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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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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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5-05 ㅣ No.111859

 

2017년 5월 5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 9,1-20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복음 요한 6,52-59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생존해 계셨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대학에 가셔서 학생들을

향해 특강을 하셨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의 이야기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곧바로 봉사단을 결성해서

수녀님께서 계신 캘커타에서

봉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수녀님께 어떻게

캘커타에서 봉사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무척 기쁜

마음으로 감사해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일부러 캘커타까지

오지 않아도 돼요.

먼저 여러분이 있는

자리의 ‘캘커타’에서

기쁘게 살아가세요.”
어느 특별한 곳에서 봉사하고,

어느 특별한 곳을 가야지만 주

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것만

같은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지금의 내 자리를 특별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이

스라엘에서 행하신 모든 말씀과

행적이 지금의 삶에서도 계속해서

살아있는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갑곶성지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잊지 않고

 드리는 말씀은 여러분의 자리를

‘성지’로 만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순교자들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곳 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내 자리를 성지로

만든다면 그만큼 주님의

위로와 힘을 받는 장소가

넘쳐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이 과거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니라,

과거의 모습을 통해 지금이라는

현재를 특별한 시간으로 만드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모든 말씀 역시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한

시간으로 만드는 특별한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시지요.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

그 자체로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지요.

우리가 식인종이 아니니

어떻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의 귀에 대고 하시는

말씀도 직접 들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는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통해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 몸으로

모시게 됩니다.

그래서 비록 주님의 모습을

 직접 뵐 수는 없지만 지금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시고

있는 특별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을 특별한 시간,

지금 내가 있는 자리를

특별한 장소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고 있었을까요?

또한 지금 내가 있는 자리를

어떤 곳으로 만들었을까요?

 특별한 관계와 특별한 자리를

 이제는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에이브러햄 링컨)

가파르나움의 회당 자리.

"균형점"

“어느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바싹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떨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추위에 견딜 수 없어

다시 한 덩어리가 되었지만,

가시가 서로를 찔러 다시 떨어졌다.

이처럼 그들은 두 악 사이를 오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상대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발견했다.”
이 글은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여록과 보유’

있는 글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 고슴도치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홀로 있는 것과 함께 있는 것

사이에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우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적절한 균형점을

찾았을 때, 비로소 가장 큰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홀로 있는 것’ 때문에

힘들다 말하고, 또 누구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홀로 있는 것이 힘들다고

혼자 있으려는 시간을

갖지 않으려 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혼자만 있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홀로 있는 것이나 함께 하는 것

모두가 내게 있어서

중요한 시간인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앞선 고슴도치의 이야기처럼

혼자만의 시간도 가져보고,

또 함께 하는 시간도 가져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상대방 역시

이러한 시간들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독단과 획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또한 함께 하는 것을 어렵다고

 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 역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과정 안에서 분명히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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