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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 크로노스에서의 고난이 카이로스 에서 영광이다 (로마 8,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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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5-30 ㅣ No.147225

 

(공동번역성서) 2021. 5. 30. [삼위일체 대축일] 도란도란글방

 

 크로노스에서의 고난이 카이로스에서 영광이다

(로마 8,15-18)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헬라 사람들은요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어서 구분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시간이 그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구분이 되어 등장이 됩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 크로노스는 가만히 있어도 그냥 흘러가는 그냥 자연적인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을 말해요.

, 달력의 시간, 객관적인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연대기적 시간 수평적 시간. 그것을 크로노스라 그러죠? 그 시간은 천문학적으로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이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낮과 밤을 알려주며 봄여름 가을 겨울을 알려주고 우리의 육체를 늙게 하고 죽게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늙는 거지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반면에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목적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포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이에요. 그에 의해서 해석되는 시간. 바꾸어 말해서 그 카이로스는 영원한 시간. 정말 그 실존적 시간, 진짜 시간. 수직적 시간이라 할 수 있어요. 현재만 있는 수직적 시간. 보편적 인간 일반이 육신으로 감지하는 그 시간이라는 거, 크로노스의 그 시간이라는 건 비록 흘러가는 거지만 그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 그 의미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에 의해 하느님과의 그 접촉점이 생성되는 고 시점의 그 실존 있죠? 그들에게서 인식될 수 있는 그 의미 있는 시간. , 이게 그건 거야? 라고 깨달을 때 고 시간, 고걸 카이로스라고 해요.

사실은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렇게 흘러가는 거가 아니에요. 시간이라는 건 사실은 그 묵시에서 우리 쪽으로 더 미래에서, 굳이 말하자면 Eschatology(종말론)이죠. 그 완성되어 있는 묵시, 거기에서부터 이게 뭔 줄 알아? 라고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하느님의 은혜가 막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걸 우리가 몸으로 이 크로스의 시간, 이 역사 속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가면서 우리는 그걸 시간이라고 그렇게 감지하는 것일 뿐이에요.

 

,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에서 보면 시계가 여기에 있고 돌아가는데 물이 시계 반대쪽에서 흘러 내려오면서 시계를 치고 거꾸로 흘러가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시간은 그런 거란 말에요. 과거에서 미래로 이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거는 이 역사의 주도권이 있는듯한 느낌이 오잖아요?

그렇게 역사에 의해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미 묵시에서 완성되어 있는 그것이 우리에게 부딪치는 걸 시간이라고 그래요. 그걸 카이로스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이 시간, 모든 인간 보편이 살고 있는, 감지하는 이 시간 속에서,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 , 이게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떤 내용인가를 감지하는 그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냥 크로노스의 이 시간만 살아가게 되면 그들이 바로 세상 풍조에 묶인 자들이 되는 거예요. 아래의 땅에 묶인 자가 되는 거예요. 아래 사람이에요. 그거는요.

그러나 이 크로노스의 아래의 삶을 살지만 그 속에서 그 위의 어떤 것을 감지해내고 아, 그거요? 하는 그 사람들이 땅의 크로노스를 살면서 그 카이로스를 사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시간이 둘로 이렇게 나누어져서 등장한다는 말이죠.

, 그렇게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면서 그 시간에 종속되고 지배당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크로노스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만나게 되는 그 사건들을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거기에 그냥 맞아서 절망하고 실망하고 잠시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그 시간을 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때가 차서, 때가 이르러 할 때 그때는 전부 카이로스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그걸 의미할 때 카이로스. 때가 차서, 때가 이르러 이렇게 성경이 쓰잖아요? 그게 전부 카이로스란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단 말에요.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지만 그것이 진짜 사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은혜이며 능력이며 영광이다, 라는 내용을 갖고 있으니까 그걸 라고 한단 말이에요. 시간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카이로스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게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 크로노스 속에 그 과거나 미래에 눈을 돌리지 않아요. 모든 이들이 크로노스를 살면서 과거나 미래에 묶여 살거든요. 과거를 두려워하고 그 과거의 일 때문에 상처받고 그걸 아직 까지도 내가 상처로 갖고 있고 미래의 어떤 것들이 불안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이렇게 산단 말에요. 사람들이요.

 

역사에도 두 가지가 있어요. 조사나 탐구에 의해서 그냥 이렇게 파악되고 나열된 순수역사가 있고요 해석이나 뜻으로 본 풀이의 역사가 있죠. 단순히 시간 속의 사건들을 조사나 탐구에 의해서 나열해 놓으면 그게 순수역사라고 하는 거고, 그 사건들에 의해 이루어진 내용을 중심으로 그 시간들을 다시 풀어놓으면 그것이 풀이의 역사에요.

그것을 개인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보자고요. 한 인간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살고 경험하고 부딪치고 느낀 이 모든 사건들을 나타난 모양대로 그냥 나열을 하면 그건 전기가 되죠. 그러나 그 시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나를 이끄신 하느님의 손길을 포착한 이들이 아, 그건 그런 의미였지. 내 인생에서 그거는 이런 의미를 가졌던 거였지? 라고 이렇게 그 하느님의 손길을 중심으로 다시 그 시간이 가진 의미를 이렇게 풀어놓으면 그걸 간증이라고 하는 거예요. 간증이란 말은 사실 좋은 말은 아니지만 굳이 나누자면 그렇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죽도록 고생을 했던 시간들이 아, 하느님이 나를 이 자리로 이렇게 끌고 오려고 했던 그 시간들이었구나! 라고 생각되면 그 고생되었던 순간들이, 시간들이 나에게 가치 있는 시간들이 되겠죠? 그때 나는 크로노스를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실지로는 카이로스의 그 가치로 산 거란 말입니다.

똑같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데 어떤 이들은 그 시간을 카이로스로 살게 되는 거예요.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 이해되어지면 그 어떤 순간도 가치 없는 순간이 없어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선을 이루기 위한 가치 있는 것들이었구나, 라고 깨달으면 그때 그를 항상 기뻐한다고 해요. 그거였어? 그렇게 깨닫는다면.

어떻게 사람이 감정적으로 항상 기쁠 수 있어요? 오늘도 이렇게 울적해갖고 이렇게 표정도 없이들 앉아있는데. 그죠? 그런 얘기가 아니란 말에요. 카이로스 속에서 그건 기쁨이었지! 그게 환희였지! 그건 나에게 행복이네? 라고 알게 되면 그게 항상 기뻐하는 거란 말입니다.

 

어머니가 복중에 생명의 씨를 받아서 잉태를 하게 되죠? 그건 다 하느님의 자손 그 제라가 어떻게 아들로 탄생되는가를 설명해주기 위해 하느님이 모형으로 주신 거예요. 하느님은 얼마든지 그런 과정 거치지 않고 만들어서 뿌릴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우리에게 굳이 그런 과정을 통과하게, 경험하게 시킨 건 우리에게 그걸 통하여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한 거란 말입니다.

여자는 복중에 생명의 씨를 남자로부터 선물 받는 거예요. 부여받는 거예요. 받아서 잉태를 합니다. 그리고는 열 달 동안 그 생명의 씨에 의해 그 어머니의 인생이 장악되고 조종되게 되어 있어요. 열이라는 것은 항상 십계명, 율법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아래의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열이에요.

