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기념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11,19-27)

스크랩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7-29 ㅣ No.148642

2021년 7월 29일 목요일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기념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11,19-27)

 

본디 7월 29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이었으나올해부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경되었다(교황청 경신성사성, 2021년 1월 21일 교령). 

새 전례문의 번역은 주교회의 202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승인되었으나사도좌의 추인을 받지 않았기에 매일미사』 7월 호에는 기존 전례문을 그대로 실었다그런데 매일미사』 7월 호 인쇄 직후에 새 전례문의 우리말 번역 추인 교령(교황청 경신성사성, 2021년 4월 19일 교령)을 전달받았기에매일 미사 고유 기도문과 홈페이지에는 새 전례문으로 바꾸어 수록한다.

참고로매일미사』 2021년 7월 호에 수록된 기존 전례문 가운데 본기도예물 기도영성체 후 기도만 바뀌고나머지 전례문과 독서들은 바뀌지 않는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7 여러분은 잘 달리고 있었습니다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8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께서 그렇게 설득하셨을 리는 없습니다.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10 나는 여러분의 의견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자는 그가 누구든지 간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만일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그랬더라면 십자가라는 걸림돌도 이미 치워졌을 것입니다. 12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차라리 스스로 거세라도 하면 좋겠습니다갈라5,5-12>

<나는 이 책(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묵시22,18)>

 

1독서<우리가 사랑하면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7-16)

사랑하는 여러분서로 사랑합시다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8-9.10-11(◎ 2)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주님을 바라보아라기쁨이 넘치고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행복하여라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주님을 경외하여라주님의 성도들아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복음<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주님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7월 29일 기념일 제1독서(1요한4,7~16)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0)

 

'이렇습니다', '여기 있습니다'로 번역된 '엔 투토'(en tuto)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사랑의 출처와 기원,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전치사구를 이끌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기원과 출저가 하느님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 사랑은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 독생성자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신 사건을 통해 분명히 입증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안에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기원이 된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에 나타난 사랑의 본질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다(1요한4,11).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내용을 먼저 언급하고, 뒤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라는 긍정적인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긍정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랑의 출발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구현된 하느님의 계획과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지극히 작은 응답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의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는 말씀과, 로마서 5장 10절의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에 나타난 사상이 여기에 들어있다.

 

이제 '속죄제물'로 번역된 '힐라스몬'(hilasmon; as an atoning sacrifice; to be the propitiation) 원형 '힐라스모스'(hilasmos)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분리된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말한다.

 

'속죄제물'에는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염소'의 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했으며 따라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가 드려지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온전한 속죄 제사를 계획하시고 속죄 제물을 준비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죄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을 뿐만 아니라 화해의 제물이 되셔서 하느님와 원수였던 자들을 그와 화해시켰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 같은 진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사실성과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경계한 표현이다.

 

역사의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던 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파하면서 속죄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 구속 사업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내신 사건과 그로 인한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7월 29일 기념일복음(요한11,19~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25~26)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놀라운 이적은 요한 복음의 일곱 표적 가운데 마지막 표적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되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앞으로 있을 당신의 부활과 그리스도에 의해 얻게 될 모든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라자로의 부활 사건은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한 사건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예수님의 체포와 죽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요한 복음 12장 11절 이후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공관복음에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는 것은, 공관 복음이 기록된 시기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전으로서 여전히 유대 지도자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라자로 일행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라자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다고 본다.

 

'라자로'에 해당하는 '라자로스'(Lazaros)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우셨다'이며,히브리어 '엘르아잘'(Ellazar)의 축소형으로서 그 당시 흔한 이름이다.   

 

그는 현재 '라자로 동네'('엘 아자리예'; El Azarieh)로 불리는 곳,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촌이며 올리브산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베타니아'(Bethanias) 출신이다.

 

그는 중병에 걸렸다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흘'('텟사라스 헤메라스'; tessaras hemeras; four days)이라는 숫자를 밝히는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의 민간 신앙에 있어서 죽은 자의 영혼이 사흘간은 그 시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고, 미쉬나에도 삼일 이내에 시신을 확인하고 그 기간 내에 장사를 지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영혼이 완전히 그를 떠난 상태여서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최종적인 죽음의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라자로의 죽음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조성이 된 것이다.

 

생명을 주관하시고 생명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신 예수님께는 한 인간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수면, 즉 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요한 복음 11장 25절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갖는 부활과 생명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는 말씀이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Ego eimi; I am) 양식의 진술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위한 독특한 양식이다.

이 선언을 통해 '말씀의 계시'가 '행위의 계시'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나타내시기를 거부하시고 자신 속에 있는 현재의 사실로 나타내신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 안에서는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그것이 바로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며, 얼마 후에 있을 예수님 자신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부활의 실체를 인류에게 보여 주신 계시이며, 죄의 결과요 사탄의 시기인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패퇴시키고 정복하신 역사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죽음이 임금 노릇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ego eimi he anastasis kai he zoe;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라는 자기 선언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본체이신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의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시며,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부활의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바로 요한 복음 11장 25절 후반절과 26절에 등장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에 해당하는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ho pisteuon eis eme; He who believes in me)인데, 직역하면 '나를 계속하여 믿는 사람은'이다.

 여기서 '피스튜온'(pisteuon)은 '피스튜오'(pisteuo)의 현재분사로서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사실 및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사실을 묘사한다.

 

'죽더라도 살고'에 해당하는 '칸 아포타네 제세타이'(kan apothane zesetai; h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이다.

 '칸'(kan)은 '카이 에안'(kai ean)의 준말로 '비록~일지라도'(even though)라는 뜻이다.

'아포타네'(apothane)는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의 부정(不定)과거 가정법으로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으로서 사람이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물리적 죽음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믿기만 하면,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는다 할지라도 '영적 생명'이 그 안에 살아 있다고 선언하신다.

 

'살고'에 해당하는 '제세타이'(zesetai; he will live)는 '살아 있다','산다' 등을 뜻하는 '자오'(zao)의 미래 중간태로 '영적 생명'이 지속됨을 가리킨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우 메 아포타네 에이스 톤 아이오나' (u me apothane eis ton aiona; shall never die)에서 '우 메'(u me)는 이중 부정(否定)으로서 미래의 사건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한다.

 여기서 '아포타네'(apothane)가 나타내는 죽음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어느 성현 군자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 했으며, '부활이요 생명'(요한11,25)이라고 했는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느 성현 군자가 죽어 빈 무덤을 가진 자가 누가 있는가! 예수님 만이 부활하셔서 예루살렘에 빈무덤을 가지고 있으며, 성모님 만이 몽소승천으로 육신이 무덤의 부패에 썩지 않고 영혼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피승천하셨다.

 왜 그런가? 예수님만이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부활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육신은 비록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하더라도 그 영혼과 천주성은 없어지지 않는 분이시다.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상에서 제단이요, 제관이며 제물이 되시어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다 이루신 다음에는 더 이상 육신으로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사실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되시려면 당신의 존재 양식을 새롭게 바꾸셔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

 

 

 

 

왜 자꾸 없는 기념일을 보태고 보태는 것일까? 성경의 본질을 흐리게하는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이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245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