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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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욕심 다 버리고 집착없이 살다가 /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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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숙 [michelleoh] 쪽지 캡슐

2011-08-22 ㅣ No.66911

 
 
봄비와 아버지
 

해마다 이 맘때가 되어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저는 어김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슬그머니 눈을 감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제 머리 속의 가장 최초의 기억은 아직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자야 했던 어린 저의 볼에 새벽녘마다 부벼대는 까칠까칠한 아버지의 수염에 대한 느낌입니다. 그 매일 아침의 느낌들은 저로하여금 상대방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제로 살아가야 하는 근거로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서 한번도 용돈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제가 살던 집의 한 쪽 벽에는 항상 노트 한권과 조그만 손가방이 걸려있었습니다. 무엇엔가 돈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노트에 용도와 금액을 기록하고 손가방에서 그 만큼의 돈을 빼 내어 쓰면 되었으니까요. 이런 훈련은 제가 정직하고 청빈한 사제로 살아가야 하는 근거로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어릴 때는 '소년동아일보'와 '소년조선일보'(동아와 조선을 제가 봤더라니까요...^^)를 날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했고요, 조금 커서부터는 매일 저녁 아버지와 함께 9시 뉴스를 보고 그 날 그 날의 화제거리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어야 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다소 지루하기도 했던 세상 일에 대한 관심은 제가 '한 손에는 성서를, 한 손에는 신문을' 쥐고 세상의 불의와 맞서고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날을 열렬히 희망하는 사제로 살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한 여학생 잡지에 글을 써서 올렸을때, 매일 수십통씩 쏟아지는 펜팔 편지들을 꼼꼼히 다 읽어보시고 몇몇의 편지들을 골라서 "얘네들의 글씨체와 문장이 가장 훌륭하다"라고 조언해 주시는 아버지... 또 하루는 제가 정말 싫어하는 여고생이 저희 집에 찾아왔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보자 마자 왜 집에 까지 왔느냐며 신경질을 부렸는데, 아버지는 그 아이와 함께 커피를 드시고 이런 저런 말씀까지 나누시더니 나중에는 저에게 그 아이의 집까지 바래다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일때문에 그 아이하고 친해져서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친구가 되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사제의 독신 생활에서의 '정결'의 덕을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하고 여성들을 대할때 항상 두려워하고 있어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

......

아버지께서 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을때, 아버지는 담당의사에게 '내 나머지 삶을 어떻게 정리하는지에 대한 결정은 제가 하고 싶습니다'하시며 어떤 의학적 조치도 하지 않으시고 집에 오셔서 병원에 가시기 전 읽으셨던 책을 꺼내드시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듯 그 책을 다 읽으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나셔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기력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도 저와 함께 9시 뉴스를 보셨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아버지, 지금 이런 순간에 저런 세상 일들이 무슨 의미입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지금 나에게 의미있는 것은 저런 세상 일들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는 것이란다'

가족들이 눈물을 보이면 활짝 웃으시며 "세상에 태어 난 그 어느 누구도 이 여행길을 피해가지 못했어. 어차피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길... 이왕이면 웃으면서 가자. 웃으면서 보내 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세상에 남기신 유산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 때처럼 거인으로 보일 때는 없었습니다.

마치 가까운 산에 소풍이라도 가시듯 가볍게 이 세상을 떠나가시던 날.... 그 날 오전 간신히 입술을 움직이시며 하시던 마지막 말씀이 지금도 제 귓가에 생생합니다.

"내가 떠날 때 외롭지 않게 봄비라도 부슬부슬 내려줬으면....."

이게 아버지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부리신 마지막 욕심이었을까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그 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는 장례를 다 마칠때까지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이 맘때가 되어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저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눈을 감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속삭이지요...

"아버지, 아버지처럼 욕심 다 버리고 집착없이 살다가 아무 미련없이 가까운 산에 소풍 가듯 가볍게 아버지 계신 곳으로 갈께요."

봄비 내리는 오늘 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열망과 현실을 보는 날카로우나 자비에 찬 눈빛을 가진 사제로서의 삶을 다짐해봅니다. 오늘 같이 봄비 내리는 날..... 꿈속에서라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행복할텐데요.....^^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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