(10). 옛 성전, 율법, 아래 세상. 이건 다 같은 거란 말에요. 그 열, 그 열 동안에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씨를 받아 하느님의 그 진리의 말씀이 그 씨가, 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부터 그는 열의 삶을 사는 거예요. 내 복중에 생명의 씨를 가진 자로 사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열, 그 열을 그 씨에 의해 장악 당하고 조종당하며 살게 돼요.

어머니들이 그러죠. 어머니들이 임신하면 그 임신 전의 여자와 그 후의 여자가 다른 여자가 됩니다. 그 안에 씨가 조종하기 때문에 그래요. 장악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안에도 그 성령, 진리의 영이라는 그 씨가 들어가면 그 성령이 여러분을 어떻게? ‘아고’, 인도해간단 말에요. 끌고 간단 말에요. 아니, 나는 안 빼앗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어떻게 빼앗기게 돼요. 심지어 먹는 거까지 조종당해요. 내가 좋아하는 거 따로 있어요. 그런데 내 씨가 먹으라고 하는 걸 먹게 돼요. 그게 입덧이에요.

생명의 씨를 잉태하지 못했을 때 여자가 좋아하던 그 먹거리는 그 여자를 살리는 양식이 되지 못한다, 라는 것을 그 복중의 씨가 알려주는 거예요. 상징이에요 물론. 당신은 내가 먹으라는 걸 먹여야 산다, 라는 암묵적 강요에요. 씨의 강요. 생명의 씨의 강요. 그걸 입덧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당연히 여자는 힘들죠. 여자, 여자 그러니까 뭐 딴 사람들 생각할 거 없어요. 우리 얘기에요. 그 하느님,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는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이 땅에 내려온 하느님의 신부 얘기. 그 여자는 힘들죠. 어렵죠? 고통스럽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니까.

그런데 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자기 몸을 가꾸고 자신의 건강을 위하며 자기 몸을 자랑하는 삶이 점차, 점차 지양 돼요. 지향 되는 게 아니라. 그때만큼은 조금 살이 쪄도 용서가 되고 부스스한 채로 마켙을 가는 것도 스스로에게 용인이 돼요.

 

아니, 그전에는 정말 허리가 1 센티 두꺼워지는 것도 스스로 용납이 안 돼. 그러니까 자기를 막 때려요. 꼬집기까지 하고.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면 여자들이 코끼리가 되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녀요. ? 내 안에 생명이 있거든요 씨가 있거든. 이거 하나로요. 그 씨에 의해 조종당하는 거예요. 좋아하던 커피나 몸에 안 좋다는 음식들도 스스로 자제하게 돼요. 자기 안에 잉태된 그 생명이 그런 것들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에 이 삶이 나타나게 돼 있어요. 그러나 원래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도록 태어난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이 그렇게 자가 자신의 욕망을 몰수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게 고통이 아닐 수가 없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임신하면 우울증 걸리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안의 생명이 그걸 하게 하는 거예요.

그 고통스러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내 복중의 생명이 인식되고 감지될 때마다 그 고통은 잠시 기쁨과 환희의 자리를 내주죠. , 그렇지. 내 안에서 내 아이가 내 배를 차네? 그때 오, 내 몸이 코끼리가 되어도, 부스스한 모습으로 남편이 손가락질을 해도 그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내 안에 생명이 있지? 그 생명이 내 안에서 이렇게 역동적으로 뛰어 놓고 있지? 이렇게. 내가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는 내 안에 소중한 생명이 있음을, 그것 때문임을 깨닫는 거예요. 카이로스죠.

그러나 자아라는 육신을 여전히 갖고 있는 그 어미는 이내 또 고통과 어려움 속으로 다시 빠져들어요.. 그러면 또 남편만 달달 볶아요. 그러면서 크로노스의 열이 채워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아이를 낳는 출산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크로노스의 열이 아들로 출산되는 거예요.

 

열이, 이 아래의 세상이, 율법이 아들로 출산이 되기 위해서 열둘이 필요했죠? 그래서 열두 사도, 열두 지파가 있는 거죠. 그렇게 그들이 열둘, 아들이 되면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그 말씀을 내 마음으로 받고 전하게 되죠? 그 때 그거를 칠이라 그래요. 그래서 그다음에 일곱 집사가 뽑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곱 집사의 섬김은 그들이 뭐 구제와 자비의 어떤 삶을 담당한다고 하는 게 다 말씀을 전해서 구제하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개신교의(존 칼빈이 정해놓은) 집사 장로 이 서열은 성경적인 게 아니에요.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정말 뿌리는 이들이 됐을 때 그들을 집사라 그래요. 사실은요. 그 디컨 (Deacon) 이라는 단어 자체가 섬긴다, 라는 뜻인데 성경에서의 섬김은 말씀을 전달해주는 섬김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들을 건져내는 거 밖에 없다고요.

아무튼 그렇게 열 달의 그 고통스러운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낸 그는 열둘의 아들을 어느 날 이제 출산을 하게 되죠. 그런데 출산을 할 때,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 열의 고통이 한순간으로 모아지는 거예요. 그건 그들이 그 생명의 씨를 받고 열이라는 아래 세상을 사는 그것이 바로 이러한 죽음의 삶이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렇게 죽었다가 사는 고통만큼 힘든 거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 우리의 육이 죽고 영으로 사는 시간이 바로 그 크로노스의 아래, 그 열의 시간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여자가 자기에게서 나온 그 아들을 보는 순간 열 달 동안의 고통과 불편함과 우울함과 아픔 이런 게 싹 사라지죠. 여자가 애를 낳을 때 온몸의 뼈가 다 해체되는 거 같다 그래요. 그만큼 아프다는 거죠. 그냥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한 마디로. 그래서 다시는 내가 애를 갖나 봐라, 그러는데 아들이 나오는 순간, 아들이라고 하니까 딸들이 서운해 할 텐데, 씨가 내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출산이 되면 성경이 그걸 그냥 아들이라 그래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문득문득 경험했던 그 카이로스의 시간, 아 내 안에 생명이 있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힘든 거지! 이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그래서 가치가 있는 거지! 라고 했던 고런 문득문득 겪었던 그런 카이로스의 그 시간이 아, 바로 이거구나! 라고 완결이 되는 거예요. 아들을 낳게 되면. 결론이에요.

그러면 그 여자는 그 해산의 순간을 시점으로 해서 영원한 카이로스의 그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영원이라 그래요. 거기에서의 삶을 영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는 그 크로노스의 시간과 상관없는 자로 살게 되는 거죠. 그게 그 묵시의 완성된 현실인 거예요. 이미 여러분이 살고 계신 그곳.

