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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월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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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2-08-27 ㅣ No.75140



8월 27일 월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마태 23,13-22
 

성녀 모니카(Monica)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눈물의 아들을 멸망하지 않습니다.>

 

 

    모니카 성녀는 요즘으로 치면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알제리 타가스테라는 지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AD 331년에 출생하셔서 56세 되던 387년에 돌아가셨으니 까마득한 옛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니카 성녀에 대한 생생한 자료들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교회 역사 안에 둘째 가라하면 서러워할 대학자이자 큰 회심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때문입니다.

 

    오랜 방황 끝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회개를 위해 한평생 눈물로 지새운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을 자신의 저서에 자주 소개하곤 했습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모니카는 이교도였던 파트리치우스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게 됩니다. 둘째 아들 니비지우스와 딸 페루페뚜아는 어머니 모니카를 닮아 그렇게 착하고 다정다감했다는데, 장남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머리만 명석했지 젊을 때부터 그렇게 어머니 속을 썩이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튀니지에 위치한 도시, 지중해에 접한 항구도시 카르타고란 대도시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 제국과 패권을 다투던 꽤나 잘나가던 해양 도시국가였으며 활발한 무역과 상업, 다양한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17세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학문 중에 ‘수사학’(修辭學)에 큰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원래 수사학은 웅변을 체계화한 학문 분야였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웅변가들에게 토론법이나 대중 연설시의 여러 화술을 훈련하는 데 적용되곤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사학은 곧 남을 설득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불멸의 명작 고백록이나 신국론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라는 공부만 열심히 할 것이지 크게 엉뚱한 길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그가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은 마니교란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게 된 것입니다.

 

    마니교는 참으로 이상한 종교였는데 냉철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떻게 거기 빠져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세기에 페르시아 왕국의 마니가 창시한 종교인데, 이것 저 것 짬뽕한 사이비 교였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 기독교, 불교 거기다가 바빌로니아의 원시 신앙을 가미하여 만든 자연 종교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일찌감치 마니교와 확연히 선을 긋고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얼마 전 애지중지하던 딸이 그만 사이비 종교에 빠져 보따리까지 싸서 어디론가 들어가고 난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부모의 심정은 정말이지 죽음보다 더했습니다. 모니카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마니교라는 이단에 단단히 빠져들어 헤어 나올 줄 모르지, 거기다가 말할 수 없이 방탕하게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에 모니카는 정말이지 할 말을 잃었고, 침식마저 잃었습니다. 아무리 달래고 설득하고 나중에는 눈물로 하소연해도 한번 달콤한 악의 맛을 본 아들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집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모니카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어떤 방법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모니카는 전략 한 가지를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전’이었습니다. 아들이 지금 즉시 변화되고 당장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면 좋겠지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진 아들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더 이상 야단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끝까지 기다려주기로, 그리고 하느님께 맡겨드리기고 작정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목숨 걸고 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지극한 정성이 담긴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들의 빠른 회심을 위해 어머니는 수시로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변화를 기원하며 부단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노력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가는 곳 마다 함께 따라다니며 아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들이 수사학을 배우러 로마로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도 따라나섰습니다. 나중에 로마가 아니라 훨씬 북쪽 밀라노라는 것을 안 어머니는 또 다시 방향을 틀어 밀라노로 따라갔습니다. 비행기도, 열차도, 변변찮은 여객선도 없던 4세기 때의 일이니 아들을 향한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밀라노로 따라간 모니카는 다행히 당시 밀라노 대주교였던 암브로시오란 큰 스승을 만납니다. 아들 때문에 너무나 오랜 세월 힘이 들었던 모니카는 틈만 나면 성당으로 달려가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론에 큰 힘을 얻게 됩니다. 모니카의 오랜 눈물과 목숨 건 기도 끝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오 주교를 찾아가게 되고 마침내 387년 암브로시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아들 때문에 날마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던 모니카에게 주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건네며 위로하셨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모니카는 고향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과거 로마의 항구도시였던 오스티아에서 숨을 거둡니다. 객지에서 이게 뭐냐며 힘들어도 고향까지 가서 돌아가셔야 한다며 울부짖는 아들들 앞에 어머니 모니카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몸뚱이야 어디에 묻히든 조금도 걱정하지들 말거라. 너희들에게 부탁할 것이 한 가지 있단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모니카는 어머니들의 주보 성녀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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