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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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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05 ㅣ No.59751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1 주간 토요일 - 하느님께 혐오스러운 것


 

젊은 변호사가 멋진 사무실을 빌리고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상을 주려고 사치스러운 전화기를 구입했습니다. 그 전화는 아직 가설되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젊은 변호사는 일부러 그를 밖에서 15분쯤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대단한 인상을 주기 위해 수화기를 들고 정말로 통화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네, 국장님이십니까? 국장님, 그건 시간 낭비입니다. 아, 네 정 그러시다면, 하지만 천만 원 이하로는 안 됩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안녕히 계십시오.”

변호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손님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젊은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 ... 전화 가설하러 왔는데요.”

이 변호사는 은근히 으스대고 싶었지만 결국 비웃음을 사고 맙니다. 전화를 개설하러 온 사람은 전화가 안 되는데도 전화 받는 척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시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사는 척, 더 많이 아는 척, 더 행복한 척을 하는 것을 잘 아십니다. 오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 받는 것이 하느님께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한 번은 고해성사 하러 들어오신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다 받아들이겠는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우선 먹고 살아야 신앙도 있고 뭐도 있는 거지...”

조금은 성경말씀을 무시하고 또 조금은 비웃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라고 했다가 여지없이 비웃음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비웃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면 그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말하는 이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을 좋아해서 그렇게 말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뿐임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어 자신들의 위선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참혹한 죽음을 안겨주려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보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보며 그 분이 틀렸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인정하는 것을 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을 줘서 더 비웃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신념 안에서 당당하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비웃었던 이들은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왠지 자신들이 예수님께 비웃음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처럼 돈도 좀 원하고 육체적 즐거움이나 권력을 원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끝까지 세상 것들을 원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혼돈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비웃는 사람들을 삶으로 비웃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지 말고 나의 확신대로 살며 오히려 세상을 비웃으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본래 부잣집에서 태어나셔서 돈 걱정 없이 사실 수 있으셨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지의 삶을 택하셨습니다. 그분이 드나들던 문은 보통 사람의 허리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드나들기 위해 최소한의 공간만 구멍을 뚫어놓고 문으로 사용하였고 잠자리도 누우면 그만인 조그만 공간에서 주무셨습니다. 물론 먹는 것, 입는 것도 살 수 있는 만큼만 드시며 사셨습니다. 모든 것을 최소한만 취하며 은근히 부자들을 비웃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의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프란치스코는 그의 삶으로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냈고 이어 친구들과 많은 이들이 그의 삶을 따르려고 몰려들어 그의 동료들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버리고 거지의 삶을 사는 것을 비웃는 친구들을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 혐오스럽게 보이느니보다는 사람에게 비웃음 당하는 것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살기 위해선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하느님께서 혐오하시는 것들입니다. 언젠가 다 사라질 공허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을 추구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라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열쇠’가 있어야 하고, 이 세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열쇠’가 있어야 하며, 이 세상에서 축복 받기 위해서는 ‘십일조의 열쇠’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셋은 다 틀린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어졌고 그것이 각 사람의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보다는 감사와 찬미가 우선이어야 하고, 십일조는 이 세상에서 복 받아 더 잘살기 위해 바치는 조건부 잔금을 치르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기도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개신교에서 십일조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예로 드는 사람이 미국 석유왕 록펠러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업에 십일조를 담당하는 사람만 40명을 둘 정도로 십일조를 철저히 바쳤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만큼 축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록펠러만큼 혐오스런 기업주도 없었습니다. 그는 불법으로 독과점을 하여 무수한 중소기업들을 희생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여 부를 이룬 인물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정부에 의해 행해진 재판으로 그의 모든 사업은 파산하여 사라지게 됩니다.

악덕기업인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록펠러는 말년에 많은 사회적 환원을 하기도 하였는데, 루즈벨트 전 미대통령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그 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든지 간에 그 부를 쌓으며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중소기업 기술 빼앗기, 주가 조작 등 악덕기업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충실히 냈다고 해서 그를 본받아 십일조를 잘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과 계속 어처구니없는 타협을 하며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천주교 신부님들 중에서도 이런 식의 설교를 하시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꿈을 크게 갖고 그렇게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는 양 가르칩니다. 그리고 믿기만 하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헛된 희망을 심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가난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돈 많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아편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싫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엔 종도 자유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가난을 강조하여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속세의 눈으로는 참으로 국가에 도움이 안 되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로마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급격히 쇠퇴하였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그걸로 만족하면 그만입니다. 돈 많은 것이 주님의 축복인양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욕심이 많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주님만으로 충분한 사람은 바오로처럼, 굶고 매 맞고 추방당하고 감옥에 갇혀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혐오하시는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이 큰일에도 성실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에 재물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은 더 높은 단계로 절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육체적인 욕망이나 교만을 절제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는 것처럼, 재물 때문에 슬퍼지고 기뻐지는 사람은 아직 영성에서 작은 것에서도 충실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알게 된 후 한 번도 부유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한 번도 잘 지내지 못한 적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주님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아무 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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