그 크로노스의 열 달이라는 시간이 사실은 이 카이로스의 기쁨을 그 시간 속에서 나타내준 모형의 시간들임을 알게 되는 거죠. 열 달 동안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렵게 그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러나 그 시간은 바로 이 카이로스의 이 완결, 이 기쁨, 이 환희, 이 행복을 위한 시간이었다, 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크로노스의 시간은 바로 이 카이로스의 이 시간을 역사 속에서 나타내어 보여주는 시간이다, 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열 달 동안에 그 크로노스의 시간은 출산이라는 그 카이로스의 완성을 위한 거예요. 그런데 완전한 출산이 되기 이전에도 인간 안에 그 생명, 그것이, 그 역동성이 감지가 된단 말입니다. 고 때마다 그 어미는, 그 여자는 카이로스의 감동을 맛보게 되는 거예요. 그걸 현실천국 이라고 그래요. 성경에 보면 천국이 왔다, 그러잖아요?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나중에 착한 일 많이 해서 가는 거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 군데도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그 나라가 온다고 그래요. 우리한테 심지어 왔다 그래요. 그 카이로스의 그 시간을 살게 될 때가 그게 천국인 거예요. 지속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러나 그게 완료가 되면 아들을 확 낳아버리면 그때 여러분은 바로 그 나라를 살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그 현실천국과 연결이 되지 못하면 그 진짜 천국은 절대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야 된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냥 행복하기만 하고 편안하기만 하고 기쁘기만 하고 이런 삶을 살라는 게 아니에요. ‘천국을 살라는 건. , 이게 그거지! 라고 하는 고 순간, 이게 카이로스란 말에요. 그게 천국을 사는거란 말에요.

이렇게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요 과정을 자신의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경험하며 살게 돼요. 그러다가 이 크로노스 속에서 호흡을 이제 완전히 뺏기는데 영원한 카이로스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요건 진리와 비 진리의 얘기예요. 율법과 은혜의 얘기라니까요.

사람이 이 땅에서 죽는 게 호흡을 뺏기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생명은 코끝에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 호흡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들어가면 이게 바로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진공 속에서 소리가 전달이 됩니까? 공기, 호흡이 없으면 소리라는 것은 없어요. 실지로 실험을 해봐도 그래요. 자명종 소리를 딱 올려놓고 시계를 그릇 안에 딱 넣어버려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공기를 쭉 빨아내서 진공을 만들어 놓으면 소리가 없어요. 안 들려요.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진리와 비 진리의 이야기인 거예요. 율법 안에 태어나는, 이 아래,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전부 비 진리, 율법으로 살게 돼요. 그 말을 갖고 있어요. 안에. 그러나 나중에 그걸, 그 호흡을 뺏기고 푸뉴마, 진짜 호흡, 진리의 말을 받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서 카이로스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성도라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희열을, 아픔 속에서 희망을, 눈물 속에서 미소를 경험하는 그런 아주 변태 같은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게 복음을 아는 이들의 삶 속에서만 나오는 크로노스 속의 카이로스예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오늘 본문인 18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8,18)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고난 받는 거 그거 나중에 그 영광을 위해서니까 꾹 참어! 이런 말이 아니에요. 여기서 지금(현재)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이로스예요. 원문을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다시 번역하면 카이로스 속에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이라는 건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이야이런 말이에요. 장차, 라는 말, 이런 말 없어요. 이거는 현재형이에요.

다시 한 번, 하느님은 우리 안에 씨를 심으셔서 우리를 아들이라 불러주세요. 그래서 그들은 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래요. 그리고 그 안에 들어온 그 하느님의 영, 그 영, 그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여 언약의 십자가로 끌고 간다, 그래요. 당연히 그 언약의 십자가로 끌고 가는 길은 쉽지 않겠죠? 그러니 그것이 우리에겐 고난으로 감지가 된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 씨를 받은 이들은, 그 진리를 안 이들은 이미 크로노스 속에서 그 카이로스를 살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이 카이로스를 살고 있는 그들이 당하는 이 크로노스 속에서의 그 고난은 사실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거예요. 감지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인식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그 인생 속에서 나타나는 고민과 고통과 고난과 절망이나 이런 것들이 그냥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우리에게 허락했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게 카이로스 속에서 사는 이들의 고난이라는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이 그냥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 거죠. 그래놓고 그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한다니까요..

그러면 하느님의 영광은 뭐예요? 하느님의 뜻. 그 초월 속에 계신 그분의 뜻과 그분의 마음이 보이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 현상이나 사건 등으로 이렇게 나타나는 걸 독사영광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분의 뜻이 뭡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만날 기도하잖아요? 뜻이 뭡니까? 육을 입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 육을, 언약의 기둥, 스타오로스, 십자가에서 몰수당하고 삭제당하고 영으로 사는 거. 하느님의 영이 진짜 내 생명이지! 깨닫고 그 영으로 사는 게 하느님의 뜻이잖아요. 그러면 그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반드시 십자가로 그 언약의 기둥으로 끌고 가겠네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느님의 그 언약, 그 뜻이 우리를 그 십자가로 끌고 가는 게 그게 나타나는 게 우리의 삶 속에서 고난으로 나타나죠. 그런데 그 뜻이 나타나는 게 영광이라며요? 그러니까 카이로스 속의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야! 맞는 소리죠? 그게 진리라니까요. 그게 오늘 본문 18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분명 우리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생명을 잉태한 자의 불편함과 고단함과 고통스러움을 겪을 거예요. 그건 우리 주님이 약속하고 간 거예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거,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거는 분명해! 라고 약속한 게 뭐냐 하면 고난이에요. 하느님이 약속한 거란 말에요.

그러나 그건 우리를 언약의 기둥, 즉 십자가로 아고이끌어서 우리의 육을 죽이고 영의 아들로 완성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은혜의 손길이잖아요. 그걸 깨닫는 이들에게 있어 그건 영광으로 감지될 수 있다, 라는 거예요.

이렇게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 계명, 아래의 것, 세상, 이게 열이에요. 이게 율법이니까. 아래 것이. 그 열이라는 과정, 크로노스의 그 과정을 통과해서, 해산의 고통으로 통과해서 아들을 낳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을 아들로 낳게 돼요. 여러분을 아들로 낳게 되면 그가 정말, 그 예수가 진짜 하느님의 언약의 후손이었네! 라고 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또 낳는 거예요.

조금 있으면 이해가 가실 거예요. 그건 필연적 과정이고 필수적인 통과의례인 거예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있어야 돼요. 그 해산의 고통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거라니까요. 하느님이 그렇게 해서 아들로 만들겠다, 라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을 창조하시면서부터 말씀해 놓으셨다니까요. 그래서 그 과정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로마8,16)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영이 있다? 천만의 말씀. 헬라 사람들이 그들의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지. 영이라는 건 성령이 분명히 말이요,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이 없고, 그 말, 그 진리가 없는 이는 영이 없는 거예요. 그걸 그냥 나쁜 영이라고 푸뉴마 다이모니온, 악령이라 그래요 그걸. 영이 없는 거예요. 그건요. 그걸 귀신이라고도 불러요. 그러나 그건 영이 없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 진리, 그 생명이 들어오게 되면 그걸 영이 있는 사람, 혹은 영에 속한 사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로마8,17) 17 자녀(아들)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생명)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이거는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을 필시 받아야 돼, 이런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 영광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고난으로 나타난다, 라는 거예요. 함께 나타난다. 이런 말. 영광과 고난이 함께 나타나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그러나 그걸 크로노스 적으로 그냥 이해하고 끝나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반드시 카이로스로 이해해야 너희는 그 크로노스 속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라는 거예요.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이게 올바른 길이지. 이렇게 깨달으면서 말이에요.

