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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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부르심'과 '응답' - "저도 원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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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11 ㅣ No.173205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1)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응답하셨습니다(루카 1,38).

 

이 말씀에서 ‘바랍니다.’(‘저는 원합니다.’) 라는 말은,

 

성모님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순종하셨고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뜻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천사는 성모님께,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자, 너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거부할 수 없어서 복종한 것이라면,

 

그것은 순종도 응답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를 원한다.

 

너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원한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도들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그렇게 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이고,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주님의 희망에 나의 희망을 일치시키는 일,

 

즉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식 때의 ‘서약’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구장이 “......을 하기를 원합니까?” 라고 물으면,

 

서품 대상자들은 “예, 원합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나는 ......을 하겠다고 서약(맹세)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 또는 ‘서약한다.’ 라는 말보다 ‘나는 원한다.’

 

라는 말이 더 강력한 ‘서원(誓願)’이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도들에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한다.

 

너희도 원하느냐? 원한다면 가라.”

 

<역시 실제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파견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그들 자신들도 원했기 때문에, 파견 명령에 기꺼이

 

응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기 싫은데도 억지로 간 것이 아니라, 가고 싶어서,

 

정말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선교사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내가 원해서’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에 넘쳐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데도,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한다면,

 

그 소식은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될 수 없고,

 

‘전해 주기 싫은 소식’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3)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무슨 대가를 바라지 말고

 

오직 ‘기쁨으로’ 하여라.”가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이지만 수당을 많이 준다니까 한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돈 소식’을 전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금, 은, 구리돈, 여행 보따리, 여벌옷, 신발,

 

지팡이를 지니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불편한 줄도 모르게 됩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아시는 분이고(마태 6,32), 그것을,

 

즉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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