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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증거자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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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1-24 ㅣ No.60204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4 주간 수요일 -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제가 로마에서 포르투갈 기숙사에 머물고 있을 때 포르투갈 신부님들 중에서 일본에서 선교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저에게 일본의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어보았냐고 했습니다. 저는 이름도 못 들어봤다고 했는데 옆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조금 창피했었습니다. 사실 그 분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들로 박사 논문을 쓰신 분입니다.

이 소설은 포르투갈, 로마, 일본의 사료를 정밀히 조사한 실화 역사소설입니다.

페레라(Christopher Ferreira) 신부는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던 국제적 인물이었는데, 그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보고가 포르투갈에 전해졌습니다. 격분한 그의 제자 세 명이 소식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적해 들어갑니다.

그 중 한 명인 로드리고(Sebastian Rodrigues)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도 결국은 체포되어 '후미에' 앞으로 끌려갑니다. '후미에'는 예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인 것인데,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예수를 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 앞에 섰을 때, 그것은 너무나 많이 밟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그러진 얼굴이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울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몹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 같이 보였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보던 왕관을 쓴 예수, 백인들이 편안하게 믿는 승리자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울고 함께 괴로워하는 예수였습니다.

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후미에의 예수가 말합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주여, 저는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원망했습니다."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가 예수 상을 밟는 순간 새벽닭이 웁니다.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 베드로의 괴로움을 예수께서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 괴로워하신 것처럼.

 

줄거리만 읽어도 마음이 찡해옵니다. 아마도 장렬하게 순교한 분들보다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과 더 흡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정말 그 옛날 순교자들이 어쩌면 저런 고난을 이겨내면서 순교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순교할 자신이 없습니다.

1840년 1월 30일 순교하여 103위성인 가운데 오른 허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 끌려갔는데 심한 혹형으로 배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을 뉘우치고 즉시 재판관을 찾아가서, "나는 죄를 지었으나 지금은 그걸 뉘우칩니다. 입으로는 배교하였으나 마음으로는 교우였고 지금도 교우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재판관이 그를 다시 옥에 가두었는데 옥사장들이 그를 괴롭히며, "말로 취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네가 뉘우친다는 표를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소변이 가득 찬 통을 가리키며, "네가 참으로 뉘우친다면 여기 사발이 있으니 저 통에 있는 것을 퍼서 먹고 마셔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허임은 서슴지 않고 그것을 한 사발 듬뿍 퍼서 단숨에 삼켜버리고 다시 뜨려고 하니 옥사장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둬. 그렇지만 여기 십자가가 있으니 네가 배교하기 싫거든 십자가 앞에 엎드려라." 허임은 꿇어서 이마를 땅에 대고 조아리며 배반하였던 예수를 온 마음을 다해 통회하고 예배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배교를 취소하고 심한 매질과 함께 옥중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게 됩니다.

 

위 이야기는 수많은 순교 이야기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분들은 신학을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교리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누가 그렇게 순교하고 싶은 열망을 넣어주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박해를 받을 때가 당신을 증언할 가장 좋은 기회라 하시면서 아무 걱정도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아주 단순한 진리이지만 그 순간이 오면 그리스도께서 손수 우리에게 힘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로드리고 신부처럼 예수님의 뜻을 밟고 살아가기 일쑤인 우리들, 위의 허임 바오로처럼 극단적인 증거는 아닐지라도 조용히 이렇게 기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예수님, 제 안에 계신 예수님, 당신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에게 성인들에게 주셨던 힘을 나누어 주시어 오늘 아주 작은 일에서 당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하소서.”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그런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그런 박해까지도 받아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성인들은 순교만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의 작은 순교도 힘겨워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작은 희생이라도 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그것을 원하는 마음입니다.

 

증거자 성령님

 

한 신학생이 잠만 자고 공부도 안 하고 미사나 기도도 안 나오고 해서, “네가 그러면서 나중에 신부돼서 성당에 미사 늦거나 안 나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할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자들이 내가 이러는 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강론만 잘 하면 되지.”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나무라는 제게 서운해서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것 하나는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즉, 증거 하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란 것을 말입니다.

사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물론 성사거행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제가 되기 위해 성사거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의 봉사입니다. 미사집전과 같은 성사거행은 서품을 받은 사제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유효합니다. 따라서 훌륭한 사제와 그렇지 못한 사제는 얼마만큼 말씀의 봉사에 투자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실상 사도들도 외적인 일에 너무 바빠서 말씀의 준비를 할 시간이 부족하자, 외적인 일을 맡길 7부제를 뽑고, 자신들은 말씀의 직무에만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봉사가 말만 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교구 사제들의 주보성인이십니다. 그 분은 말재주가 없었었습니다. 한 번은 일주일동안 준비한 주일강론을 미사 때 가져오지 못해서 강론 시간에 잠깐 주저하다가 그냥,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한 마디만 하고 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 말솜씨 없는 한 시골 사제에게 냉담하던 그 마을 사람들은 다 성당에 나오게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분은 평균 하루에 16시간을 고해소에서 꼬박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상대가 설득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는 결혼한 이후에 술 담배 끊으시라고 아버지께 수십 년이 넘게 잔소리를 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담배와 약주를 좋아하십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목격하고도 대담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고부터였습니다. 성령 강림 날 그들은 숨어 지내던 곳을 박차고 나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날 베드로의 강론에 3천 명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의 능력은 베드로에게서가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증거자 성령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언제 아버지를 증언하기 시작하셨습니까? 바로 당신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이 그 위로 내려오고 난 이후부터였습니다.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을 아들에게 알려주고 아들은 성령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 아들은 아버지의 계시가 되었습니다. 즉, 아무리 유창한 말로 강론을 준비하여도 그 안에 성령님이 안 계시면 그 증언은 헛된 울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변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증거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생명력을 얻고, 그리스도인은 말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싶다면 말하는 기술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성령님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즉, 삶이 깨끗하고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이 이단으로 빠지고 잘못된 길로 순수한 신자들을 빠뜨렸는지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나니아의 안수로 성령님을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올바로 보게 되고 그 후로 전 세계를 누비며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 드릴 것은 그분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증언을 하였느냐 입니다. 그러나 먼저 어떻게 주님을 증언할 것인가에 앞서서, 내 삶이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오실 수 있는 삶인지 먼저 뒤돌아보고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만 모시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되고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사시며 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 평화를 너에게 주노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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