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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간 월요일] 행복하여라 (마태5,1-12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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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07 ㅣ No.147397

 

2021년 6월 7일 월요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행복하여라 (마태5,1-12)

 

 

1독서<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어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2코린1,1-7)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와 온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우리가 환난을 겪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고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이 위로는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견디어 나아갈 때에 그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여러분이 우리와 고난을 함께 받듯이 위로도 함께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8-9(◎ 9)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주님을 바라보아라기쁨이 넘치고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행복하여라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복음 <행복하여라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태5,1-1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마음이 가난한 사람들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슬퍼하는 사람들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온유한 사람들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자비로운 사람들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평화를 이루는 사람들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제1독서(2코린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3) 

 

코린토 2서 1장 3~7절에는 위로의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나온다. 이런 내용으로 구성된 본 단락은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찬미, 찬송하리로다')라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로 번역된 '율로게토스'(eulogetos)의 원형 '율로게오'(eulogeo) 구약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히브리어 '바룩'(baruk)의 역어이다. 

 

이것은 다니엘 3장 26절과 시편 144장 1절, 시편 41장 14절, 시편 72장 18절, 시편 106장 48절의 찬양문 말미에 나오는 표현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등장한 후에는 일반적으로 찬양의 이유들이 열거된다. 

 

사도 바오로 역시 찬양의 이유를 코린토 2서 1장 4~7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언급하기 전에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2서 1장 3절에서 자신이 찬양하는 하느님을 여러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한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이것은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유다교적 송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구약에 유다인들이 믿었던 하느님, 곧 유다인 조상들의 하느님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육화(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알려진 것이다(갈라4,4). 

 

에페소서 1장 3절과 베드로 1서 1장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초대 교회 당시 예배나 기도에 매우 널리 사용되었음을 암시한다. 

 

둘째,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다. 이 표현은 지혜서 9장 1절에 나오는 '자비의 주님'('퀴리오스 투 엘레우스';kyrios tu elleus)이란 표현을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유다교 종교 의식에 사용된 전례적 표현에 속한다. 

 

당시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던 기도문은 보통 '오, 우리 아버지, 자비로우시며 너그러우신 아버지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시작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자비'를 뜻하는 표현으로 유다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엘레오스'(elleos)를 사용하지 않고 '오익티르몬'(oiktirmon)을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같다. 이것은 히브리어 '라하밈'(rahamim)의 역어이며, 사도 바오로가 즐겨 쓰던 단어이다(로마12,1; 필리2,1). 

 

'라하밈'은 본래 몸 속의 내장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불쌍한 자를 보면 내장까지 뒤틀릴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불쌍히 여김', '동정', '연민', '긍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오익티르몬'의 아버지라는 표현 삶의 실오라기 한 줄 같은 희망까지 끊어지게 했던 숱한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 사도 바오로가 생생하게 체험했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묘사이다. 

 

세째,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위로의'로 번역된 '파라클레세오스'(parakleseos)의 원형 '파라클레시스'(paraklesis)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부름받음'이라는 뜻이며, 하느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인 행위로 구체와 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코린토 2서에서 자주 등장한다(2코린 2,8; 5,20; 16,1; 8,4.6.17; 9,5; 10,1; 12,8.18). 이 표현은 특히 이사야서 40장 1절, 51장 3절, 12절, 19절에서도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주로 메시아적 전문 술어로 사용된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2서 1장 3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위로와 구원을 총체적인 메시아적 구원에 결부시켜 파악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단순히 환난 가운데서 위로받았음을 의미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환난으로부터 구출받았다는 사실도 나타낸다(2코린1,4~7). 

 

특히 이 '위로'란 표현을 코린토 2서 1장 3~7절에서 10회나 사용함으로써, 사도 바오로 자신이 하느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했으며, 이에 대해 감동과 감격 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파라클레시스'는 성령 하느님의 속성 중 하나이다. 

 

이런 관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파라클레토스'(위로자, 협조자, 변호자, 상담자 등등)로 불렀다(요한14,26).  도 바오로는 제3위 성령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성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경험했던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5,1-12)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 '의로움 때문에'에 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 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ighteousness) 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 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 '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 '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agallo) '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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