼저 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값없이 건져주신 십자가 복음 안에서 풍성한 하느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지금 은총을 받고 내가 찌른 자를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찔렀군요.' 내가 찌른 자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애통하고 있단 말입니다. 근데 그 애통과 함께 "부자 되게 해주세요, 소원 들어 주세요." 이게 같이 나올 수 있는 거냐고요. 상식적으로. ? 이 애통이 없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그 말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마태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의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하느님께 헌신해야 된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걸까요? 그건 아닐 거 아닙니까. 근데 우린 여태까지 그렇게 배워왔죠? '아리마태 요셉은 모두가 다 무서워서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받으러 갔다! 그러한 목숨을 건 순교자적 신앙생활을 본받자.' 그런데~ 계속 십자가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거기에서 갑자기 이런 얘기 튀어나오면 맞냐고요, 그게. 문맥상. 아닐 거 아닙니까,

 

(요한19:38-39)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아리마태사람 요셉이 제자였대요. 제자가 그 살벌한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러한 요셉의 요구를 보면서 너무 서둘러서 '죽음까지도 각오한 요셉의 용기를 본받자'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그건 큰 착각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리마태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하여 성경이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그와 같은 사람 중심의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그것을 숨겼던 사람이라고 요한은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지금 아리마태 사람 요셉에게 돌아갈지도 모르는 독자들의 관심을 일부러 지금 끌어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는 겁쟁이였다는 거예요. 똑같은 병행 구절이 있는 마르코복음으로 가 보겠습니다.

 

(마르15:43) 43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사람이었어요,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집단입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어떤 사람의 사형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만장일치로 의결을 했다라는 것을 생각할 때, 감안할 때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형 결정 때에도 아무런 반대도 하지 못 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죠.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는 표현도 그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그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엉뚱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던 자였음을 나타내는 거예요. 당시에 유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하느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직접 하느님 나라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나라를 못 알아봤죠.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왔다" 그랬잖아요. "하느님 나라가 어딨습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 없이 너희 가운데 이미 와 있다" 이야기했단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실레이야는 통치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성경이 뭘 얘기하려고 하냐면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의로운 행위도 그게 죽은 예수에게 행하는 것이면 꽝이다,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 죽은 예수에게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시체 가져다가 몰약과 향품으로 잘 싸서 멋지게 장사 지내주는 거예요. 그리고 무덤에다가 놓고 뚜껑 닫는 거. .

 

아리마태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어요~. 그럼 그가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해야 된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 하는 신앙인으로서 그가 부활을 믿은 자라면 예수님의 시체 가져다가 무덤에다 갖다놓고 문 닫으면 안 돼요. 장사 지내면 안 됩니다. 집에다 갖다 모셔놨어야죠.

살아날 건데, 이제 곧 살아날 건데. 왜 무덤에다 갖다가 넣냐 말이에요. 그는 부활을 안 믿었어요. 아직 성령이 내려오기도 전이에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기도 전이고~. 그때에 인간들이 내놓는 행위를 한번 보란 말이에요. 굉장히 멋지잖아요. 목숨까지도 걸어요~. 근데 하느님이 그거 카운트 안 해 주신다, 란 뜻이에요. 인간의 구원은 그러한 인간측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은 성령 강림! 거기에서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사 53:9)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여기서의 부자가 바로 아리마태 요셉인 거예요. 그는 그저 하느님이 교회에게 던지시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등장인물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니깐요?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예요.

요한이 굳이 니고데모를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라고 그의 연약했던 모습을 폭로하죠. 아리마태 사람 요셉이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숨었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그게~. '밤에 찾아왔었던' 살살 숨어서 왔다라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똑같은 그의 연약함을 폭로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19:39)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렇게 요셉처럼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몰래몰래 숨어 다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이나 가져왔대요. 그건 33kg 정도 되는 거거든요? 33kg면 엄청난 거예요. 그때 당시의 왕, 임금들의 장례 때나 쓰는 그렇게 엄청난 양이에요. 그걸 니고데모가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왕처럼 장사지내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아리마태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은 믿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니 몰약과 침향을 예수님과 이렇게 둘둘 말아서 아예 그냥 꽁꽁 묶어서 무덤에다 갖다 처넣은 거예요. 니고데모와 아리마태 사람 요셉이~, 다른 사람이 그런 게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냥 죽은 시체예요. 그러니 그들이 슬픔 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거예요. 그처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슬픔과 염려와 걱정 밖에 없어요. 그래서 슬퍼할 일에 슬퍼하고 염려할 일에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그 염려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열심을 부리는지 아세요? 목숨을 건 종교 행위와 착한 일, 선한 일에 목숨을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그분이 나에게 행한 일이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죽었거든요.