바오로는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우리가 그 신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종을 만들어버리는 그 말씀을 받은 게 아니라, 율법으로 받으면 다 지켜야 되니까. 안 지키면 죽여! 이런 하느님으로 안다는 말이에요. 우리는요. 그래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아들로 만들어내는. 양자의 영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어요. ‘아들로 창조해내는’.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아들로 창조해내는 그 진리,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 아바, 여기에 아바 아버지라고 되어 있는데 그 앞의 말은 아람어고 뒤의 말은 헬라어입니다. 왜 굳이 그걸 그렇게 나누어서 써놨을까요? 앞에 아빠’, 아람어 아바알랩하고 베잍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의 집. 그 하느님의 성전, 내 안에 하느님의 그 성전, 생명 그 진리이신 그분이 들어오면 내가 성전이 되잖아요. 그리고 내 안에 들어온 건 나를 아들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게 아버지죠? 아부그것이 그 아버지인 것을 부르짖게 된다.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이에요. ‘ 아빠’, 아바‘‘파테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내 안의 진리가, 그리고 그 진리를 품은 가 바로 나를 아들로 낳게 하는 그리고 다른 이들을 아들로 탄생케 하는 아버지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부르짖게 된단 말이죠. 바오로는 그렇게 아들을 정의한 후에 16절과 17절에서 그런 이들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어져 갈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그들 안에 아버지로 들어온 그 진리의 영이 그들을 아들로 낳을 거니까. 그 진리의 영이 그들의 영이 되어서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시작한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은 그들을 스타오로스, 언약의 기둥, 십자가로 끌고 간다. 그랬죠? 그런데 그 십자가는 어디에 있었어요?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그분이 어디로 나갔으니까 우리도 어디로 나가자. 영문 밖으로 나가자, 그래요.

 

영문 밖이라는 것은 그 율법주의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 밖이란 뜻이죠. 그 성문 밖으로 나가야 돼요. 그런데 그 성문 밖에는 게헨나’, 지옥이라고 성경이 번역하는데 게헨나힌놈의 골짜기에요. 거기는 그 율법주의 예루살렘이 쓰레기장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단 말에요. 쓰레기 버리는 데, 제물의 똥 버리는 데, 제물의 내장 버리는 데.

그래갖고 일 년 내내 불이 훨훨 타니까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거기를 지옥이라고 그렇게 묘사한 거지 지옥이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그곳은 율법주의가 쓰레기 취급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그러잖아요? 교회에서 율법주의, 인본주의로 가득 찬 그런 교회에서 은혜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쓰레기 취급해요. 그게 신앙이냐? 그 은혜가 뭐냐? 도대체가? 사람은 사람다워야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는데 왜 너희들은 은혜만 얘기해?? 이렇게 쓰레기 취급한단 말이죠.

그들이, 쓰레기 취급 받는 이들이 쫓겨나가는 곳이 영문 밖이에요. 아니, 성령을 받아 그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로 인도되어 갔더라니까요 결국은. 우리도 성령을 받았다 며요? 그 안에 있던 그리스도의 그 영이 내 안에 들어왔다 며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러잖아요. 나는 내 안에 계신 그 성령이 하라는 말만 했고 그 성령이 하라는 일만 했다’. 그래요. 그리고 내가 하는 건 내 안에 계신 아버지가 하는 거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입니다.

그럼 내 안에 그 진리, 그 아버지 그 씨가 들어와 있으면 똑같이 그리고 끌고 갈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건 우리에게 고난으로 밖에 감지가 안 된다니까요.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서는.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해야, 우리는 그렇게 죽어야, 율법주의 밖으로 나가 죽어야, 애굽 밖으로 나와야 우리가 산다, 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게 영광이지! 그건 당연한 거지. 그게 옳은 거지. 하고 인식한단 말에요. 그때 그가 카이로스를 사는 거다, 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에요. 그래서 반드시 그분이 가신 길을 가야 돼요. 진리인, 그 보배인 생명은 그를 둘러싼 껍질을 절대 용납하지 않아요. 그게 예수여도 찢어버려요. 그리고는 그 생명으로 살아난다니까요. 이게 생명이야! 라고 증거 해버린다니까요. 그 보배를 담은 그릇은 그 보배를 나타내기 위해 반드시 깨져야 돼요. 그게 우리의 십자가의 삶이고 자기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진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 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예수님의 그 대제사장의 길, 영광이란 단어에요. 영광, 영광, 영광, 영광, 아버지의 영광. 나의 영광, 너의 영광. 계속 독사’, 영광, 영광 하는데 그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니까요.

죽음과 영광이 어떻게 조합이 돼요? 그런데 성경은, 주님은 그것이 영광이다. 그런다니까요. 내가 그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게, 그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게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난 거야. 내가 그 영광을 드러내는 거야.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거야. 여러 가지로 표현한단 말에요.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이 죽음이라는 걸 확 들이대는데 묵시 속의 주님은 그걸 영광으로 해석해버리더라는 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우리에게서 그게 가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을, 진리를 마음으로 가진 자들의 삶인 거란 말에요. 이건 진짜 내용이 아니다, 이건 모형이다. 그 내용은 따로 있다. 그건 묵시야.

그러니까 그 묵시를, 그 진리를 아는 이들은 이 역사 속에 갇히지 않을 수 있어요. 묵시록에 가면 전부 이 역사는 사실은 이 내용이었어. 라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니까요. 그걸 깨달으면 우리는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그 카이로스의 그 진리를 살게 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나에게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의 열심으로 보내주신 선물에 의해 나타나는 거지? 이렇게 알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아들로 낳아지고 약속의 자손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들로 낳아지지 않으면 장자들의 총회, 그 하늘의 교회 안으로 못 들어간다니까요. 그런데 아들로 낳으려면 해산의 고통이 없이는 안 돼요. 아무리 미련한 감각 없는 여자도 아프다니까요.

해산의 고통이란 어미의 육이 삭제당하는 고통이에요. 죽는 거예요. 어미가 그 안의 생명의 씨에게 양분을 다 뺏겨서 결국 해산의 고통으로 죽고 출산하는 거예요. 예수가 교회라는 아들을 낳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언약의 기둥 위에서 그의 몸이 찢겼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여자에게 주신 하느님의 그 해산의 고통, 이건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의 언약이요, 약속이었던 거예요.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구원할 거야, 라는 약속. 언약, 구원의 차서. 저주가 아니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하느님이 원래는 없던 걸 너희들이 내 말을 안 들어? 고생 좀 해봐라 이놈들아!’ 이러고서는 심통이 나가지고 고통을 더하는 그런 하느님이겠어요?

 

(창세3,16)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이게 중요한 거예요. 창세기 315절이 원시 복음이죠? 그 여인의 후손, 그 자손에 의해 너희는 산다. 그런데 여자에게 그 자식을 낳을 거야’. 이건 축복의 선언이라니까요. 네가 그 자식을 낳을 거야. 그건 난 너 살릴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낳느냐 하면 네 육이 죽어야, 율법 아래에서의 네가 죽어야 너는 비로소 은혜의 아들을 낳을 수 있어. 이런 말이란 말에요.

