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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과 셋 (창세4: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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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5-06 ㅣ No.120286

 

 

 

공동번역성서

 

 카인과 아벨과 셋
(창세4:1‐9,25)

 

1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2 하와는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3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4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5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6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7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어야 한다.' 

 

8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 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9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 이제 또 다른 아들을 주셨구나.' 하며 이름을 셋이라고 지어 주었다. 

 


 

 지난번에 창세기 3장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창세기 3장의 대 주제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불칼과 거룹들로 막혀진 생명나무열매로 향하는 길을 보면서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과 죽으심으로 열리게 되고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무죄한 상태로 생명나무열매를 먹게 될 것이라는 회복의 메시지를 보았고,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시는 하느님의 저주 속에서도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될 하느님의 백성들의 회귀(回歸)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축복의 장소였던 동방이 하느님이 떠나시자 저주의 땅으로 둔갑을 해 버렸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다시 그 저주 의 땅에서 쫓아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신다는 회복의 메시지가 창세기 3장안에 숨어서 흘러넘치는 복음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확인을 했습니다.
이제 4장부터는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불칼과 거룹들을 통과하여 생명나무열매를 먹게 된 하느님의 백성 즉 여인의 후손의 라인과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의 은혜 밖으로 떠나간 뱀의 후손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친밀하게 간섭하시며 한 쪽은 저주의 땅으로 몰아가시고 한 쪽은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손길 또한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구속사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아담의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은 수많은 아담의 자손들 중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대표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거의 천년을 살았습니다. 그 둘은 천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창세 5:4‐5)   4 셋을 낳은 다음 아담은 팔백 년 동안 살면서 아들 딸을 더 낳았다 5 아담은 모두 구백 삼십 년을 살고 죽었다. 

 


4절의 자녀를 ‘낳다‘’야라드‘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와우 계속 형입니다. 그 말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수학자가 아담과 하와가 평생 동안 낳은 자식들과 그 후손들의 자녀들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니 아담이 죽을 때쯤의 전 세계 인구가 10억 명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때는 전 세계인구가 거의 20억에 육박했을 것이라 발표를 했습니다. 왜냐하 면 당시에는 사람들의 수명이 거의 천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인구 증가율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컸을 것이기 때문입니 다. 태어나는 사람은 많은데 죽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카인이 하느님께 저주를 받아 버림받는자가 되었을 때 ‘하느님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면 어떡합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질문이 되겠지요?  많은 분들이 ‘카인과 아벨 당시의 인구가 달랑 네 명이었는데 또 누가 카인을 죽 인단 말인가?’하는 질문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그 질문은 우문(愚問)입니다. 카인과 아벨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아담 의 후손 가운데 신앙의 대표자와 불신앙의 대표자로 섰던 것이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구의 인구가 달랑 네 명은 아니었다는 말입니 다. 아담이 구백삼십년을 살았고 카인의 동생인 셋도 구백 십이년을 살았으므로 카인도 천년 가까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카인은 아벨을 죽인 이후에도 수억의 친지들과 함께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죽일까봐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아담의 후손들 중에 카인과 아벨 두 사람이 하느님께 선택이 되어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은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선택을 하신 카인과 아벨을 통해 교회에게 전하시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4:1)   1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동쪽인 저주의 땅으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동침을 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첫 아이가  ‘카인’이라는 아이입니다. 카인을 낳은 하와는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I have got a man  the Lord''내가 야훼 그 분을 얻었다’ 라는 뜻이 됩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언뜻 보면 이해가 잘 안가는 구절입니다. 내가 야훼를 얻었다는 말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그래서 성경을 번역한 사 람들이 이 구절을 곡해해서 임의대로 ‘말미암아‘ ’from'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민’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내가 하느님으로 말 미암아 아이를 얻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느님을 낳 았다‘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야훼다, 다른 말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메시아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창세기 3장 15절과 연결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이가 하느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신, 자신들을 구원해 줄 여인의 후손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맏아들은 여인의 후손의 라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개념 정리를 해 드리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계속해서 여인의 후손 이라는 단어와 뱀의 후손 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쓸 텐데  그 개념을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이해가 용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뱀이(사탄) 여인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 를 물고(십자가)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다’ 라고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뱀의 머리를 밟으신 여인의 후손 안에 한 무리가 들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敎會’입니다. 따라서 여인의 후손 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던 교회, 즉 聖徒도 ‘여인의 후손’이라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15:4‐5)   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 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5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 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날 약속의 자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하늘의  뭇 별들을 보여주십니다. 그에게서 날  약속의 자손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그만큼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손‘’제라‘라는 단어가 단수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후손을 자손들이라고 복수를 쓰지  않으시고 ’제라‘라고 단수로 쓰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 한 명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신약에서 이 구절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구절의 진의를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라 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15장 5절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이 택하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한명 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子孫  안에 뭇별처럼 많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聖徒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영적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창세전에 택하심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들어 있는 교회를 지칭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의 후손’으로 혼용하여 부르더라도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union christ의 개념은 오늘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 아담과 하와는 카인을 낳고 그 아이가 여인의 후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크게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 이름을 ‘아벨’이라 지은 것입니다. ‘아벨’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하벨’은 ‘nothingness'   혹은 'vanity'라는 뜻입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 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에 쓰인 ’헛되다’가 바로 ‘하벨’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기대 속에서 카인을 낳은 후에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잘 드러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은 하느님께서 그 아무것도 아닌 자인 ‘아벨의 제사’를 즐겨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말은 그 아벨이, 타락 후 둘로 갈라지게 되는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 손 중 바로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라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장남과 차남이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여인의 후손의 그림자로 등장하는 아벨이 카인보다 무엇을 대단하게 잘 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단지 다른 것은 카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고 아벨은 양을 죽여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부분을 가리켜 아벨은 피가 있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고 카인은 피가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즐겨받지 않으신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구원은 제사를 드리는 자의 제물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결론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하심에 우리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것도 근거나 조건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인이 버려지고 아벨이 선택을 받은 것은  그들이 드린 제물의 내용 때문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히브11:4)  4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의인이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에페2:8)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하느님이 주신 믿음’ 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 그의 제물이 특별해서 혹은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이들과 달라서 하느님이 그의 제사를 즐겨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일3:12)  12 그리고 우리가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카인은 악마의 자식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자입니다. 그가 동생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동생이 한 일은 옳은 일이었는데 자기가 한 일은 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카인은 惡한 자에게 속해서 악한 일을 한 것이고 아벨은 善한 분에게 속해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단지 하느님께서 아벨을 하느님의 것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느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셨 던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4장에 벌써 'unconditional election' 선택과 버림의 敎理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그 선택과 버려짐의 교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로마9:10‐16)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14 그렇다고 하느님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고 말씀하셨듯이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로마서의 선택과 버림이 창세기 4장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공로나 노력이나 열심도 하느님께 구원의 근거로 드려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들이 타락을 하고 저주의 지옥을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을 때에 그들중 어떤 자들을 선택하셔서 하느님의 은혜의 장중(掌中)으로 끌어올리시는 것 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남은 자’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이사10:20‐23)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가문의 생존자는 자기들을 치기나 할 자를 다시는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느님 야훼를 진심으로 의지하리라.  21 남은 자가 돌아 온다. 용사이신 하느님께로, 야곱의 남은 자가 돌아 온다.  22 이스라엘아, 너의 겨레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살아 남은 자만이 돌아 온다. 파멸은 이미 결정된 것, 정의가 넘치리라.  23 주, 만군의 야훼께서는 이미 정하신 파멸을 온 땅에 이루시리라. 
 