信者에게 있어서 현실에 불어닥치는 현상이나 사건들은 영원이라는 종착역으로 가는 긴 선 안에서의 작은 점들에 불과한 거예요. 그걸 절대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료해 놓으신,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의 현장으로 우리를 지금 끌고 가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분이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신 분이에요. 모든 것이 끝이 난 게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는 세계를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오늘날의 성도라는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염려, 똑같은 행복추구, 똑같은 슬픔, 똑같은 안전. 이런 걸 추구하면서 산단 말입니다. 그게 아리마태 요셉과 니고데모의 열심인 거예요. 예수님을 죽은 자 취급하는 뒤늦은 열심. 그건 목숨을 건 열심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 절대 카운트가 안되는 거예요.

신자의 구원은 성령이 오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장사한 최선의 봉사로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생명의 나라라는 걸 아리마태 요셉과 니고데모를 딱! 등장시켜서 대척점에서 대조시켜 주는 거예요. 이런 행위로도 못 들어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 못 받았다 이런 얘기 아니에요, 그런 거에 관심 좀 갖지 마세요, 제발.

 

,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계속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자신의 일을 행하고 계신다면 인간의 모든 공로는 꼬리를 감추어야 돼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에 견줄 인간의 봉사나 충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요셉의 충성스러운 행위까지 예수님의 공로 앞에서는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이 함께한 세계인 거예요.

예수님은 죽고 없는 게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세요.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동행하고 계세요. 따라서 신자가 예수님을 죽고 없는 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거예요.

우리 희망을 이루는 이 현실, 이 희망은 언젠가 완료된 소망이 쭉 내려와서 탁! 덮쳐지게 됐을 때 그 더럽고 왜곡된 것을 싹 뺏겨요, 희망한테. 그게 하느님 나라의 연속성과 단절성이라는 건데 우리는 분명히 이 육신의 틀을 갖고 이거와 완전히 다른 어떤 이상한 외계인처럼 부활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인간처럼 부활하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봤을 땐 알아봤고 어떻게 봤을 땐 못 알아봤어요. 연속성이 있다라는 거예요.

예수로 풀리지 않는 성경은 다 가짜예요. 그래서 그 예수님 십자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 이름이 온통 마리아인 거예요. 마리아밖에 없어요, 그죠? 다른 사람들도 있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름을 얘기 안 해요. 그냥 마리아만 얘기해버려요.

 

(마태 27:55-56. 59-61) 55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56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59 요셉은 시신을 받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싼 다음, 60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나서,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고 갔다. 61 거기 무덤 맞은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요한 19:25)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왜 성경이 십자가 주변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하나도 밝히지 않으면서 유독 마리아란 이름만 반복하여 기록을 하는가. 이 마리아라는 이름은요, 히브리어 [메리]에서 파생된, 히브리 여자들의 흔한 이름이에요. 그 마리아라는 이름의, 히브리식 표기가 미리암이에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죠. 미리암, 모세의 누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문둥병이 걸렸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 그게 마리아에요. 그리고 그 단어들은 전부 히브리어 [마라]에서 파생이 된 거예요. 근데 그 히브리어 [마라]'쓰다', 비러니스 bitterness. '사용하다'가 아니라 쓰다, 아우 써! 그럴 때. '쓰다' '불순종하다', '반역하다', 이런 의미의 단어에요.

