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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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희생이 일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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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09-13 ㅣ No.58582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희생이 일치를 이룬다


 

저희 집은 오산 비행장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항상 비행기의 굉음을 들으며 자라야했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곤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저를 비행장 철책에 걸려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물론 이런 말이 농담인 것을 알면서도 가끔 심하게 야단을 맞으면, ‘정말로 나는 주워온 아이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제 이름을 ‘삼용’이라고 붙여주신 것을 비롯하여 많은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표현을 잘 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는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희를 위해 고생하신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남의 밭에 나가 품을 팔 때, 우유와 빵을 간식으로 받으면 그것을 드시지 않고 잘 두셨다가 일 끝나고 돌아오셔서는 가게 하나 없어 군것질을 하지 못하던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먹었던 우유와 단팥빵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머니는 생선 머리만 맛있다고 드셨습니다. 물론 생선의 머리가 가장 맛있기는 하지만 풍족하지 못한 양 때문에 몸통은 우리를 주시고 머리만 드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삼겹살을 구워주셨는데 어머니는 배가 부르다며 우리가 드셔보라고 드리기 전까지는 입에도 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맘도 모르고 우리가 다 먹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 살 땐 저희 집이 비만 오면 잠기는 그런 동네에 있었는데 일에서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가족을 생각하며 사람들이 말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을 무릅쓰고 불어난 냇가를 헤엄쳐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다리를 저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겨울에도 일을 하시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셔서 허리를 다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몸으로도 우리를 위해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신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희생이 바로 인간 사이에서도 갈라지지 않게 만드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태어날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사랑의 희생들을 바라보며 부모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희생은 사람을 갈라지지 않게 연결시켜주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오늘 저를 찾아오신 한 형제님께서 미사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외우는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기 위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구약을 이해한다면 즉각적으로 ‘아!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야 할 희생제물이 오시는구나!’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체적으로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했던 희생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자신의 옷을 깨끗이 빨이 빛나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베드로 1서 1장 19절엔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부터 해방 된 것은 “어린양의 피”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장 명확한 의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흠도 티도 없는 “속죄 제물”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기로 준비되어 계셨지만(1베드 1,20), 그 완성은 당신이 깨끗하게 만드신 인류와 혼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담이 옆구리에서 피를 흘려 하와가 탄생하였고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와 교회가 탄생하였고 그 교회와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이 이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지만 성경의 끝은 두 번째 아담과 하와인, 죽임을 당하신 하느님의 어린양과 교회, 즉 천상 예루살렘과의 혼인잔치로 끝맺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창조 때부터 계획된 커다란 창조와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셔야 함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우리가 나온 원천인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한 몸이 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피를 흘리는 희생적 사랑은 갈라졌던 관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연결시켜 주시되 하느님만이 지닌 영원한 생명까지도 누리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믿어야 하듯이, 십자가도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임을 믿어야합니다.

많은 교회 간판에,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씌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글로 표현하지 않고 십자가로 보여줍니다. 우리를 위해 고생을 하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겠습니까?

 

생명의 십자가

십자가 경배가 널리 전파되게 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분은 헬레나 성녀입니다. 헬레나 성녀는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로마를 재통일하여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입니다.

325년 헬레나는 아들의 힘을 입어 그리스도의 남겨진 유품들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성녀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은 신심이 있어, 골고타 언덕에 성당을 짓게 합니다.

골고타는 예수님 이외에도 수많은 십자가형이 치러지던 사형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형대인 십자가도 수없이 널려져 있었습니다. 헬레나 성녀는 그 곳에서 예수님 머리 위에 붙어있던 “이스라엘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 쓰여 있는 현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300년 정도가 지난 때였습니다.

헬레나 성녀는 널려있는 그 수많은 십자가들 중에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도 반드시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성녀는 십자가들을 깔아놓고 병자들을 그 위에 눕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십자가에서만 계속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성녀는 그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형수들과는 다르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교였습니다. 즉 자기의 죽음으로 생명을 주는 순교요 출산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계속 생명이 솟아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헬레나 성녀는 골고타 언덕의 흙을 퍼서 로마로 운반해 옵니다. 그리고 자기 방에 흙을 깔고 맨 흙에서 잤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의 어머니가 수많은 사형수들의 피가 범벅된 흙 위에서 자며 죽음을 묵상했던 것입니다. 헬레나 성녀의 궁전은 지금 십자가 성당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조각과 못, 가시관의 가시, 골고타에서 퍼 온 흙 등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십자가에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이 죽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이르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져야한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야단을 치십니다.

“사탄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나누어 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사람이 사탄인 것입니다. 반대로 이웃을 위한 죽음이 곧 사랑이고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신비를, 우리 이웃 안에서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너희도 서로서로를 위해 순교하여라.”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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