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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봉헌과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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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2-01 ㅣ No.60357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제 1 주간 수요일 -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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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세관의 검사관으로 일하던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매우 걱정하는 표정으로 집에 들어갔고 조심스레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아내는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이 해고가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에요.”

그리고 아내는 현금뭉치가 든 작은 가방을 가져와 꺼내 놓으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나 해서 당신 봉급에서 지금까지 따로 마련해 놓았어요. 당신이 글을 쓸 동안 우리는 이 돈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남편의 이름은 나다니엘 호손이고 그가 그렇게 해서 쓴 소설이 유명한 ‘주홍글씨’입니다.

‘주홍글씨’나 ‘큰바위 얼굴’과 같은 위대한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에 어떤 누구도 호손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아내와 함께 받아야 정당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무엇을 이루어냈을 때 그것이 누구의 공로인지 정확히 나눌 수 없습니다. 물론 뛰어난 재능으로 글을 쓴 사람은 남편이었지만 그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아내도 남편과 함께 같은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두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도 마찬가지로 부부와 같이 한 몸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으로 큰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당신 혼자 하시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함께 협조할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를 지고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의 죄를 위해 모든 보속을 해야 더 완전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 혼자 모든 것을 이루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예수님의 보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그분의 수난 공로에 동참하는 것이고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 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조건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무엇이 좀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드립니다. 제자들은 벌써 자신들의 것을 내어놓으면서 그 분의 기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돌로 빵을 만들고 풀로 물고기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굳이 제자들에게 당신의 기적에 쓰일 무엇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길 원치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하시고는 그 나누어주는 역할을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사제들이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나누어주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는 것에 비하면 그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한다고 말 할 수조차 없는 작은 부분이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사제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당신 구원사업에 참여케 하십니다.

물론 그 이유는 우리를 당신 모든 일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신이 받으실 영광을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으로서 당신과 같은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해 우리의 내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공동 구속자’에 대한 논의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주 이 말을 자주 성모님의 별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도 당신 구속 사업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를 원하셨다면 성모님이야 얼마나 큰 역할을 했겠습니까? 단적으로 성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성자께서는 온전한 방법으로 육체를 취하실 수 없으셨고 그렇게 구원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희생 제물이 될 깨끗한 육체를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또 십자가 밑에서는 예수님께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사제들이 미사를 공동 집전 한다고 해서 뭐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미사는 주례 사제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공동 집전을 한다고 합니다. 이 공동의 의미는 ‘함께 (With)’라는 뜻이지 주례 사제의 역할을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도 예수님의 수난 공로에 단 한 점도 보태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써 그 구원 사업에 도움이 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라 불러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와 함께 영광을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도 당신의 수난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그분 십자가 위에서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는 우리들이 됩시다.

 

봉헌과 은총

 

성인들의 계산방법은 보통 우리 인간의 계산법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학교를 나오지 않아서가 아닐 텐데도, 그들의 믿음은 학교 때 배웠던 수학의 법칙을 뛰어넘습니다.

오상의 비오성인은 생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병원 신축이 꿈이셨습니다. 물론 가난한 수도자가 지닌 돈은 없었으나, 하느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될 것이라 생각하고 모인 돈도 없는데 공사를 시작합니다. 공사비가 부족해지려 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공사를 끝마치지 못할까봐 불안에 떨었으나 그 때마다 기적적으로 후원자가 나타나 지금 보아도 굉장히 큰 병원을 완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 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장정만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저는 여기서도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빵 다섯 개로는 5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지만, 오늘은 빵이 일곱 개씩이나 되었는데도 더 적은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이 일곱 바구니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빵이 더 많았으니 더 많은 사람을 먹이고 더 많이 남았어야 하겠지만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마치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기적 안에서도 세상의 계산과는 무관하시고 또 그런 계산 방법을 어리석게 보이게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미사 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은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기 이전에 우리의 봉헌을 먼저 요구하십니다. 먼저 내어놓지 않으면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액수가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더 데레사처럼 그 액수에 관계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봉헌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가치로 돌려주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이미 모아놓은 돈이 상당한 액수였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도와주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처구니없는 믿음이 큰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빵 몇 개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항상 그들의 믿음 아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물질을 봉헌할 수 있게 만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봉헌할 수도 있게 만듭니다. 자신의 삶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봉헌된 빵으로 그렇게 큰일을 하시는 분께서 봉헌된 한 인간을 통해 얼마나 큰일을 하시겠습니까? 봉헌된 삶은 마치 빵과 포도주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생명을 전해주게 됩니다.

빵 일곱 개가 봉헌되지 않았다면 4천 명이 쫄쫄 굶어야 했던 것처럼, 교회는 이렇게 우리 각자의 작고 큰 봉헌으로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십일조를 내는 것도 중요하고 봉사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며 봉헌의 삶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빵을 들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셨던 것처럼 봉헌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물질, 시간, 아니면 나 자신까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에 돌려드려야 마땅하다는 ‘감사의 마음’이 없다면 참다운 봉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감사의 마음은 봉헌을 통해 더 감사한 은총으로 항상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옛날 손으로 눌러 물을 끌어올리던 전기가 없던 시골에서 쓰던 펌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참을 쓰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려, 물 한 바가지를 붓고 펌프질을 시작해야 밑에서부터 물이 다시 올라옵니다. 바로 이 물 한 바가지가 나의 작은 봉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언제나 감사히 봉헌하여 은총이 충만했던 아벨과 감사할 줄 몰랐던 카인과의 중간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나의 감사의 봉헌이 수천 수만 명을 배불릴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 마리아를 통하여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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