 

(틸출15:23-25) 23 마침내 마라에 다다랐지만, 그곳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다. 24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 하고 불평하였다.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마라의 쓴 물 사건이에요. 쓴 물에 나뭇가지가 던져지니까 단 물로 변했어요. 거기에 마리아가 등장하는 거예요, 마라가. 이게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지는 이미 눈치를 채셨을 거예요.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변에 왜 마리아라는 이름만 등장하는지 아시겠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나뭇가지 주변에 수많은 마라, 마리아가 있어요~. 그들은 모두 불가능하고 패역하고 희망 없는 자들의 상징인 거예요. 목말라 죽게된 자들~ 마라의 쓴 물~ 못 먹어요. 그래서 내가 목마르다 그런 거란 말이에요.

그 목말라 죽게된 자들 마라, 마리아들이 온통 둘러서 있는데 그들은 그 고통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해산하는 여인들과 같은 존재들이에요. 근데 그 신음 가운데 그 쓴 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나뭇가지가 던져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쓴물들이 단물로 변해 버리는 사건~.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마리아의 이야기인 거예요.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이 마리아인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그 마리아가 예수를 낳는 거예요. 그 이야기 어디서 봤어요. 여자가 예수를 낳는 요한묵시록에서 보셨잖아요. 그 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의 어머니 이름이 마리아인 거고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을 마리아들이 둘러싸고 있는 거예요.

그 마리아들이 결국 예수를 낳더라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는 그림은 쓴 물인 교회가 예수를 낳고 결국 작은 예수로 완성이 되는 구속사 전체의 그림을 요약하여 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리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과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 거예요.

약속의 후손을 낳는 어미들이 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를 낳잖아요, 사라도 그렇고.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예수를 낳을 수 없다. ,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수가 나오는 거예요, 마리아에게서.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가 하늘로부터 가입을 하여 마리아라는 여자들이 예수라는 아기를 낳게 되는 건데 그 방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쓰여지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을 돌아가시기 전에 요렇게 표현을 하고 가신 거예요.

 

(요한16:20-21)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여기서 지금 여자가 누구예요, 제자들을 가리키는 거죠 -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얘길 했더니 제자들이 굉장히 힘들어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너희들은 나를 잃으면 애통할 거야,라고 이야기를 해놓고 그걸 여자가 해산한 것으로 비유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자의 해산으로 비유!를 하고 계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도 여자가 해산을 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 낳으면 구원받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게 이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동안 이해가 안 갔던 해산에 관한 이야기들이 쫘~악 풀리죠?

 

열두 제자는 항상 열두 지파, 교회를 상징하는 거라 그랬어요. 그러까 교회가 해산을 하게 되면 근심을 하나,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 이야기인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교회가 낳는 아이라고 표현을 하고 계세요. 즉 마리아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가 죽으시는 것을 교회가 아이를 낳는다라고 한단 말입니다.

결국은 아이가 엄마를 다 먹어버리고 새 생명으로 탄생되는 거예요. 그게 또 예수를 낳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는 건 교회 때문에 예수가 오셨다,라는 말도 되지만 그 예수에 의해 우리가 작은 예수화 되어 결국은 예수로 완성이 된다. 하느님의 자녀로 완성이 된다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여자)는 예수를 낳는 거예요. 아이를 낳는 거예요. 그게 해산이란 말입니다.

근데 그 과정이 해산의 고통처럼 힘들어요~. 여자들 애 낳을 때 거반 죽었다 살아나거든요. 죽음에 가장 가까운 경험을 하는 게 여자가 애 낳을 때 고통이래요. 성도의 신앙생활이 바로 그 삶이라니깐요? 근데 왜 그렇게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고통을 겪게 되냐고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폭로될 때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단 말이에요. 내가 이제 그게 뭔지를 알기 때문에.. 거기서 애통이 나오는 거고 그 애통이 감사와 기쁨으로 화하는 거예요.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그 현실을 이렇게 또 표현도 하죠.

 

(이사54:1) 1 환성을 올려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비명) 소리쳐라, 즐거워하여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아들들이 혼인한 여인의 아들들보다 많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희들아~ 노래할지어다. ?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여 너희들에게서 반드시 예수를 낳게 할 거니까. 근데 누구에게서만 그 예수가 날 수 있냐면 나는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자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이 있는 자들. 그래서 약속의 후손을 낳는 이들이 전부 불임여성인 거예요. ^^.

그러니까 십자가와 그 주변에 있는 마리아들은 전부 누구를 가리키는 거예요? 나예요, . 바로 우리 교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위에는 단 하나의 이름. 마리아만 등장하는 거예요.

