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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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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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12-06 ㅣ No.60467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2주간 월요일 - 죄의 용서와 치유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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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제품을 준비하는 나이가 마흔이 된 중국 신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중국과 홍콩, 미국에서 지금까지 의사로 활동하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족할 것 없는 분이 그것도 활동도 어려운 중국의 지하교회의 사제가 되려고 하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의사로서 8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치유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저는 사람의 영혼까지 치유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알면서도 은근히, “심리치료나 정신과 치료도 있잖아요.”라고 떠 보았습니다. 그 분은 하나하나 정확히 발음을 해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치료는 한계가 있어요. 어느 정도까지는 치료가 가능할 수 있어도 인간의 영혼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만 치유가 가능합니다.”

사실 사제들의 직무 중 하나는 의사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치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정말 고해성사나 면담을 통해 상처받으신 분들이 치유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그 분은 사람의 육체만을 치유하다가 마음의 상처에 손을 댈 수 없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인간을 총체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중풍 걸린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그 사람을 내려놓고 치유를 청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닌 그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치유를 해 주시기로 결심합니다. 복음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위 사람들의 믿음으로 움직일 기력도 없는 한 사람을 주님께 이끌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집에 한 사람만 성당에 다니고 있지 않다면 다니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고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심판자가 하느님이시라면 용서할 권한을 지니신 분도 하느님이신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반감을 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하시며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하십니다. 즉,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는 오늘 복음에서 같은 것으로 나옵니다. 사실 당시엔 병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서 받는 벌로 생각하였기에 병이 치유되는 것은 죄가 용서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불어넣어 주시며,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특권인 ‘용서의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조사 결과에서 고해성사는 다른 어떤 정신치료보다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발표한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사실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치유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고해성사에서 신부님의 한 마디로 자살할 직전의 사람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믿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서 마지막으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남편이 술과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아내를 의심하고 생명에 위협이 갈 정도까지 구타하여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남편이 그렇게 된 것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여겨 고해성사를 보고 남편을 용서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어찌된 일인지 새 사람이 되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고 술과 도박을 끊고 열심 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 증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하나로 묶어서 행하셨고 사실 그 능력을 사제들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니 의사였던 사람이 더 완전한 의사가 되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또 사제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조사에 따르면 병원에 가장 자주 가는 나라 1위로 개인당 일 년에 19회 병원을 찾는 한국 사람들로 나왔습니다. 평균 한 달에 한 번 이상 병원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치유를 받는 고해소에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육체적 건강에도 유익하지 않을까요?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들에게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또한 그런 은총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합시다.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

 

이제 판공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해성사에 대해 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개신교에서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들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루터는 고해성사를 평신도가 직접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는 것을 방해하는 하나의 장애요인으로 보았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말하며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면 성경에도 어긋나고 하느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니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합니다.

요한 1서 1, 9절에는 죄를 고백하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데 사실 누구에게 고백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실 때도, 그의 죄의 고백을 듣고 사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루카 5, 24) 그들은 베드로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는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여 받았듯이, 모든 믿는 이들이 복음을 전할 때 받는 것이지 베드로나 사제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죄 사함의 권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 20, 21-23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시며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해 질 것이라고 한 것은 모든 복음을 전하는 신자들에게 한 말이지 특정한 몇 명의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듯이, 용서는 다른 이를 용서하는 데서 얻는 것이고, 야고보서 5, 16절에는 죄를 서로서로 고백하라고 했는데 왜 사제에게 고백해서 죄의 용서를 얻어야하느냐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루카 18, 14절에서 세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여 죄를 용서받고 돌아갔다고 나오는데 왜 사제에게 고백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는 신자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통교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이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즉, 아담과 하와의 죄로 저주받은 땅에는 사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깨끗해야 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합니다. 죄를 지었다는 말은 이미 하느님과 멀어졌다는 뜻인데 어떻게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 있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 사람과 아무런 중간 매체도 없이 이야기가 가능합니까? 사실 하늘과 땅은 한국과 미국보다도 더 멉니다.

