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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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 윤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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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0-07-22 ㅣ No.57482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 윤경재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 하고 불렀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1-18)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 만큼 독특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여성도 없습니다. 단편적으로 이름이나 등장하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막달라 마리아의 일화는 네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서 11,2절과 12,3절에서 그녀를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여자로 표현합니다. 또 예수께서 그녀의 오빠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는 은총도 경험하게 됩니다.

루카복음서 8,2절에서는 그녀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그립니다. 예수님 일행을 따라 다니며 자기들 재산으로 시중을 든 여자들이 여럿 있었다고 루카저자는 전하는데 막달라 마리아도 그 무리에 속했습니다. 루카복음서 7.37-38절에서는 죄인인 한 여자가 갑자기 남의 집에 뛰어 들어와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향유를 부어 발라드린 사건을 드는데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를 일컫는 듯합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같이 향유를 발라드리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두 복음서는 이 사건을 예수님 장례를 준비하는 행위로 설명합니다. 즉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을 예비하는 거룩한 행위로 묘사한 것입니다. 

네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여인이 모두 동일한 인물을 그린 것이라면 그녀는 상당히 적극적이며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고 싶어 병이 난 인물처럼 보입니다. 9가지 성격 유형을 구분 짓는 에니어 그램에서는 제2유형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런 2번 성향은 어려서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으나 여의치 못하자 자신의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갈등과 욕구를 해소하는 성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의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우선 자신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래야 속이 편했습니다. 사실 그런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애착과 소유욕의 눈속임일 뿐입니다. 남을 불편하게 하고 자신의 성취욕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 시절의 유대는 여인들이 자신의 넘치는 애정을 쉽게 풀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이 보기에 부도덕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당돌한 여인이 되었으며 심지어 죄녀라는 오명을 받았습니다. 속설에는 창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였다는 말로 보아서는 상당히 큰 격정에 사로잡혔으며 유혹에 빠져 타락한 짓을 하였다고 짐작됩니다. 일곱 마귀라는 표현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충동을 가리킵니다. 어떤 자극이 오면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심리학에서는 ‘강박충동’에 의해 ‘자동형성’이 일어난다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자동인형처럼 반응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더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자기 제어를 하지 못하고 잠자는 상태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빗나간 애정을 베풀지 못해 병이 든 마리아를 예수께서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녀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터무니없이 통 크게 낭비하는 듯한 병든 애정의 공세를 뒷골목 어둔 곳에서 떳떳하고 공개적 장소에서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한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게 사용할 수 있게끔 허용하셨습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마리아와 후의 그녀는 성격이 180도로 변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방향이 강박충동에 의해서 잠자는 상태로 자동인형처럼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의 보답을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심 없이 베풀 수 있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는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을 하십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14,8)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여인 마리아, 그녀에게 이보다 더 큰 영광의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나아가 인격적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변모를 가져옵니다. 병적인 집착에서 건강한 수용으로 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녀의 성격이 지닌 장점은 더욱 빛을 발휘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유와 행복으로 나가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외침은 한 여인의 감동에서 이제 온 인류의 감동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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