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스크랩 인쇄

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18-10-19 ㅣ No.124348

 

신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교수 신부님들께서는 강의를 시작하시면서 참고문헌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교수 신부님들께서 소개해 주시는 책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 다른 것들로 바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몸의 신학을 배우면서 신부님께서는 좋은 책을 소개 해 주었습니다. 마틴 부버의 나와 너와 김용규 교수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얻은 책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를 철학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마틴 부버의 나와 너입니다. 부버는 세상에는 '나와 너(I-You)'의 관계와 '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존재하는데,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도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대상이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가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관계로서, 무엇과도 바꿔질 수 없는 유일한 ''와 대체 불가능한 ''가 깊은 신뢰 속에서 존재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부버에 의하면, 만남은 개인적 경험이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마치 신의 은총처럼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직관적 판단에 가까운 것이라고 합니다. 부버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그 안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주장하던 부버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현대의 비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참된 관계와 대화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는 참다운 삶은 인격체가 조우하고 교섭하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만남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하느님)'에게 향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용규 교수의 책은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함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파스칼) 현대인들은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탈 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입니다.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였으며,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고 하겠습니다.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합니다.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듯이,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 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파스칼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합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모르면서 신을 안다는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같습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살아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예외 일 수 없습니다. 신을 모르면서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절망 속에 살아갑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 물질과 자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해당하는 말 같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공동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우리들의 능력과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당부하십니다.

 

믿음은 무엇으로 성장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삶 안에서 실천할 때 더욱 굳세어 집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쁜 소식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두려움 없이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300 1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