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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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율법주의와 자기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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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09-04 ㅣ No.58402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22주간 토요일 - 율법주의와 자기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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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 너무 치우치면 속이 빈 율법주의자가 되고,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면 자기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기중심주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 두 극단에게 율법이란 하나는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 되고 하나는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사무엘 상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에게 계약의 궤를 빼앗긴 일이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는 성모님을 상징하고 그 안에 들어있던 십계명판은 율법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처음 블레셋 군과 싸울 때 계약의 궤는 실로라고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사실 계약의 궤는 엘리라고 하는 예언자와 그의 두 아들, 또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소외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키는 사제들인 엘리의 두 아들과 엘리까지도 사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갈 때 아예 하느님의 힘을 청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싸우러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쟁에 패하자 그들은 그제야 계약의 궤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들은 그 계약의 궤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생각했지만 블레셋 군들에게 패하고 계약의 궤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계약의 궤가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유용한 물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더 먼저 앞세우는 자기중심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계약의 궤는 블레셋의 신인 다곤상을 쓰러뜨리는 것은 물론이요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종기와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 궤를 옮기는 마을마다 온갖 재앙이 들끓었습니다. 이들이 법은 지니고 있되 참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율법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는 율법의 참 정신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지니고 지키는 것만으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은 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 법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신자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결혼 한지 얼마 안 되는 자매인데 아기를 낳고 몸이 허해져서인지 자꾸 가위에 눌린다는 것입니다. 여러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안 되어서 다시 성당에 다니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좀 냉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 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아기가 아빠에게 안겨있으면 자꾸 울기 때문에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고해성사를 했고 성체를 영했는데 그 다음 주엔 산소 벌초를 하러 가야했기 때문에 또 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또 남편에게 우는 아이를 맡기고 고해성사를 받아야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너무 힘겨워서 다시 냉담할 것만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빠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족 일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짓는 것입니다. 무조건 주일에 미사를 못 했다고 해서 죄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이오면 주일미사에 빠진 것만 가지고 그 사람에게 죄를 씌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 날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법대로 하면 무엇을 훔친 것보다는 안식일날 일을 한 것이 더 큰 죄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다윗의 예를 들며 꾸짖습니다. 안식일 법이 있기는 하지만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성이 결과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위선적으로 겉으로 보이게만 잘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겉으로 보이는 결과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렇게 율법이 자신들을 파멸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열심하다고 하는 신앙인 중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니 굳이 죄의식을 지니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죄를 스스럼없이 짓고 고해도 보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제자들이 율법을 어긴 것이지 예수님은 절대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의 해석하여 율법을 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은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겐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 없이는 주님의 나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고통을 받던 그들은 꾀를 생각해내는데 아기 송아지가 딸린 두 어미 소를 엮어 마차를 끌게 하고 그 마차에 계약의 궤를 싣습니다. 만약 벳 셰메시, 즉 ‘태양의 집’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동네로 곧장 걸어가면 그 질병이 계약의 궤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여겼습니다.

두 어미 소는 새끼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멀리하고 벳 셰메시쪽만 바라보고 걷습니다. 벳 셰메시는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고, 성전이며 그래서 ‘하느님나라’를 상징합니다. 아기 송아지의 울음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둘이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뒤에 계약의 궤가 실려 있었고 하느님나라라는 공통의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그 분이 가르치신 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린다는 뜻이고 계약의 궤를 운반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율법의 의미를 항상 잊지 않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두 극단으로 빠지지 않아 마차가 멈추지 않고 율법도 잘 운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나침은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 나라만 바라보는 노력, 율법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묵상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 줄 것인지를 잊지 않는 것이 극단으로 빠지지 않게 만듭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를 하느님나라, 즉 참된 행복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도록 해야겠습니다.

 

<<짧은 묵상>>

여행을 하다가 한 명의 한국인 현지 가이드를 만났습니다. 이틀 동안 가이드를 받았고 겉으로는 매우 친절해 보였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은 밤 12시경이었습니다. 가이드는 처음 우리를 만나는 시간부터 이 나라는 줄을 많이 서기 때문에 출발 3시간 전에는 체크인을 해야 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있다고 말했습니다. 비행기를 한두 번 타 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 나라의 전문 가이드이기에 그러려니 하였습니다.

떠나는 날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가이드는 시간이 촉박하니 빨리 가야한다고 식당 밖에다 차를 대고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허둥지둥 서둘러 내려갔고 체크인을 하고 비행기 탑승하는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시간을 보았더니 정확히 출발 3시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온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습니다. 세 시간을 멍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가이드는 팁도 많이 받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늦게 들어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그렇게 일찍 데려다 주어 감사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답을 더 많이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공항에 오는 중에도 통화를 많이 하고 있었고 아마도 저녁 스케줄이 있었는데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나라 법을 들먹여가며 빨리 들여보냈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위 있는 것들을 끌어들입니다. 나라 법이 그렇다는데 우리가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곡식을 뜯어먹는 것을 보며 안식일을 어겼다고 나무랍니다. 사실 이들은 그리스도가 미워 하느님이 세우신 법으로 올가미를 씌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성전에 바쳐진 빵을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법을 어기면서도 먹었던 것을 예로 들며, 당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하느님의 법을 알려면 제대로 알란 뜻입니다.

안식일 법은 사실 좋은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법도 나쁜 의도가 들어가면 자신의 나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주위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한 자매가 전혀 말이 안 통하는 비신자 남편과 살다가 마침내 자신과 대화가 잘 통하는 신자 형제를 만났다고 합시다. 둘은 그렇게 가까워집니다. 거의 불륜까지 가는 상황에서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둘을 알게 해 주어 신앙이 깊어지도록 하셨다고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위로받고 하느님의 뜻이라 하여 관계는 깊어만 갑니다.

물론 믿는 사람끼리 친해지며 신앙을 증진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결국 결혼할 때 하느님 앞에서 서약한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안 좋은 것입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좋은 하느님의 법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그 죄를 정당화시키는데 사용하기도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스페인 사람들은 종교를 전하겠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본 목적은 금이었습니다.

우리는 혹시 주님의 뜻이나 권위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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