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17(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독서, 복음서 주해

스크랩 인쇄

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6-16 ㅣ No.147616

1독서<나는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터2서 말씀입니다. 11.1-11

형제 여러분,

1 아무쪼록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2 나는 하느님의 열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 시켰습니다.

3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4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5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6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일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7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8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9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0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아카이아 지방에서는 나의 이러한 자랑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11 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해제.역주 정영모 신부님)

2

야훼는 열정적이고 질투하는 신이라 결코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 준수를 철저히 요구하신다. 바오로 역시 열정이 넘치고 질투하는 사도인지라 결코 적수들을 용납하지 않고 고린토 교우들에게 그리스도 신앙 고수를 강력히 요구한다.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약혼 또는 결혼 관계로 묘사하곤 했다. 바오로는 같은 은유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서술한다. 양자의 현재 관계는 약혼이요,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재림할 때의 관계는 정식 결혼이라는 것이다. 같은 내용의 은유가 에페5.23-32: 묵시 19.7-9: 21.2-9에도 나온다.

 

3

뱀이 하와를 속인 이야기를 발전시켜서 묵시문학계와 율사문학계에서는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와로 하여금 음행의 죄를 짓게 했다고 한다. “너그러움의 빈도에 관해서는 순결은 일부 사본에는 없으나 파피우스 46호 시나이 사본 초고, 바티칸 사본 등 중요한 사본들에는 들어 있다.

 

4

적수들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서 밖에서 고린토에 들이닥치는 단순히 바로로의 사도직을 헐뜯을 뿐 아니라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했으나 저들은 그리스도론은 왜곡한 이단자들이었다, 그러나 바오로가 이들의 그리스도론 이단을 지적만 할 뿐 전혀 그 내용을 노하지 않으니. 우리로서는 이단 사상의 실체를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우후죽순마냥 가설들만 무성할밖에. 한 예로 고린토 2서에 나오는 적수들은, 전에 갈라디아 교회에 잠입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전도사들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에서는 갈라1.6다른 복음2고린11.4다른 복음을 동일시한다. 그렇지만 고린토 2서의 전부를 훑어봐도 할례, 율법, 안식일 등의 문제가 논의되기는 고사하고 그런 낱말조차도 없으니, 여기 바오로의 적수들이 유다교회를 주장한 사람들이었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5

거물급 사도들기둥처럼 존경받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급 사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이 있었으나 오늘날엔 지지를 받지 못한다. 실제로 적수들 자신이 거물급 사도들로 뽐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바오로가 적수들을 비꼬아 그런 표현을 창안했을 스도 있겠다.

 

6

바오로는 말주변도 지식도 서투르다고 적수들이 헐뜯었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말주변이 서투르다는 점은 자인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여기 지식이란 하느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7

7-11: 바오로는 교우들로부터 생활비와 전도비를 받을 권리가 있었건만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했다. 혹시라도 복음선포에 지장이 있을세라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노동해서 겨우겨우 생활비와 전도비를 마련하곤 했다. 이런 사실들은 1데살2.9:1고린9.4-18: 3ㄱㅎ란2.7:11.7-11.20:12.14-18에 잘 드러난다. 경비가 부족할 때에는 마케도니아 지방 교우들로부터 특히 그 지방 필립비 교우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마케도니아 교두들은 바오로가 무사무욕한 사도임을 인정한 까닭에 그가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도 아무런 오해의 터무니가 없었던 것이다.

 

10

이 문구도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도 맹세문이다.

 

 

 

복음<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 역주 정양모 신부님)

7

바알 신의 제관들이 바친 기도. 우리나라 굿판에서 무당들이 주워섬기는 기도는 몹시 스다스럽다. 네팔 절간에는 무당들이 주워섬기는 기도는 몹시 수다스럽니다. 네팔 절간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담긴 원통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신도들이 예배하러 와서는 기도물레들을 빙빙 돌린다. 한 번 돌릴때마다 원통들 속에 적혀 있는 무수한 기도를 다 바친 셈이라 한다. 기도 때 수다를 떠는 까닭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해서라도 수원을 이루겠다는 것이요 하느님이 우리의 소원들을 모르고 계실세라 가르쳐 드러야겠다는 것이다.

