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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하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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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19 ㅣ No.60074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33주간 금요일 - 마음을 깨끗이



 

대전교구 유 라자로 주교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대학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 동정 부부 순교자인 유정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두 성인은 서로 명문가와 부잣집에서 태어나 첫 영성체를 하며 그 깨끗한 마음을 오롯이 그리스도께만 드리기로 서원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 것을 처음부터 결심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문가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수치였기 때문에 주문모 신부님께서 혼인을 주례하시고 두 사람은 서로 오누이로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10번 가량 동정을 잃을 위기가 닥쳤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서원을 지킬 수 있었고 서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이 두 분은 동정의 순결함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함과 동시에 부부로서의 인간적인 사랑 또한 지니고 살았던 보기 드문 케이스의 분들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박해 상황이 아니니 이런 혼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 참다운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임을 삶으로 보이신 분들입니다. 이순이 루갈다 성녀는 14세 때 첫영성체를 하고 정결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으며, 20살에 순교하였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의 옥중 편지는 항상 어머니와 누이들을 걱정하는 말들뿐이었습니다. 휘광이가 그녀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스스로 옷을 벗고 칼을 맞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이런 모든 것들이 영원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주교님은 단순한 교리만 배웠지만 이러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던 한국의 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보면 많은 신학을 배웠으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시는 당신 자신이 부끄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 곳에 함께 참석하였던 신학을 배우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순교자들은 단순한 교리만 가지고도 그렇게 큰 믿음을 지닐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많이 듣지만 이유는 바로 땅에 있을 것입니다. 씨는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그 열매는 서로 다르게 맺혀집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풀 위에 내린 똑 같은 아침 이슬이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이단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에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다인들이 잡으려 하였지만 군중들 때문에 잡지 못하였고, 당신이 사랑하시던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배반함으로써 잡히시게 되었습니다. 그 유다도 배우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뱀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만 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의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우리 각 개인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사시고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이 안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운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안다고 교만해진다면 공부를 포기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때,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배우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올바른 의도를 지녔다면 다시 시작해도 됩니다. 그러나 무작정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공부만 한다면 영리한 악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중요한 손님이 오실 때 안 쓰던 커다란 상을 꺼냅니다. 잘 보관해 놓아서 먼지도 없는 것 같은데 음식 그릇을 놓기 전에 먼저 행주로 상을 닦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면 정말 더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세한 먼지들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릇을 놓은 다음에 상 위를 닦는 것은 더 어렵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미사 때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미리 죄의 고백을 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닦아야지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게 되면 뒤처리가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배우기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알아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

 

가끔은 집을 나설 때 눈에 처음 들어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희 기숙사 옆에는 한국 순교자를 기념하는 작은 광장이 있고 그 곳 주위엔 몇 분의 성인들의 동상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손님이 와서 “저 동상들은 어떤 분들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저의 대답은, “네, 저기 동상들이 있었군요!”였습니다. 기숙사 앞쪽에 그것도 쉽게 눈에 보이는 곳에 항상 있던 것도 관심이 없으니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수능이 있는 날입니다. 저의 큰 조카가 고 3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 주어야하는데, 이일 저일로 바쁘다보니 오늘이 시험날인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전날이라도 기억해 내서 다행입니다. 신부삼촌을 두었는데도 기도를 못 받을 뻔 했습니다. 내가 마땅히 신경 써야 할 것에 신경을 못 쓴다는 것은 우리나라말로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기에 결혼한 사람들보다 특별히 챙길 사람도 많지 않은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살다보면 부모님 생신도 잊고 지나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뭐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후회막급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전을 “정신없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산란한 곳에서는 집중을 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인데, 그냥 정신없는 집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한 열정으로 당신이 가장 싫어하시는 폭력까지 쓰십니다.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폭력보다 더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감실의 문이 쪼개져서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하느님이 외적인 공간 안에 숨어계시지 않고 사람 마음에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전은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 마음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까? 우리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께 하루에 몇 번이나 말을 걸고 있습니까? 만약 삶이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분께 말씀을 걸고 그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 우리 또한 성전에 대한 열정으로 폭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나의 정신을 빼앗아가고 있는지 찾아내서 채찍으로 치고 밖으로 쫓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이 못 견디시고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떠나신 예루살렘은 성전 파괴와 멸망 외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시는 것이 육체적인 죽음보다 훨씬 심각한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와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뱀에게 정신이 팔려서였고, 아담이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은 하와에게 정신이 팔려서였습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으면 내 안에 하느님이 계셔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간 바오로처럼 지금까지 추구하던 것을 완전히 버릴 준비를 하지 않으면 내 안의 성전은 여전히 장사꾼들로 북적이게 될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리스도와 영적 혼인을 경험하고 단 한 순간도 당신 마음 안에 머무르시는 그리스도를 잊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항상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분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은 잊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성체조배를 하고 나올 때, 문득 오랜 시간 앉아있었으면서도 성체 안에 계신 분과 한 마디도 안 하고 다른 생각만 하다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그 분이 말을 걸어주시기를 바라며 계속 나만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성전을 향한 열정이 우리 마음을 불사르게 합시다. 오늘부터라도 다만 한 두 마디라도 우리 마음 안에 계신 분께 말을 걸어봅시다. 그 분은 뛸 듯이 기뻐할 것이고, 비로소 우리 ‘마음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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