하느님의 저주를 받고 저주의 땅인 동쪽으로 쫓겨난 자들 중에 거룹들과 불칼을 통과하여 다시 생명나무열매로 돌아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 이후에 그 남은 자의 첫 번째 모델로 바로 오늘 본문의 아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저주받은 ‘카인’이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저주의 땅 동쪽으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카인으로 대표되는 그 저주받은 인간들이 드리는 어떤 것도 즐겨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즐겨 받지 않으셨다‘라는 단어는 ’쳐다보 지도 않으셨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왕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과 하늘을 희망하는 자들이 아니고 땅을 섬기고 땅에 노예가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카인을 ‘농부’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 단어를 원어로 보면 ‘아바드’ ‘땅을 섬기는 자’ ‘땅의 노예가 된 자’ 라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 목매고 있는 자들은 하느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벨’이라는 남은 자가 생명나무열매를 먹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타락을 하자마자 즉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남은 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창세기부터 시작하셔서 요한묵시록의 거룩한城 새 예루살렘까지 점진적으로 설명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잘 보시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여인의 후손, 즉 남은 자들을 남겨 가시는 방법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쪽에서 기대하고 내어놓는 장자들을 모두 물리시고 기대치 않던 자들을  택해서 남겨 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담과 하와의 기대를 잔뜩 안고 태어난 장남인 카인을 버리시고 그 부모가 ‘nothingness, vanity'라는 이름을 지을 만큼 기대와는 거리가 먼 ’아무 것도 아닌 자‘’아벨‘이 여인의 후손의 라인으로 등장을 하지요?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장자인 이스마엘이 유기(遺棄) 되고 차자인 이사악이 선택을 받습니다.
이사악의 자손은 어떻습니까? 장자인 에사오가 버려지고(遺棄 되고) 차자인 야곱이 선택을 받습니다. 야곱과 에사오를 비교할때 야곱은 에사오에 비해 훨씬 弱하고 사기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야곱을 뱃속에서부터 선택을 하셨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지 않으세요?
야곱의 자손은 어떻습니까?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 돌아가지요? 르우벤은 庶母를 범했기 때문에 장자권을 박탈당하지요? 따라서 그는 아닙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1역대 5:1‐2)  1 이스라엘의 맏아들 르우벤의 계보. 그는 아버지의 소실을 범한 탓으로 맏아들의 상속권을 동생 요셉의 두 아들에게 넘겨 주고 맏아들이면서도 족보에 맏아들로 오르지 못했다.  2 유다가 동기들 가운데서는 세력이 컸으므로 그의 혈통에서 영도자가 났으나 장자권만은 요셉에게 있었다. 