네가 남편을 장악하려고 하는 거.‘ 이게 선악구조 속에서의 율법이 하느님의 은혜를 장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이게 복이죠. 네가 아무리 그 아래에서 죽을 짓을 해도. 율법주의, 선악구조 속에서 나에게 대적을 해도 나는 반드시 너를 다스려 끌고 갈 거야. 이게 어떻게 저주입니까? 이게 복이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은 반드시 해산을 하게 되어 있어요.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하느님이 골이 나서 이렇게 고통을 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그냥 약속이고 언약이며 구원의 과정이에요. 구원의 차서란 말입니다.

 

(1디모2,11-15) 11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12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13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15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구별된 자. 믿음이 있는 자라면 너희들은 반드시 해산할 거야. 그래야 너희들은 아들을 낳아 구원에 이르는 거야. 이러는 거예요. 애 낳지 못한 여자들은 천국 못 간다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게요. 그 해산 얘기하는 거 아니란 말에요. 창세기 316절의 이 해산, 그거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요. 바오로가요.

여기서의 여자구네예요. 구네는 히브리서 네케바를 번역한 건데 그 네케바반드시 자칼이라는 남편을 만나야 비로소 한 몸, 존재가 되는 그런 존재를 이야기해요. 그걸 여자라고 해요. 그래서 그 남편이 없는 자를 과부라 그러죠? 그래서 성경에 항상 구제의 대상을 과부, 고아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아버지가 없고, 그 남편이 없는 자. 그걸 구네라고 그래요. 과부라고 그래요. 여자.

그 여자는 아담에게서 나와요. 다른 말로 아담이 아니면 생겨날 수도 없는 존재죠?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성경에 나오고 이야기하니까 말에요. 그런데 그 여자가 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구조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렸어요. 그리고 결국 남자에게도 그걸 먹게 만들어서 죽게 만들죠? , 이거는. 이 아담, 이 남자는 예수님의 모형이에요.

우리는 죄인이에요. 율법주의 하의 죄인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준 그 율법, 그걸 예수님이 우리 거를 다 받아서 그분이 율법이 되어, 그분이 죄인의 대표가 되어 죽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 전체에 그리고 사람들까지도 여자가 먹었는데, 다 죄인인데 죄인 중의 대표 그러면 아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죄인인데 예수님이 그 죄인 중의 대표가 되어서 그분이 죽어버렸다니까요. 아담은 줏대도 없이 여자가 준다고 홀랑 먹냐? 이렇게 해서 먹은 게 아니라 예수님의 모형으로 그 여자가 먼저 먹고 그 여자 때문에 그 여자가 되어 죽는 예수의 모형으로 따먹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담을 바오로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의 모형이었단 말입니다.

 

왜 남자가 여자의 죄를 뒤집어쓰고 여자의 대표로 죽어야 하는가?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진짜 남편인 그 예수, 그 그리스도 그 하느님이 아닌 이 세상의 율법이란 남편을 자기 반쪽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었거든요.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이 세상 속에서 자기의 구원의 근거로 무어를 쌓고 제시하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의 율법 지킴. 자기의 행위, 자기의 됨됨이로 제시하려고 해요.

이걸로 하느님 앞에 제시하면 내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겠지? 이렇게 그걸 자기 생명으로 여기죠? 당시의 여자들의 생명은 남편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아주 그냥 홀대를 받고 있지만 여자가 그 남편 없는 그 과부는 생명 없는 여자였어요. 당시에.

그러니까 남편을 다른 남편으로, 율법이라는 남편으로 자기 옆에 붙이고 있다, 라는 건 그가 자기의 생명의 근거를 율법으로 갖고 있었다, 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느님은 반드시 그를 살려내기 위해 위에서는 그 가짜 생명을 부수고 진짜 생명으로 갖다가 붙여줘야 된단 말에요.

그런데 이 인간들은 절대로, 절대로 그걸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을 품어 안고 그 율법의 남편이 되어, 율법이 되어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을 폭격해 들어가서 그들을 자기 안으로 그냥 확 감싸 안아버리는 거예요. 그걸 은혜라고 해요.

그런데 이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못마땅해 해요. 자존심 상해해요. 왜 내가 하느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돼? 나도 할 수 있다니까 이렇게. 그래서 바오로가 여자는 남자를, 그 은혜를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돼. 여자는 조용히 진리를 배우라는 거예요. 그 진리에 순종해서 죽으라는 거예요. 육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헛된 힘으로 나대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절대 생명 창조할 수 없어.

그렇게 진리에 의해서 자신의 육체를 부인당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면 그게 바로 그의 해산이고 그의 구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해산의 고통은? 축복이지 저주가 아닌 거죠? , 열의, 이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여러분들에게 이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이게 축복이란 말에요.

 

(요한16 :21) 21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 버리게 된다.

 

자 카이로스 속에서 이게 그거였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 죽을 거 같은 해산의 고통도 이내 그 아들 낳은 기쁨에 묻혀버린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크로노스의 인생 속에서 그 삶을 문득 문득 경험하면서 살아야 된다니까요. 진리의 말씀 안에서. 그래서 듣고 또 듣고, 읽고 또 읽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무서워하는 종을 만들어내는 율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부인당하는 게 맞고, , 이렇게 부인당하면 안 돼.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잘 보여야 돼. 이게 아니라. 그렇지 이렇게 부인당하는 게 맞지. 그리고 내가 불가능한 존재임을 폭로당하는 게 맞지. 이렇게 인정하는 게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부인되고 폭로되는 게 두렵죠. 하느님의 말씀을 법으로, 율법으로만 보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반드시 그 공포, 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의 수치를 스스로의 자원과 노력으로 가리려는 시도를 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게 율법이고 희생제사에요. 성경은 그걸 죄라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으면 안 돼.

 

최초의 여자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자마자 눈으로 본 게 자신의 벌거벗음이었어요. 수치라고 그래요. 부끄러워. 그런데 그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운 게 아니었죠. 원래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어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옷이 사라진 게 아니라 워낙 벌거벗게 창조되었다니까요. 하느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건 너희들의 이 부끄러움, (부끄러움이라는 건 존재의 불완전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희들의 옷이 되면 돼. 너희들의 부끄러움. 너희들이 완전하게 되는 건 나로 말미암아 완전케 되는 거야를 보여준 게 에덴동산 안에서의 부끄러운 벌거벗은 그 사람과 하느님과의 동행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의, 그 초원에서 뚝 떨어져서 나와서 자기의 모습만 그 선악구조, 율법으로 보게 되면 이게 부끄러운 거예요. 못마땅한 거예요. 왜 이따위로 만들어놨어? 그래서 스스로 거기에 뭔가 자꾸 더하는 거예요. 아냐, 이건 아냐. 이건 부끄러운 거야. 어떻게 우리가 이 훌륭한, 하느님처럼 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어? 아냐. 아닙니다!

원래 피조물의 자리는 그 벌거벗은 자리가 맞아요. 그리고 하느님이 그분의 그 생명력으로, 그 바라크. 복으로 우리를 감싸 덮어야 우리가 비로소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걸 의라고 그래요. ‘사다크’. 올바른 존재의 자리. 이걸 라 그래요.

