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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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 1696] 노엘 성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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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몬 [simonhan] 쪽지 캡슐

2002-12-02 ㅣ No.1697

 주님의 평화!

 

질의하신 노엘 성인은 성인록에 보면 노엘 피놋트(Noel Pinot)에 대해서만 설명이 나와 있는데 이 분에 대한 해설은 참고로 아래에 올려드립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마도 님께서 질문하신 그 노엘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런데 노엘이란 말은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군요.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라는 노엘의 세례명을 가지신 분의 축일은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므로 이날을 축일로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다음의 해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크리스머스(Christmas)란?

 

◇ 크리스머스라는 말의 뜻 ◇

 

크리스머스(Christmas)라는 말의 어원은 중세기에 사용되던 크리스떼스마쎄(Christes Masse)라는 말에서 생겼다. 이 말은 중세기에 사용되던 영어로서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이다. 따라서 크리스머스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특히 사용되는 말이고 프랑스에서는「노엘』 독일, 스위스 등에서는『거룩한밤』(Weihnacht)이라고 불리운다.

 

* X-mas는 희랍어의 키(X)자인데 그리스도라는 고유명사의 첫글자가 X 이므로 후에 그리스도교에서는 X 를 그리스도를 표시하는 약자로 사용했다.

 

◇ 크리스머스 유래 ◇

 

초세기에는 크리스머스가 없었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생일보다 사망일을 더욱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께 대해서만은 특히 그 생일을 특히 경축하게 됐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에서 마니교도(Manichaei=2원론을 주장하는 교파로서 3세기부터 5세기사이에 페르샤 근방에서 성하였음)의 교리에 대립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근거는 없고 다만 4세기에『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가 크리스머스에 관한 애기를 하고 있으며 『요한 크리소스트모』는 380년경 이에 언급하여 말하기를 오랫동안 내려오는 풍속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5세기초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탄을 대축일로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 크리스머스의 날짜 ◇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자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여러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모두가 확실성은 없다. 그리고 팔레스띠나에서의 12월경은 강우기로서 비가 많이 오므로 들에서 양떼를 수직하는 일(루가 2장)은 거의 불가능하여 예수의 탄생일을 12월로 보는 것도 확실치 못하다. 그러나 354 년 로마의 리베리우스 주교는 12 월 25 일을 예수의 생일로 판정하였고 그 해 로마의 축일표에도이 날이 예수의 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5세기초에 역시 그와 같은 날짜를 예수 성탄 축일로 정식 선언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유스띠니아누스 황제(483∼565)는 예수의 탄생 날짜에 대해 칙령을 내려 여러가지 설을 폐기하고 12월25일로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이 날이『크리스머스』가 되어 세계적인 최대의 축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 싼타 크로스란 말의 유대 ◇

 

「크리스머스』에는 꼭 『싼타크로스』가 따르는데 『싼타크로스』란 말의 유래을 알아보자. 『싼타크로스』는 270년 소아시아 지방 리치아(Lycia)의 빠따라(Patara) 시에서 출생한 『니꼴라오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자선심이 지극히 강하였던 사람으로서 후에 미라(Myra)의 대주교가 되었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쌍뚜스 니꼴라우스(Santus Nicolaus)인데 홀란드 사람들은 『싼 니콜라우스』(San Nicholaus)라고 불렀고 특히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화란인들은 싼떼 끌 라아스(Sante Klaas)라고 불렀다. 이 발음이 그대로 미국어화 했고 어린이들이 더 정답게 부르게 되어 『싼타크로스』로 변하게 된 것이다.

 

노엘 피놋트 Noel Pinot 1794

축일: 02-21 순교자 프랑스

성 노엘 피놋트, 순교자(1794년 순교)

 

축일 : 2월 21일

 

그는 프랑스의 앙제르 출신으로 교구 사제였다. 그는 한 두 본당의 보좌를 거치는 동안에 병자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으로 존경받는 사제로 통하였고, 1788년에는 루루-베코네 주임사제로 활약했는데, 그의 뛰어난 열성과 신심은 영적인 많은 결실을 맺었다. 1790년, 루이 16세에 의하여 반포된 소위 "성직자의 시민헌법"은 가톨릭의 체제를 뿌리부터 흔든 악법이었으므로 많은 성직자들이 반대하고 일어섰다. 물론 노엘 신부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앙제르 법원에서 2년 간의 자격박탈을 강요당하였으나, 비밀리에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윽고 방데 지방의 봉기가 어느 정도 성공했을 때, 그는 공식적으로 활동을 재개하며 항거하기 시작하던 중, 재차 체포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Blessed Noel Pinot M (AC)

(also known as Natalis)

 

Feast Day: 21st February

 

Born at Angers, France, in 1747; died 1794; beatified in 1926. Noel was ordained a priest in 1771 and labored as a parish priest in Louroux-Beconnais until the outbreak of the French Revolution. When he refused to take the oath recognizing the 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 he was ousted from his parish, but continued to minister to his flock. At first he was secretive about this ministry. Then he grew bolder. In 1794, he was captured when vested for Mass and guillotined--still wearing his priestly vestments (Benedict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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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Noel Pinot

Feastday: Febuary 21  

 

 

Blessed Noel Pinot, Priest and Martyr (Feast - February 21) Noel was born at Angers in 1747. He became a priest and excelled in ministering to the sick. In 1788, he was made pastor at a parish in Louroux Beconnais, which he revitalized spiritually through his piety and preaching. In the wake of the French Revolution then in progress, priests were required to take an oath that went against the principles of the government of the Church. Father Noel refused to take it and was sentenced to be deprived of his parish for two years. Nonetheless, he continued to carry out his ministry in secret. Later, the holy priest even took clandestine possession of his parish and continued his pastoral work, managing to avoid capture for his defiance of the Revolutionary edict. However, one day while fully vested for Mass, Father Noel was captured and dragged through the streets to the jeers of hostile spectators and soldiers. He remained in jail for twelve days and was given the death sentence for refusing to take the oath. The holy priest went to the guillotine still vested for Mass and uttering the words that began the pre-Vatican II Mass: "I will go to the altar of God, to God who gives joy to my youth." He joined his sacrifice to that of his Master on February 21, 1794, and was beatified in 1926. Confronted with a choice of taking a false oath or facing death, Blessed Noel placed his trust in Christ and his redemptive sacrifice rather than in the leaders of the French Revolution. His action cries out for us to obey God rather than human be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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