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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먼저 화해하여라. (마태5,20ㄴ-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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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10 ㅣ No.147474

 

2021년 6월 10일 목요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먼저 화해하여라(마태5,20-26)

 

 

1독서<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2코린토3,15-4,1.3-6)

형제 여러분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경우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화답송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10ㄴ 참조)

◎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당신 백성당신께 충실한 이에게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10주간목요일 제1독서 (2코린3,15-4,1.3-6)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7-18)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후 데 토 프뉴마 퀴리우, 엘류테리아'(ho de kyrios to pneuma estin, hu de to pneuma kyriu, eleutheria)

'주님은 영이십니다'(ho de kyrios to pneuma estin)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느님과 본체론적으로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코린3,6) 라는 주장을 여기서도 일관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대조하고, 문자와 성령을 대조하며, 새 계약인 복음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15장 45절에서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고 사도 바오로가 말하면서 창세기 2장 7절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의 기록을 확대 인용한 데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즉 코린토 후서 3장 17절 그리스도께서 죽이는 문자가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서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는 즉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는 탈출기 34장 30절의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 언급된 "자유"라는 주제를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대조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곧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 자신도 역시 회심하기 전에는 당시의 유다인들의 교만과 패역무도함을 그대로 답습했던 자였지만, 다마스코스 도상에서 '살려주는 예수의 영'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결국 이러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바오로는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갈라티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라고 바오로는 언급한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코린토 후서 3장 16절에서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치워지는 너울의 자유'란 결국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곧 가장 축복된 영적 자유'를 말한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8)

 

여기서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해 복음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는 것은 너울(수건)을 쓴 유다인들이 그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에 비교하면 크나큰 축복이요 놀라운 기쁨이지만,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드러나는 영광(로마8,18)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너울(수건)이 벗겨져 주님의 영광을 비교적 밝게 보게 되지만,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보는 때는 그분의 재림 이후며(1요한3,2), 그때는 우리가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로마8,29.30).

 

한편 주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이시며(콜리1,15),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1,3)이시다.

따라서 요한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라고 진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요한14,9).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 구절은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뀌어 갑니다'로 번역된 '메타모르푸메타'(metamorphumeta) 마태오 복음 17장 2절과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변하였는데'로 번역된 동사로, 원형 '메타모르포오'(metamorphoo)의 현재 수동태이다.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이 사용된 것은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형상)으로 변형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메타모르포오' 동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르페'(morphe)에서  변형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외양과는 대조되는 존재의 변화, 즉 본질적 인간의 변화를 말한다(로마2,2).

 

그러나 본질적 인간의 변화라고 해서 인간이 신격화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인 변화가 본질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변화라고 하더라도, 신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존재론적 차이를 허무는 변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질적 변화는 죄로 인해 타락하여 희미해진 하느님의 모상(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즉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가 도래하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태조에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상(형상)과 가치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의화(義化)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화의 과정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힘입은 '이끄심'을 통해 영화(榮化)의 단계까지 실패없이 수행될 것이며, 그것은 '살려주신 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관된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5,20ㄴ-26)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 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 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 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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