그런데 인간들이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걸 죄라 그래요. 자신의 원래의 자리는 그 죽은 흙의 자리. 그 벌거벗은. 원래 부끄러운 자리.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없음의 그 자리가 맞다, 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나에게 호흡을 넣고 그 생명을 주셔서 내가 존재 되었다, 라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 내가 누군데? 이렇게.

 

그러한 자들은 하늘의 초월, 그 하늘의 거룩이 일방적 공여의 형태로 이렇게 폭격해 들어오게 되면 자신의 모습에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그 부끄러움은 곧 공포와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그건 공식이에요.. 이건. 그래서 열심히 무화과나무 치마를 짓는 행위에 여념이 없는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하느님이 저주한 거죠? 율법. 열매도 없는 것이 잎사귀만 무성하네? 그때,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이게 카이로스예요. 크로노스 속에서의 무화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당연히 그들은 하느님을 피해서 숨어요.

그러니까 심판 뒤에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억지로 무슨 야차들을 시켜서 야, 얘네들 잘 간수해.. 지옥으로 다 넣어. 이게 아니라, 자기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그 앞을 피하게 되어 있어요. 지옥으로 간다니까요. 스스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 빛이 버거워. 너무 부끄러워, 그 앞에 서는 것이.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하느님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두렵게 해주겠다는 거죠.

 

(창세3,8-10) 8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두려워하여 숨게 되어 있어요. 그 하느님의 말씀을 법으로 여기기 때문에 두려워하여 숨게 되어있다니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지 못하고 선악으로, 선악의 법으로 받아버리면 일차적으로 하느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못나 보여요.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천국을 가? 더 개발해야지. 더 성숙해야지. 굉장히 기특한 생각인 거 같죠? 그러면 그 하느님이 두려워진다니까요. 그럼 그 하느님을 피해 숨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겨우 하느님 앞에 나타나는데 무화과나무 치마 그거 해 입고 나타나요. 율법의 행위로 치마해 입고 나타나요.

 

(창세3,7) 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여기서 앞 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띠입니다. 성경에서 띠는 항상 진리를 상징하는 거예요. 진리의 띠. 허리띠에서 그 띠예요. 그래서 애급에서 나올 때도 띠를 띠고 먹어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느님의 진리를 피조물의 수준에서 그 차원으로 이해해 버리면 무화과나무 잎 띠, 그 율법의 띠. 이게 진리지, 라고 우기게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해서 하느님 앞에 상급 받을 일을 많이 해서 그 앞에 가야 하느님이 구원하시는 게 진리지.

무화과나무 잎 치마, . 그래서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같은 데에 가면 지금도 그 벌거벗은 사람들이 띠는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씩. 상체와 하체를 나누는 게 아니라, 이게 진리지! 라는 그 인간들의 우매함을 그들이 그냥 보여주는 거예요. 벌거벗고 띠 하나 하고 난 다음에 이 띠 있으면 부끄러운 거 아니다, 라고 해요. 그들은 그 띠 없으면 밖에 안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마나인데 저거는. 하느님이 우리를 보기에 그런다니까요. 저 띠는 뭐냐 도대체? 그렇게. 그런데 인간들이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그 띠예요. 무화과나무 잎 띠. 그건 금방 말라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창세기 때부터 그런 띠? 율법의 진리? 희생제사? 율법의 행위? , 그게 무슨 제사야? 어떻게 그걸로 너희들이 생명을 얻어? 어떻게 구원을 받니? 이게 히브리서의 논리잖아요? 그 제사가 어떻게 진짜 죄를 용서해?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하느님이 그 치마 찢어발기고 자신이 준비한 제물의 희생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요.

가죽 띠, 그 가죽이란 단어와 성막을 덮는 그 가죽과 똑같은 가죽이에요. 하느님의 성전. 그 하늘. 우리가 성전이죠? 그들은 바로 하느님이 준비한 그 제물의 가죽으로 덮어야, 그 옷으로 덮어야 진짜 하늘이 되는 거야. 진짜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거야. 보여주는 거예요. 바오로가 그게 그리스도라는 옷이야. 그런다고요. 너희들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러잖아요 그 옷이란 말에요.

너희들의 행위 옷?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 그거 아니라, 내가 준비한 그 제물의 그 옷. 그리스도라는 옷. 그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짐승 잡는데 아담과 하와가 무슨 화살 한촉이라도 보탰어요, 뭘 했어요? 다 하느님이 준비한 하느님의 옷. 그래서 그 귀신 들린 자, 돼지 떼 이야기에서도 그 귀신 들린 자가 처음에는 옷을 안 입고 나오죠? 벌거벗고 있어요. 그리고 사는 곳이 어디예요?? 무덤이에요. 그리고 쇠사슬에 꽁꽁 묶여있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자, 진리로 만나자 그가 겉옷을 입고 주님의 발 앞에 있어요. 복음을 전하는 진리의 발로 서는 거예요.

그 귀신이라는 단어가 푸뉴마 다이모니온이라는 단어가 나쁜 말이죠, 말을 악하게 쓰는 것. 이걸 악령, 귀신이라고 번역한단 말에요. 그거는 옷을 벗고 있는 거다, 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진짜 옷을 입으려면, 부끄러움을 가리려면 그리고 무덤에서 풀려나 나오려면 진리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귀신이 떠나가는 거예요.

 

원래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초월적 존재로 사는 거예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건 하느님과 연합된 존재로 그 하느님을 생명으로 갖고 사는 자들인 거예요. 이 육신은 부정당하고. 그걸 초월적 존재라고 해요. 그들이 카이로스의 사람들이죠. 크로노스의 역사와 관계없는 이들이에요.

여러분이 여기서 겪은 거, 그리고 여기서 앞으로 겪을 거, 그리고 사는 이 시간들은 카이로스의 세계 속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여러분이 여기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뭐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쌓고 해도 그것으로 뭐 소고기나 사 먹겠지.ㅎㅎ 그건 카이로스의 세계 속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예요. ㅎㅎ

그들이 율법의 열매를 먹고 이 땅에 내려와서 잠시 크로노스의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의 열매를 먹으면 벌거벗었다, 라고 하잖아요. 그리스도라는 옷이 잠시 벗겨진 상태로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이들을 죄인이라고 해버려요. 성경이.

그런데 그중에 하느님의 택한 백성이 있다니까요. 그들이 이 땅에서 그 벌거벗겨진 그 부끄러움에 어떤 옷을 입어야 되는지를 역사 속에서, 크로노스 속에서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깨닫게 되면 이게 카이로스의 사람들에게서는 이게 그걸 가르쳐주기 위한 거구나 하고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자유로워지는 게, 세상에 대해 죽는 거고 세상이 그에 대하여 죽는 거예요.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가 율법에 대해서 죽고 율법이 그에 대해서 죽고. 그 말이 그런 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초월의 상태의 원래 있어야 했던 그들이 비 초월의 호 코스모스의 세상으로 내려오면 반드시 이 비 초월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그 초월의 생명을 생산해 내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어요. 우리도 처음엔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두려운 하느님을 먼저 만나요. 우리는요. 그래서 열심히 무화과나무 잎새 치마를 만들어본다고. 우리도.