 

8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계시니 기도할 필요가 없는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청원기도를 드리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친히 찬양과 감사 기도를 드리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친히 찬양과 감사 기도를 바쳤을 뿐 아니라 게쎄마니에서 청원기도를 드리셨다. 예수님의 저 감동적인 청원기도를 본받아 우리가 청원기도를 바칠 때도 자기 뜻을 관철하겠다는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9

루카 11.2에서는 단순히 아버지라고 부른다. 마태오는 그 앞에다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한다. 마태오식 호칭이 이 당시 유다교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당대 유다교인들이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른 사례도 더러 있다. “우리 아버지라 부른 사례는 매우 흔하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라 부르셨다. 예수님의 영향을 받아 사도 바오로와 그가설립한 여러 교회 교우들도 하느님을 감히 아빠라 불렀다. 루가 11.2 그리스 역문에서는 하느님을 점잖게 아버지라고 하지만,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아람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는 아빠라 하셨을 것이다. 아빠는 본디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므로 아이말이다.

부자지간에 정이 두터우면 아이가 어룬이 되고서도 아버지를 보고 아빠라 하는 수가 있었으니 가족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빠는 매우 정다운 호칭이다. 예수님.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아빠라 부른 이면에는 자기네야말로 하느님 아빠의 귀여운 아이들이라는 자아의식이 깔려 있다. 유다교인인들은 예나 이제자 절대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불결스럽다는 것이다.

 

오늘날 구미 여성신학계에서는 성서의 가부장적 표현에 반기를 들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대신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어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유다교.그리스도교.이슬람보다 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힌두교가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10

당시 유다교인들이 바치던 카디쉬 기도문에도 같은 뜻의 청원이 나온다. “그분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분의 크고 이름이 높이 되고 거룩하게 되소서.” 첫째 청원의 뜻을 새기면, 하느님 아빠의 거룩한 이름이, 곧 아빠의 거룩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빈다. 지금 꼭꼭 숨어계신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이 어떻게 해서 환희 드러날 수 있을 까?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그렇게 된다.

 

6.10ㄴ은 마태오의 가필이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보면 두 가지로 대별된다. 우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 구체적 사례로 산상설교에 나오는 예수님의 율법해석을 들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 그럼 마태 6.10에 있는 아버지의 뜻은 무슨 뜻일까? 앞 문맥과 연결시켜 풀이해 보면, 하느님의 나라가 와서 말에서도 당신의 구원의지를 이루시기를 비는 청원이겠다. 그러니까 10절에 있는 하느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의지요 부차적으로 하느님의 윤리의지라 하겠다. 이쨌든 마태오에 따르면 하느님의 뜻은 종말에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루어진다. 게쎄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라(26.39.42)

 

11

여기서 일용할이라고 옮긴 그리스어 형용사 에피유시오스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낱말이다. 그 뜻을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어원을 따져본다면 생존 필수적이란 뜻이 들어 있다. “생존 필수적을 의역한다면 필요한“. ”일용할이 된다. 실제로 시리아 역본에서 이렇게 번역했다. 그닐카 교수가 지지하는 설로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

 

어원 분석 결과 또 한 가지 가능한 번역이 있는데 곧 에피우시오스를 내일로 옮길 수 있다. 이같이 번역하면 넷째 청원은 이렇게 된다. “우리의 내일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모레 글피 빵까지는 구하지 않지만 내일 빵만은 마련해 주십사는 것이다. 히에르니무스 교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실제로 히브리 복음서에서는 히브리어로 마태 6.11을 그렇게 썼다 한다. 룻즈 교수가 지지하는 설이다.

 

내일을 오늘과 모레 사이의 하루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미래로 알아들을 수 있다. 미래라도 보통 미래가 아니라 엄청나게 큰 미래. 곧 종말 미래로 풀이하는 설이 있는데 이 설에 따라 넷째 청원을 의역하면 이렇다. “우리의 종말 미래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이는 종말을 재촉하는 청원이다. 예레미야스 교수와 브라운 교수의 설이다.

 

12

빚은 죄를 가리키는 상징적 낱말이다. 실제로 예수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에서는 호바가 빚과 죄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만 하느님에게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은 14-155.23-24에도 선명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먼저 하느님의 자비 지극한 용서를 체험해야만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아량이 생길 수 있다.

 

13

어떤 유혹?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이 예수께 배워 나날이 바친 제자들의 기도라는 사실에 유념한다면, 여섯째 청원의 유혹은 제자됨으 포기하라는 유혹이겠다. 게쎄마니에서 여러분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라고 하신 말씀도, 깨어 기도해야만 예수님을 버리고 제자됨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일곱째 청도는 마태오의 가필이다. “의 그리스 원어를 중성으로 보면 악에서 구하소서가 되고 남성으로 보면 악한 자에게서 구하소서된다. 아마도 후자가 옳을 것이다.

 

#. 용서하면 용서받는다

마태오는 12절에 있는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코자, 용서하면 용서받는다는 단절어를 여기 배치했다. 이 단절어의 변체가 마르 11.25에 실려 있다.

 

 

 

 

 

200 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35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