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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원하는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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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0-30 ㅣ No.59620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1 주일 - 원하는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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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인터넷에 강론을 올리는 것도 원하시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목말라 하신다는 분들이 계셨기에 인터넷에 글을 올릴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분들이 묵상을 읽고 감사한 마음을 전해오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원해서 읽고 묵상하고 깨닫는 노력을 하신 분들은 본인들 자신입니다. 주님은 원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어 하실 뿐이고, 저는 그 도구로 쓰이고 싶을 뿐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통해서든 원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을 반드시 찾아가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다니며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였습니다. 사무장님과도 친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파는 책들을 집에 가져가서 깨끗이 읽고 꽂아놓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눈에 띄는 책이 있었습니다. 흰색 표지로 세 권이 꽂혀 있었는데 1권, 9권, 10권이라 적혀 있었고 제목은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였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인데 안을 펼쳐보니 산문이었습니다. 대충 훑어보니 성모님과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2권부터 8권까지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사무장님께 허락을 받고 1권을 집으로 가져와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재미도 없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해서 많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읽을 때는 하루에 한 페이지정도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도 꼭 한 두 줄은 읽고 잤는데 그러다가 책 위에 침을 흘리면서 잔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1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고 또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리실 때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사적계시라고는 하지만 내용이 집약되어있는 짧은 복음보다는 훨씬 자세히 나와 있어서 재미는 없어도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은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1권을 다 읽어갈 때쯤 2권이 나왔는데 알고 보니 당시에 막 번역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번역을 먼저 첫 권과 마지막 두 권을 하고 중간 것들을 차례대로 했던 것입니다. 저의 읽는 속도와 번역되는 속도가 다행히 맞아떨어져서 끊이지 않고 다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몇 권은 가져와서 읽기만하고 너무 지저분해져 반납도 못하고 돈도 지불하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것이 마음 아프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사무장님은 큰 사고가 나셔서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군대 가서도 읽었고, 그렇게 1권부터 10권까지 다 읽는데 꼬박 5년이 걸렸습니다.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와서 그 책을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며 읽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은 그 길고 지루한(?)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적계시를 왜 읽느냐는 따가운 눈총도 받았고 또 신학교 때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20분가량 몰래 읽고 잤습니다. 왜냐하면 교수 신부님들, 신학생들, 또 수녀님들까지 어떤 분들은 그 책을 읽는 저를 이상하게 여기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십 수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읽었고 앞으로도 읽을 것입니다.

이 책을 한 번 읽었을 때 신학교 들어가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두 번 읽었을 때 로마 유학을 나오게 되었으며 세 번 읽었을 때 사제서품을 받았고 지금은 네 번째 읽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신학적 지식을 이 책에서 얻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지금도 이상하게 여길 분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알기를 원했던 마음 때문에 제 안에서는 사회에서 결혼하고 성공하려는 마음이 빠져나갔고 예수님으로 대신 채워졌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려는 자케오의 모습이 이런 저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돈 많은 자케오가 무엇이 부족하여 가난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무 위로 올라갔을까요? 예수님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으로는 모자랐고 멀리서 보는 것도 키가 작아서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알기 원했기 때문에 자케오의 집에 예수님이 머무시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마음에 예수님이 사시게 되셨고 저의 성소도 바뀌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집안에 모시고 삶이 변했던 자케오처럼 저의 삶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 중에 가장 많이 원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와 사시며 그 사람을 당신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랐지만 오직 자케오의 집만을 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만큼 예수님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재산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 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비워지지 않으면 채워질 수도 없습니다.

 

제 출신 본당에서 한 자매님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부족함이 없이 누리고 사는 분입니다. 남편도, 재산도, 아이들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끔 자다 혼자 일어나 앉아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잘못으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잘못되었던 사람은 세상의 명예와 돈과 쾌락으로 그 빈자리를 매워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그 사랑을 잊을 수는 있었지만 그 빈자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그 사랑이 아니면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 그 분을 밀어내고 세상 것으로 자기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 분이 떠나간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도 공허함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로도 채워질 수 없는 그 공허함으로 그 자매는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맞는 것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그 공허함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고 그래서 세상 것에 더 집착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자케오나 저나 그 빈자리를 예수님으로 채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빈자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잃고 자신도 모르는 채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예비 신자들의 신상명세서를 읽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을 갖고 싶어 한 이유들이 마음의 평화라고 씁니다. 마음의 평화란 곧 내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마음의 공허함을 느끼고 그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세상 것으로, 어떤 사람은 하느님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만이 다릅니다. 자케오는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을 결국 그리스도로 채워 참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하지 않은 신앙인은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다시 돌려주시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을 위해 대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귀한 행복의 선물을 받지 않는 것조차가 하느님께 커다란 고통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누구 때문에 가장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바로 당신의 그런 공로로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리 내다보시며 더 큰 십자가의 고통에 짓눌리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께서는 사랑, 평화, 기쁨, 즉 행복의 열매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선물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자케오처럼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무에라도 기어 올라가는 그런 노력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행복은 바로 그 사람의 집에 머문다고 하십니다. 행복은 진정으로 원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더 원하는 사람 집에 머무십니다. 원하는 만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 그대를 향한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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