 

그런데 성도는 반드시 거기에서 아, 하느님이 가려주시는 그 옷을 입어야 되는구나, 깨닫고 나의 그 가능성과 그 열심에 대해 내가 죽는다니까요. 그걸 다나토스라는 거예요. 그들이 진짜 사는 거란 말에요. 그는 선악과를 먹었으나 그 선악과가 생명나무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의 안에서. 그래서 창세기에는 그 나무가 단수인 거예요.. 분명히 두 나무라 그래놓고 보니까 단수밖에 없어. 나무는 하나네? 선악과로 생명을 알으라는 거예요.

그렇게 사람들이 그 무차별한 폭격으로 우리에게 쏟아지는 그 초월의 은혜를 그 거룩이라고 그래요. 그 거룩을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면 인간들 안에서 처음 나타나는 반응이 두려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초월을 맞닥뜨려서 이 호 코스모스의 인간들이 딱 두부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두려움이지만 하나는 경외! 이 두 영역으로 갈라져요. 전자는 여전히 자기의 육적 자신을 의지하고 이게 죽는 게 못마땅해서 이걸로 뭘 해보려고 하는 자들이 두려움 속에 빠져있고.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아, 아니구나. 이걸로 입는 게 아니구나, 이건 내가 두려워할 게 아니구나, 이걸로 하느님은 하느님의 옷을 나에게 설명해주려고 하는구나! 하고 자기가 죽으면 그때 비로소 그분에게 진짜 순종하게 되는 이걸 경외라고 그래요. 그 둘 중의 하나로 다 빠지게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 두려움에 의해 열심히 뭔가 자기가 자기의 행위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옷을 만들려고 하는 게 율법과 희생제사란 말이에요. 하느님은 누가 너희들한테 그런 제사 드리라고 했니? 예언자들을 보내서 때마다 일갈하셨다고요.

누가 너희한테 그 제사 드리라고 했어? 누가 너희한테 그 율법 지키라고 했어? 그걸로 그걸 왜 주었는지를 알으라고 준 거 아냐? 그런데 그것만 열심히 하고 있어? 그 냄새, 그 제물 타는 냄새가 구수해서 내가 너희에게 제사 드리라고 했니? 그 피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내가 너희들에게 그거 바치라고 그런 거니? 그걸로 예수라는 진짜 제물이 뭔지를 알라고 준 거 아냐? 성경 전체가 그 이야기란 말에요.

 

누가 너희한테 무화과나무 잎사귀 그 치마 만들어 입으라고 했어? 그 부끄러움을 봤으면 이건 하느님이 당신의 제물의 가죽으로 덮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가릴 수 없다, 라는 거 알라고 줬더니 왜 거기에다가 덕지덕지 이상한 끈 하나를 매고 와? 그렇게 두려움에 근거하여 하느님께 열심히 뭐가 섬김의 행위들을 내어놓는 걸 성경이 숭배라고 해요. 그리고 그걸 우상숭배라고 해요. 아니, 죽도록 하느님을 섬기고 죽도록 제사 지내는 그들에게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서 너희들이 우상을 섬긴다, 너희들이 섬기는 건 소()! 이게 하느님이야?

 

(창세22,7-8)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드리러 가는 모리아 산은 시온 산, 골고다.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죽일 나무를 짊어지고 가는 어떤 아들 이야기. 아브라함은 이사악이라는 약속의 후손을 통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약속의 후손의 대표잖아요. 믿음의 조상이니까. 하느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나한테 아들 주시려나? 그러니까 하느님이 그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래 그럼 아들로 설명해줄게. 그래서 준 게 이사악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이사악은 예수님의 모형이라니까요. 그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는, 그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지, 약속의 후손이 되는지 이거 보고 배워오라고 준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걸 보고 배웠으면? 그 아들은 더 이상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가서 죽여라! 그런 거예요. 어디서? 십자가의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죽여! 그런 거라고요.

아브라함이 아, 이 아들에 의해, 이 아들이 이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들이 되는구나! 깨달았으면 어! 그러니 이가 약속의 후손이 맞구나, 라고 그는 그 이사악을 비로소 약속의 후손으로 낳아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그에 의해서 내가 이렇게 약속의 후손으로 아들로 탄생되는 거지! 라고 알면 그 이사악이 자기를 구원한 거예요. 자기를 낳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교회를 낳고 교회는 예수를 낳는 거예요.

 

마찬가집니다. 우리에게 내가 어떻게 하느님의 장자,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가를 설명해줘야 되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아들을 줄라나? 어 그래? 그럼 아들 하나 보내서 아브라함처럼 그가 믿음의 조상이니까. 우리는 믿음의 후손이고. 아브라함하고 똑같이 가르쳐줄게 하고 아들을 하나 보내준 거예요. 예수!

그러면 그 아들은 누구 아들? 내 아들. 그걸 안다면 내가 예수를 낳은 거라니까요. 그랬을 때, 그걸로 내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그 예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예요. 나에게. 그건 나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고 내가 감사할 어떤 일을 행한 어떤 가 아니라 ....그게 내 이야기였구나, 로 가야 되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그냥 그 역사적인 그 예수를 나의 메시아, 나의 구세주로 여기면 안 된다, 라는 의미에서 내가 그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 예수가 왜 그리스도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지. 메시아지요. 그분이.

그런데 그걸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일을 하신 그런 분으로 알게 되면 그건 나를 구원할 수 없다니까요. 그 예수는 내 그리스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사악이 묻잖아요.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약속의 후손들. 아들들이에요. 그들이 정답을 얘기해줘요. 제물은 아버지가, 하느님이 친히 자기를 위해, 자기로 준비한다. 이런 말이에요. 제물은 우리를 아들로 낳는 그 제물은, 아버지 하느님이야. 그게 우리 옷이야. 그게 우리 생명이야.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 하느님을 자꾸 숭배하려고 그러고 섬김의 대상으로만 놓아버리면 우리는 하느님을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들으면 항상 벌주고 자기가 기뻐하는 열매 안 갖고 오면 회초리로 때리고 하는 그런 조폭 두목 정도로 격하시켜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자꾸 우리의 수준으로 그분을 끌어내리려고 해요?

그렇게 나의 율법적 수고와 율법적 열심은 하느님의 열심 앞에서 부정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육의 죽음입니다. 거기에 사용되는 게 선악과, , 율법, 예수, 성전, 희생제사, 육신 이런 거예요. 그 모든 그 아래의 것들은 전부 그게 뭔지? 저 위에 그게 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어 이거는 생명 아니야, 라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모든 게 나에게 가치 있는 거네요. 심지어 내 죄까지도. 그러면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까요.

 

제가 매일매일 이렇게 이 분은 이 진리를 좀 잘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 참 생명이 뭔지 알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나쁩니까? 그거 자체로, 그게 하느님이 주신 마음이라면 그것 자체로 가치 있는 거예요. 그걸 그냥 그 아랫것으로 이해를 해서 그걸 그냥 치성이나, 하늘도 감동할 정성. 이런 걸로 그냥 여겨버리면 그게 죄라는 말이에요.