 


장자권은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다와 레위, 그리고 요셉에게 장자권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창세기 49장을 講解할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야곱의 자손들 중에서도 장자가 아닌 기대치 않았던 사람에게 장자권이 넘어갑니다.
요셉의 자손은 어떤가요? 야곱이 요셉의 장자인 므나쎄에게는 좌수(左手)를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우수(右手)를 대고 안수를 합니다. 역시 장자권이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넘어갑니다.
다윗은 어떤가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장자입니까? 이새의 막내입니다. 워낙 어리고  볼품없어서 전쟁터에도 못 나가고 형들 도시락 배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형이 없었나요? 나단과 압살롬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여인의 후손의 라인에 장자들이 선택되지 않고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기대치 않던 사람들이 선택이 될까요?
  하느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구원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을 깨는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은  구원에 관한 한 절대 기여할 수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다는 것을 교회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져야 한다는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창세기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 부분을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풀어서 설명을 해 줍니다.
   (1고린 1:26‐29)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8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만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은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열심이나 공로도 구원의 근거로 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버림의 敎理가 오늘 본문인 창세기에 벌써 이렇게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장자들은 유기(遺棄)해 가시면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첫 것들을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출애22:19,29‐30)   19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죽여야 한다. 제사는 야훼께만 드려야 한다.   29 너희 소나 양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 이레 동안은 어미 품에 두었다가 여드렛날에는 나에게 바쳐야 한다.   30 너희는 나를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다. 그러니 들에서 맹수에게 찢긴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아라. 그런 것은 개에게나 던져 주어라. 

 


이 모습이 바로 ‘아벨’ ‘nothingness, vanity'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벨‘의 모습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에게 살해를 당했습니까? 자기들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제사를 열심히 드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해서 하느님께 다가가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 를 드러내시는 의인이신 주님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카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카인은 자신이 드리는 제사의 행위와 제물로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들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 을 줄 알았습니다. 혹시 이 중에 ‘그게  뭐 나쁜 일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나 인간이 드리는 어떤 제물로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어떤 것을 해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을 ’自己 義‘라고 하는 것입니다.
 (루가18:11‐12)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바리사이인들의 열심을 보십시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 속에 불의 , 간음,  사기가 없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고 십일조를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아주 엄격하게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의 행위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이 바치는 제물이나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의 삶과 그들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하느님께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을 의지하여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느님의 처분에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처분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고 원망스러워도 하느님께 대들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느님께  해 드린 것이 없고 앞으로도 해 드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는 거룩한 삶과 행위들은 하느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나의 옛사람이 죽어가며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그 것을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예수님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내 행위를 값없다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와 똑같아요? 카인과 똑같지요?
오늘 본문의 카인이 정확하게 예수님을 살해한 세상의 무리들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창세4:5)  5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믿음으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설사 하느님께서 그 제사를 안 받으신다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내가 나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드리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심히 분해합니다. 그리고 안색까지 변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그렇게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하는 자들과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자들에 의해 살해당 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후손을 대표하는 자의 이름이 ‘아벨’'아무 것도 아닌 자‘인 것이고 그 가 세상에게 살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성경이 분명 아벨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예표였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12:24)  24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게시고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 
  
아벨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죽음은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가 온전한 제사였다는 증거 입니다.
 성막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듯이 일 년에 한 번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올릴 때 그 제사가 조금이라도 부정하거나 흠이 있는 제사이면 제사장은 그 지성소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제사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사였을 때 대 제사장은 그 지성소를 살아서 나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 도 없는 제물이신 예수가 자신을 제물로 드려 대 제사장으로 하느님 앞에 나가신 것이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온전하게 드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볼까요?
(창세4: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 이제 또 다른 아들을 주셨구나.' 하며 이름을 셋이라고 지어 주었다. 
 
여기서 ‘대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쉬트‘는 ’두다, 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여인의 후손의 그림자로 왔던 죽은 아벨 대신 셋’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셋‘은 죽은 여인의 후손의 재등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카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십자가의 삶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세상 힘의 원리에 맞아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바로 그 삶이 ‘셋’으로 부활하는 삶이라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벨을 예언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렇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벨과 같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늘 카인이라는 세상의 공격에 노출 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21세기의 카인들에게 늘 맞아 죽는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릴 때려죽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듭니다.  그 때 죽어 주세요. 져 주십시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부활이라고 합니다. 맞아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 탄생했습니다. 세상에게 맞아 죽은 자들의 삶을 밖에서 보면 사랑이요,  인내요, 온유요, 절제요, 용서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탄생하게 될 영 광스러운 부활의 새 사람 ‘셋‘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에게 맞아죽은 우리의 죽음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정말 부활을 기다리십니까? 부활을 하려면 죽어야지요. 나의 옛 사람의 죽음이 없이 어떻게 부활을 기대하십니까?  다 같이 열심히 죽읍시다.      

 

 

배운것입니다. 참고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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