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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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의식과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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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silver0824] 쪽지 캡슐

2016-05-01 ㅣ No.104093

 

 

 




2015년 다해 부활 제6주일


<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복음: 요한 14,23-29







그리스도(Young Jew as Christ)


렘브란트 작, (1656), 베를린 국립 박물관


< 죄의식과 성령님 >

 

얼마 전 대학동창들을 만났습니다. 각자가 가장으로서 이 힘든 세상을 열심히들 살아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몇 번이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삼용아, 너 정말 걱정 있는 거 없냐?”

세무사 사무소도 제법 큰 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요즘 우울증이 오는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사제이니 신앙을 가지면 자신도 신앙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 특별한 걱정은 없는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네가 노력해서 된 거냐, 아니면 네가 믿는 하느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냐?”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행복은 내 힘으로는 얻어낼 수 없어.”

그랬더니 무언가 결심하고 뒤돌아섰습니다. 온 가족이 신앙의 힘으로 행복의 길로 들어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우울한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성령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왜 우울해지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분명 성령을 통하여 평화와 기쁨을 남겨놓고 가셨는데도 말입니다. 우선 우울함이란 천국보다는 지옥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에 의하면 지옥에는 4가지의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옥불의 고통이고, 두 번째는 자신 때문에 지옥에 온 사람들의 미움과 괴롭힘 때문이며, 세 번째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고, 마지막 네 번째로는 하느님과의 관계단절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옥의 고통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양심의 가책으로 오는 것이 우울함과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하고 싶다는 마음부터가 벌써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이 고통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거의 지옥의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돈도 많고 여자도 많고 인기도 많으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적인 행복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이는 마약과 같아서 순간적으로 기쁨에 다다르지만 그 쾌락이 자꾸 줄어들어 불안하게 되고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해 온 몸과 정신이 피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쾌락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든 대부분의 시간이 우울합니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그리고 이전의 양만큼으로는 절대 전에 느꼈던 쾌락의 수치에 도달할 수 없음으로 집착하고 중독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빼앗기고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며 죄의식 속에서 몸도 마음도 병들어가고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또한 아파하는 것을 보면서도 다시는 그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에 더 고통 속으로 빠져듭니다.

 

마리노 레스트레포의 증언이란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14살 때 고해성사 보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로 여겨져 그 이후로 미신에 빠져 윤회설을 믿게 되고 기나 점성술 등에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미국에서 영화에 출연하며 돈을 많이 벌 때 가족들을 조롱하듯이 자신들이 주술적 이유로 집안에 장식한 물건들을 보여주면 그들이 성호를 긋고 멀리 도망가는 것을 보며 비웃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형제 한 명이 사망하여 콜롬비아로 돌아왔을 때 무장 강도들에게 납치당하게 됩니다. 그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여 돈을 많을 것을 예상하고 그를 잡아 감금한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싶은 환경에서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습니다. 15일을 무시무시한 동굴에서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며 그동안 대단하게 생각해 왔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바로 그날 밤 주님은 그에게 8시간 동안의 환시를 보여주시고 정말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저도 교의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지만 참으로 어려운 신학적 문제들을 쉽게 설명하는 것을 보고는 그의 증언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성령의 역할입니다. 그는 환시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멀리 산 위에 계신 예수님이 마리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깊은 늪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당장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꽃동산으로 가고 싶었지만 허리까지 찬 그 늪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늪이란 바로 죄의식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자신은 어둠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어 자신은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현존 앞에서 버틸 수 없음을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인 것을 알고 그분께 가면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합당하지 못한 자신 또한 알게 되어 지욱에 머물러야 하는 그 고통이 곧 지옥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일상에서 이런 지옥을 얼마나 자주 체험합니까? 바로 죄를 지을 때입니다. 이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두렵고 그런 것들이 밝혀지는 것은 더 두려워 거짓말을 해야 하며 그런 상태로 죽으면 지옥 갈 것을 알면서도 점점 더 그 죄에 빠져가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숨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시지만, 죄를 지은 이상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분 앞에서 당당해 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때 예수님도 아닌 천사를 보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기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도 타볼산에서 그분의 신성을 조금 체험하고는 두려워 초막을 지으면 좋겠다고 헛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의 현존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리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런 분 앞에 서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부터 조금씩 죄를 줄여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 현존 앞에, 즉 천국에 머물 수 있는 밑천이 되는 것입니다.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과 같이 깨끗하게 살고 그분을 열렬히 원했던 이들이라야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제가 보좌신부로 있었던 성당에서도 한 연로한 자매님이 감동적으로 세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서 낙태를 장려할 때 하루에만도 60명의 아기를 낙태시킬 정도로 죄를 많이 지은 전직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물론 돈은 엄청나게 벌었지만 죄의식을 이길 수 없어서 얼굴이 비뚤어지고 몸이 굳어져서 침대에서만 3년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밑에 층에 살았던 자매님이 우연히 그 자매님을 보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십니다라는 말을 해 주셨고 그 희망에 그 자매님으로부터 가정에서 교리를 배우고 결국 걸을 수 있게 되어 당당히 걸어 나와서 성당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층에 있는 자매가 그 할머니를 만나 주님의 자비를 전하지 않았다면 그 할머니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비록 멀리 떠날 것이지만 당신과 우리를 중재할 성령님을 내려주실 것인데 그분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혼자 활동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담을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 사람을 통해 당신 자비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마리노에게는 성모님께서 그 역할을 하셨습니다. 희망이 없어 늪으로 점점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성모님께서 끝까지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희망을 다시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서 성령을 전해주어 주님을 찬미하게 하셨듯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도 임하시어 이웃에게로 당신 자비를 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등을 떠밀고 계십니다.

마리노는 다시 깨어나 5개월 넘게 그들에게 극심한 고통과 고문을 당했지만 지옥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게 여겨졌고 오직 고해성사 한 번만 하고 죽게 해 달라고만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보았음에도 ? 그러면 대부분 죽이는데도 - 기적적으로 그들은 순순히 그를 살려 주었고 그는 당장 달려가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남겨놓고 가시는 평화와 기쁨입니다.

 

도조를 받아오라고 보낸 하인들을 때리고 조롱하고 죽이기까지 한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주인은 마지막 남은 외아들을 보냅니다. 외아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99%는 자신의 외아들까지 죽일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냅니다. 그 외아들이 성령을 담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와도 우리는 여전히 또 죄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그분을 우리 안에서 또 죽이지만 하느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당신 아드님을 또 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당신 생명과 같으신 아드님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할 준비가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아직까지 죄의식에 묶여 살면 그 죄의식 때문에 또 지를 짓습니다. 죄를 잊기 위해 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하인들이 아들까지 죽인다면 주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들을 싹 쓸어버릴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미 하인들을 죽인 상태라 어쩔 수 없이 아들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을 보낸 것이 그 이전의 모든 죄를 잊겠다는 표징임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살았을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것을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참으로 성령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지니고 오시기에 성령님을 모신 이들은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래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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