 

(이사7:14)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이 낳아지면 어떻게 된다고요? 살아서 우리에게 붙어있단 말입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실지어다! 임마누엘이에요, 그게. 그래서 그 살아계신 하느님, 부활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 거예요. 우릴 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를 보신다니깐요? , 그렇게 예수님 십자가 주변에 즐비하게 서 있던 마라, 마리아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세요. 마라, , 불순종한, 괴로운. 이 마라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세요.

 

(마태 28:1-8) 1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3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4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7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8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십자가와 부활로 고통 속에, 절망 속에, 좌절 속에 있던 마리아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들려왔고요. 그들이 큰 기쁨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하러 달려갔어요. 마라가 예수의 부활로. 예수가 낳아짐으로 말미암아.

시편 2편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걸 갖고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의 몸으로 예수님이 첫 번째, 첫 열매로 등장하신 게 '낳은' 거예요. 하느님이 낳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첫 번째 부활의 몸인 예수가 누구 때문에 부활을 한 거냐고요. 교회 때문에. 그러니 예수는 교회가 낳은 거란 말이에요. 낳았더니 기쁨! 마라가 기쁨을 갖고 그 기쁨을 전하러 튀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되는 거예요. 이걸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그 무덤 문을 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야 돼요.

보세요. 무덤 안에 무덤을 통과해야~ 그 안에 천국의 현실이 펼쳐지는 거예요. 무덤을 통과해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천사들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돌아봤더니 그 안에 예수가 있었단 말입니다. 우리의 예수님, 주님과 천사들이 있는 곳이 어디예요?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무덤을 열고 들어갔더니 그 무덤 저편에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있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옛사람의 무덤을 통과해야 돼요. 그래서 매일 죽는 거예요. 매 순간 죽어가는 거예요. 나중에 무덤 문 딱 열면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쫙 펼쳐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제 곧 죽음으로 떨어지게 될 수많은 마리아들을 위해서 예수가 탄생하신 거예요.

그리고는 당신에게 맡겨진 모든 사명을 다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테 텔레스타이'. 다 이루심을 선언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나라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묵시록 12장에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거죠.

 

(묵시12:1-6) 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교회)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여인이 천이백육십 일 동안 보살핌을 받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그 게 우리 인생이에요. 이 광야 같은 인생 동안에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양육 받는 거예요. 배우는 거예요. 1260일이 뭐라 그랬어요, 삼년반, 42개월, 우리 인생이에요. 역사라는 거예요, 다니엘서 9장에 있어요

이렇게 예수님은 수많은 마리아들의 영생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결국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셨어요. 그러한 온전한 예수님의 사역(事役)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온 것이지. 우리가 무언가 업적과 공로를 보태어서 구원을 성취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말씀과 삶을 통해서 절절하게 경험하고 하느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자신의 죄인됨을 폭로당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배우는 과정을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애통해 하세요. 그리고 거기서 감사와 기쁨을 격발시켜 내는 거예요. 절대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도움 받아서 세상의 것들을 많이 얻어내고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아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위대한 약속을 받은 그 강도? 다리몽둥이 뿌러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그거 안 막아 줬다니깐요? 몽치로 무릅팍 부수는데 예수님이 그거 안 막아 줬단 말입니다. 이왕 낙원에 들어갈 거면 좀 지저분하지 않게 그런 것도 좀 막아주고 가면 안 돼요? 왜 그 강도의 다리가 꺾여졌다는, 뼈가 꺾여졌다는 내용이 굳이 성경에 나왔는지 아십니까?

"구원 받은 강도들아~!!" 우리가 바로 그 구원받은 강도거든요. "구원 받은 강도들아~. 전부 하느님 껀데 마치 지 껏인 양, 지 몸부터 시작해서 지 소유를 그냥 다 지 껏인 양 누리며 살았던, 이 강도들아. 너희들은 이 땅에서 그렇게 죽음의 확인, 뼈가 꺾이는 고통을 당해봐야 왜 예수가 너희들을 위해 뼈가 꺾여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건 다 하느님의 섭리 속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견뎌야 돼요. 살아내야 돼요. 그거 없애달라고 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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