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당연히 하늘나라에 사시는 그 분과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직접 하느님을 만나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굳이 내려와 아담과 하와의 후손과 하느님간의 중재를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없어서 그 중간에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을 통해서만 성자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었듯이, 모세와 같이 누군가가 중재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인간 사이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죄인인 상태에서 하느님께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직접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또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으려고 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을 거부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잉태하고 주님의 어머니라 불리게 되는 은총에 ‘내가 감히 어떻게?’라고 하시지 않고,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어떻게 감히 내가?”라고 거부하셨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던 것처럼, 그런 마음 때문에 참다운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려는 것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어떤 부분도 나누게 되지 못할 것이다.” (요한 13, 8)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 22-23)

이 말씀은 분명 예수님께서 당신만이 가지신 죄의 용서의 권한을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 (요한 20, 19)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제자들’이라고 쓰는 모든 경우에는 보통 신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쓰는 말입니다. 즉, 특정한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죄 사하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준 것이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고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하나뿐인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이 모든 신자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도 사람의 권한이 아닌 것처럼,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도 사람의 권한이 아닙니다. 만약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모든 신자들에게 있다면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며, 동시에 ‘특정한 당신이 손수 뽑으신 제자들’에게만 “성령을 받아라.”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령의 특별한 은사 없이는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6, 19)

그렇다면 땅에서 열고 풀고 할 수 있는 하늘나라의 열쇠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같은 마태오 복음에서 죄인이 있으면 먼저 단 둘이 이야기 하고, 또 두 명 이상의 증인을 데려가 이야기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워진 단 하나의 교회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말의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8, 16-17)

하늘나라의 열쇠는 먼저 베드로에게 주셨지만, 그 것을 사용하는 권한은 베드로와 일치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먼저 주셨던 이유는 제자들이 베드로와 일치하게 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도록 섭리하신 것이고, 그 교회에 당신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즉, 교회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듯이, 다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한인 ‘하늘나라의 열쇠’는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 것입니다.

 

요한 1서 1, 9절에서 죄를 고백해야 하는 대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요한이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죄를 고백하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죄의 고백을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1요한 1, 8) 물론 지금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현재에도 몇몇 성당에서 잘못 행해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소위 공동고해성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개인적인 사죄경을 받지 않으면 고해성사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고해를 듣지도 않고 그를 사해주신 것은, 죄를 사하는 권한과 병을 치유하는 권한이 같은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임을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다 아시는 분인데 그 고생하며 거기까지 온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에게 병을 치유하는 권한을 성령님을 통해 내려주시는 분이,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내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형태는 다르지만 이 모든 은사들은 같은 성령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 12, 1-12) 사람에게 치유의 은사를 주었다면 동시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은 같은 성령님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 죄를 용서하게 해 달라면서 이웃을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정의상 우리를 용서할 수 없으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지 이것이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한 사람 위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그 교회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도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지 않는 못된 종처럼 되지 말고 먼저 서로서로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야고보 5, 16절에서 서로서로 죄를 고백하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서로서로 겸손해지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상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면, 상대의 죄 또한 용서해주기 어렵습니다. 사제가 고해성사를 줄 때, 신자들의 고해를 잘 들어줄 수 있는 방법은 먼저 나도 큰 죄인임을 고백하는 길뿐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서 더욱 겸손해졌고, 그래서 더욱 용서해주는 마음이 커졌을 것입니다. 이런 부족했던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 더 잘 용서해줄 수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루카 18, 14절에서 세리가 기도만 드리고 의롭게 되어 돌아갔다고 하는데, 사실 교회에서도 개인적으로 용서받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사 때 먼저 양심성찰을 하고 가슴을 치며 죄의 용서를 청할 때, 우리의 소죄들은 충분히 용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기 같은 것들은 저절로 치유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암을 의사 없이 혼자서 치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중대한 병은 반드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또한 겸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교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죄의 용서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 겸손을 보이는 길이고 벌써 그렇게 죄의 용서가 시작됩니다. 사실 사제 앞에서 하는 것은 사제에게 하는 것보다는 사제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고백하는 것이고, 죄의 용서도 사제가 해 주지만, 사제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아야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대림시기에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구유를 청소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판공성사는 의무처럼 여겨질지라도 성탄을 향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친 세례자 요한의 준비를 가장 잘 실천하는 길입니다.

 

 

 
 
 < 주여 이 죄인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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