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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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교육방법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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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5-06 ㅣ No.111882

 

예수님의 교육방법

 

- 윤경재 요셉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0~66)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이끌어주시는 방법은 참으로 본받을 만합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뛰어난 재능이 있는 인재가 아니라 별 볼일 없는 보통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의 인성에 맞추어 한 계단 씩 이끌어주셨습니다. 웬만한 실수는 다 용서해주셨고 품어주셨습니다. 또 단호하게 야단치실 때에는 확실하게 지적해주어 다시는 그릇된 언행을 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조급한 마음으로 결과를 빨리 보려고 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접근하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얼마나 자주 바뀌었으며 그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정치가들은 권력만 잡으면 교육제도를 개혁한답시고 나섭니다. 빨리빨리 정신이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준 사실은 맞지만, 교육에서 만큼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 행복지수가 전 세계에서 최하위 수준이라는 연구결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내전과 분쟁에 휩싸인 몇 나라를 제외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 아이들보다 못한 행복지수를 볼 때 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학자들과 정신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육아 교육방법은 먼저 조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성되어 태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비교적 성장된 상태로 태어나나 인간은 수년 간 부보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아야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20여 년간 교육을 받아도 제대로 독립하기 쉽지 않은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성장하는 수준에 맞춰 기다려주는 여유를 찾아야 합니다. 부모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부족하고 못마땅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다른 아이랑 비교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제 자식이 뒤떨어지는 원인이 부모의 불찰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든 불행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이가 더딘 것은 실제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의 잘못인양 생각하여 무엇인가 해결하려 들다가 오히려 일을 망친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라나는 수준에 따라 아이가 요청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시간을 내어 일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시며 제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하는 수준을 파악하고 나서 다음 단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과 우리와 가장 뚜렷한 차이는 일이 잘못 풀렸을 경우에도 예수님 자신이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어떤 탓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유다와 같은 인물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커다란 스캔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라고 언질을 주는 듯한 구절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답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르셔서 유다가 배반하는 일에 미리 조치를 취하시지 못한 게 아니라 이는 어쩔 수 없는 신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겸손의 말입니다.

 

 

마치 태생소경에 대하여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라고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나온 대답과 그 성격이 일맥상통합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9,3)

 

이 말뜻의 의미는 인간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엄연히 존재하며, 그 한계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한계 밖의 일에 대해서는 아버지께 맡기라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어찌 들으면 아버지께 탓을 해도 다 용서가 되는 일이니 마음 놓고 아버지께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탓을 하여 제2의 피해를 키우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에게 탓을 돌리는 일도 결코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모든 것을 자기가 통제하려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자기 앞에 다가오는 모든 일에 대하여 중용을 지키는 섬세한 조절이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려 들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최선은 다 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 질문의 의도는 포기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영역으로 초대하는 말입니다. 이 질문을 들은 베드로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대답은 평소 자신의 생각과 말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끄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하게나마 인식했던 것을 스승인신 예수께서 꼭 집어주셨기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새가 알에서 깨고 나올 때 어미 새가 껍질을 밖에서 깨어주어야 쉽게 나오게 되는 이른바 줄탁동시라는 이끔법입니다.

 

근육을 키우거나 체력을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한계점 돌파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근육 운동할 때 자신이 가능한 한계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로 마무리 하는 것이 근육을 키우는데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동작을 10회씩 세 번 한다면 체력이 소진된 마지막 단계에서는 도리어 10% 더 증가된 강도로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근육양도 증가하고 체력이 증진된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대로 방치하신 게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 절호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틀렸다고 야단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현재의 그들 태도를 인정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방법으로 질문을 택하신 것입니다.

 

질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답을 기대하고 하는 질문이 있으며, 실력을 측정하기 위한 질문이나 정말 모르냐는 식의 질문도 있습니다.

 

이와 달리 질문 받는 사람을 고민에 빠뜨려 자신만의 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수사학적 질문(rhetoric question)’이라고 부릅니다. 수사학적 질문은 정답이나 즉답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질문에 대한 의도를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자신의 삶에 비추어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으려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서서히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께서도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자신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그 시각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사학적 질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에 대한 소문이나 의견이 아니라, 제자들이 보고 듣고 느낀 예수의 실제 모습을 말로 표현해 보라는 요청입니다. 현재의 우리에게는 예수에 대한 과학적이거나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실존적인 판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지 모르는지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런 인식 방법을 최근에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 학습법이라고 부릅니다. ‘메타 인지능력이 뛰어 날수록 학습 완성도가 높으며 창의력이 넘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온전한 스승이셨습니다. 정확한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메타 인지를 키워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보통사람 수준인 제자들을 단련하여 뛰어난 사도로 이끄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자원과 땅이 넓은 나라가 아닙니다. 오로지 인적 자원에 매달려 살아가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구성원들이 행복하지 않고 또 뚜렷한 지향점이 없다면 나라의 미래가 어둡기만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교육방법을 배워 적절하게 활용하여야 돌파구가 생길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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