모든 건 다 가치 있어요. 카이로스의 눈으로 보면. 그러니 열심히 살아야 돼요. 죽지 마세요. 절망하지 말라니까요.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예요. 절망이라는 것도. 뭐 원래 그렇게 살아 마땅한 건데, 우리는. 이 정도 사는 것도 하느님이 정말 크게 선심 써주신 거죠. , 없었던 죽은 흙들이 그나마 이렇게 사는 게 이게 은혜 아닙니까? 근데 뭘 절망을 해요? 심지어 왜 자기를 죽여요?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따라서 그렇게 우리가 크로노스의 세상 속에서 카이로스적인 눈으로 그것들을 보게 되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부인당하는 게 맞는데 뭐가 두려워요?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이 손수 옷 입혀, 나에게 옷 지어 입힌다고 하신 거구나, 라고 뻔뻔스럽게 가면 된다니까요. 그래야 그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지.

아니, 그분이 우리의 문을 두드려서 우리와, 우리가 문을 열면 들어와서 우리와 아버지의 양식으로 그냥 함께 먹는다잖아요. 우리의 양식을 뺏어 먹겠다는 거예요. 네가 준비한 거 뭐야? 내가 준비한 거 여기 있다, 나누어 먹자. 가 아니라 내 걸로 함께 먹자. 그런단 말이에요. ? 아빠와 아들은 그냥 열심히 먹으면 돼요. 같이, 하늘의 양식으로. 그런데 뭘 자꾸 하느님께 뭘 준비한다고 자꾸 제물을 준비하고 이러고 있어요. 따라서 초월 앞에서의 그 피조물의 두려움은, 먼저 우리는 그 하느님을 두려움으로 만나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절대 하느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갖으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찾아보면 하타트예요. ‘하타트해트라는 단어와 타우라는 단어의 조합이거든요.‘ 해트라는 게 한문에도 똑같이 요런 관()자 있죠? 울타리 같은데 쓰는 데. 똑같은 단어에요. 울타리에요.

울타리에 갇혀 있는 거 그걸 죄라고 하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은.. 어디에 이렇게 구속되어 갇혀 있는 거. 그런데 밖에서 누가 가둬 놓은 게 아니라 지가 들어가서 문을 닫은 걸 죄라 그래요. ‘해트라 그래요. 그 죄가 타우완성이 되면 그걸 하타트두려움이라 그래요.

해트타우로 써 놓고, ‘하타투라고 써 놓고 그걸 두려움이라고 읽는단 말이에요. 그 단어는 족속 있죠? 가나안 족속. 그거 다 쫓아내라고 그랬잖아요? 두려움. 해트가 똑같은 단어에요. 모음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히브리어에서. ‘해트’, ‘하타트’. 그 걸로는 반드시 죄가 완성돼야 되네요.

그럼 죄가 완성된다는 거, 율법이 완성된다는 건 사랑이라고 그러죠? 은혜란 말에요. 예수 그리스도란 말에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법이, 죄가 완성이 된다는 건 내가 이제 세상에 대하여 죽는 거네요. 율법에 대하여 죽는 거네요. 나는 은혜로 생명을 얻는 거니까.

 

(야고1,15) 15 욕심(‘에피뚜미아두 마음)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다나토스)을 가져 옵니다.

 

그 죄가 완성되면 너희들이 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되는 거야. 그러면 그 두려움으로 죄가 완성되는 게 두려움이라 그랬으니까 그 두려움으로 어디로 가라? 다나토스로 가라~! 사망으로 가라. 그러면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두려움으로 하느님을 숭배해버리면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걸 우상숭배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들은 그게 두려워서, 육의 사망으로 가는 게 두려워서 혼신을 다해서 죽음의 반대 방향으로 들고뛰죠? 그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고난이라는 걸 주시는 건, 우리가 그렇게 부인되고 부정이 되어가면서 진짜 하늘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깨닫고 인식하고 희망하라고 주신 거예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시간이 아님을 깨닫고 그 속에서의 육신은 이렇게 부정당하는 게 맞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으라고 준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 그 과거의 그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있고, 그 미래의 불확실한 어떤 것으로 공포스러워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에요. 과거의 것을 갖고 미래를 희망해요. 과거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대. 그래서 미래의 어떤 것을, 천국을 나에게 준비해줬대. 그런데 오늘의 나는 두려워. 그 과거와 미래가 현재의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건 크로노스라니까요.

카이로스는 수직적 시간이라 그랬죠? 현재의 시간. 그 과거의 그 십자가가 내 이야기였구나! 내가 이렇게 죽어 아들이 되는 이야기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게 생명이라는 걸 내가 알았어. 이게 현재천국이야 이게 하느님 나라야 라고 알았으면 그 미래 것도 여기에 와 있네?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여기에 와서 함께 있는 걸 영원이라 그래요. 그걸 하느님 나라라고 한다니까요.

 

그런데 전부 과거의 것에 묶여서 그걸 상처로 갖고 있고 또 그 과거의 것을 근거로 하여 내 미래를 준비를 하고 그 과거의 것 때문에 내 미래가 혹시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까? 공포스러워 하고 그러면서 이걸 훌륭한 신앙이라고 그래요. 그게 두려우니까 이 앞에서 떠나질 못해.

남편 밥도 안 해주고 만날 여기 와가지고 그냥 엎드려서 뭘 비는지 말에요. 아니, 그 두려움에서 풀려나고 벗어나는 게 신앙이라고 성경이 하느님이 이렇게 열심히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그걸 근거로 성당에 와서 열심을 부리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냐고요? 그거 아니라니까요.

 

자유하세요. 지속이 오래되지는 않겠지만 그 현실천국을 말씀 안에서 자주자주 경험해야 돼요. 그래야 살 수 있다니까요. 안 그러면 못 살아요. 힘들어서. 여러분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나 안에서 진리로 깨달아 알아야 돼요. 그러면 그 과거의 사건은 나에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나에게 일어났던 그 과거 그것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안 된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거기는 이미 나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럼 그것도 나에게 카이로스예요. 이미 내가 이렇게 죽는 게 맞는 건데, 라는 이 현실천국이 있는데. 이게 생명이고 이게 사는 건데, 라는 이 확신이 나에게 있는데뭐 미래가 두려워요? 거기가 혹시 내가 원하지 않는 그러한 시설과 그러한 인간들로 채워진다 해도 괜찮아요.

지금도 이렇게 맘에 안 드는 이런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도 그 현실천국을 요렇게 경험하고 있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괜히 유치원 수준도 안 되는 그런 설화, 이런 속에서 신앙생활들을 하니까 뭐가 신앙생활인지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열심히 쫓아가기만 하고 그러면서도 두려워 떨고,

여러분의 현재의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타난 현상인 크로노스에만 묶여서 너무 절망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워하거나 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와 함께 묶인 공동상속자들은 반드시 그 고난을 통과해야 됩니다. 그게 영광이라고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으니까 살아 있으면 돼요. 열심히 그냥 살아있으세요. 그럼 때때로 찬송도 터져 나올 것이고 그 하느님에 대한 찬양도 터져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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