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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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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16 ㅣ No.59997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3 주간 화요일 - 은총과 삶의 변화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소설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과거에 당신이 은혜를 입혀 준 몇 사람을 그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가정 하에 쓰였고 제가 조금 바꾸어보았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한 술주정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젊었지만 이미 폐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은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걷게 만들어 준 사람이군요. 난 당신 땜에 인생을 망쳤어요. 제대로 걸을 수 있으면 뭣 합니까? 아무도 나를 취직시켜 주는 사람이 없고 취직을 해 보았지만 만족한 직업을 하나도 발견 못했어요. 구걸을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이젠 다리가 멀쩡하니 아무도 돈을 주지 않는단 말이요.”

그 다음 예수님은 길에서 한 창녀가 남자들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창녀는 예수님께서 회개 시켰던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창녀에게도 왜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왔는지를 물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구해 준 것 같지만 사실은 더 고독하게 만들었어요. 창녀의 삶에서 나온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너무 고독해서 이렇게라도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어요.”

예수님은 다시 한 불량한 청년이 사람들과 싸움을 하고 있는 장면과 마주칩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당신이 나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군요. 그러나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을 보라고 내 눈을 뜨게 했소?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내 신경을 사납게 한단 말이요. 정말 보이는 것들이 저주스럽고 눈을 뜨게 해 준 당신도 그렇소.”

 

위의 세 사람은 은총을 입었지만 오히려 은총을 주신 분을 원망합니다. 따라서 은총을 주시려고 하시는 예수님도 다음부터는 매우 신중하게 은총을 줄 만한 사람을 고를 것이 당연합니다. 은총을 청하기는 했지만 그 은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죄인인 세리 자케오의 집에 머무십니다. 집에 머무신다는 의미는 그 사람 안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모시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죄인의 집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보신 것은 자케오의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자케오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키는 가장 작았지만 예수님을 가장 많이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위에 올라가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원하고 있는지를 보였습니다.

저도 가끔 행려자들이 돈을 달라고 할 때 그냥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쫓아오는 사람에게는 귀찮더라도 주머니를 뒤져서 돈을 조금 줍니다. 따라오는 정성을 실망시키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도 당신을 가장 바라는 자케오를 실망시키길 원치 않으십니다.

두 번째로는 당신이 베푸실 은총의 열매를 미리 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보다도 자케오에게 은총을 주시면 많은 또 다른 은총의 열매들이 열릴 것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의 소설처럼 은총을 허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회개와 삶의 변화가 이루어 질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실제로 자케오는 회개하여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그 은혜를 나눕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실 선물이 어느 곳으로 가야 가장 많은 은총을 맺게 될지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과 머무는 것보다는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죄인 하나에게 다가가시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성당에 몇 십 년 다녀도 삶이 변하지 않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똑 같이 거짓말하고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이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은총을 받아 삶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은총도 못 받고 삶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자케오처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마음으로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처음에 읽은 이야기처럼 그저 은총만 청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더 안 좋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행려자들은 돈을 구걸하면서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지 또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 어떤 기도를 드려줄 것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런 설명에 진실성이 묻어나면 도와주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구걸하여 그저 술이나 마약을 사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렇게 이미 술과 마약에 취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기가 꺼려집니다. 돈을 주어봤자 자신만 더 망가지는데 쓸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은총을 청하면서 좋은 삶의 보답을 드리기로 약속한다면 하느님은 은총을 더 빨리 더 많이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먼저 은총을 통하여 삶의 변화의 열매를 드릴 마음을 미리 갖고 주님께 청을 드리려 노력해야겠습니다.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인간

 

터키를 여행하면서 라오디케아라는 곳에 갔었습니다. 저 멀리 한 쪽엔 눈이 덮인 고산지대가 있고 반대쪽엔 온천이 솟아나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차지도 뜨겁지도 않아서 입에서 뱉어버리겠다고 꾸짖으시는 라오디케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제가 사제가 되려하면서 걱정하던 것 중의 하나는, ‘혼배성사를 주례하면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지면 어떻게 하나?’였습니다. ‘나의 이상형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때 주례를 서주면서 배 아파지면 안 되는데?’라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 나서 미스코리아와 유명 텔런트의 주례를 해주기도 해 보았지만 부러움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자가 되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만들었습니다. ‘가난’이란 ‘부족함’을 의미합니다. ‘부자’란 ‘부족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무언가 부족해한다면 가난한 것이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오직 그 분 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자인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여자가 필요하고 엽구리가 시리고 가을을 탈 때가 가난했을 때였음을 알았습니다. 여자가 있어도 외로움을 느낄 때가 가난할 때였음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의 사랑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기에, 계속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그런 애정으로 나를 채우려 하지 않기에 더 부자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케오는 남들이 볼 때 더러운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나서는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합니다. 드디어 부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이전에는 가난하여 계속 모아들이려고만 하였지만 예수님을 모시니 남아돌기 때문에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부자여도 나누어 줄 것이 없고,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가난해도 항상 줄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는 말이, “왜 예수님은 세상에 나타나서 우리를 믿게 하지 못합니까?”입니다. 저희는 “도처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즐비한데 왜 굳이 다시 나타나야 합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우리의 참 부모님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태어날 때 그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DNA 검사를 하면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부모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DNA 검사를 한다면 부모는 더 이상 그런 자녀를 자식 취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그동안 보여준 사랑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애인의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고 그 증거를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보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믿지 못하면 집에 가라!”하지 않겠습니까? 직접 보고 믿겠다는 것은 이만큼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기적과, 혹 기적이 아니더라도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면 그것이 ‘장님’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가기까지는 장님이었습니다. 자케오가 나무 위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보려고 하지 않을 때까지는 장님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돈과 쾌락만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아침에 급하게 씻고 학교에 가보니 바지를 안 입고 온 것입니다. 바지를 입지 않은 것도 모른 채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간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한다고 느껴 그 시선들을 의식한다면 나는 영적으로는 벌거벗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나를 판단하시고 사람의 판단은 나의 구원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데, 사람을 의식하며 살게 된다는 것은 내가 어떤 부끄러운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자신을 가리게 된 것처럼, 죄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사람과 하느님의 판단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깨끗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흰 옷을 입은 하늘나라 백성들입니다.

오늘 자케오는 그리스도를 맞아들임으로써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내렸다.”라는 좋은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것, 이것이 부자가 되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벌거벗은 몸을 가리는 흰 옷을 입는 일입니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불로 정련된 금은 성령님을 의미하고, 그 성령님이 안약이 되어 눈이 치료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여 그분의 피와 물로 흰 옷을 입게 되고 아무 부끄러움 없는 ‘양심의 자유’를 갖게 되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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