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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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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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12-01-16 ㅣ No.70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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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마르코 2장 18-22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다인들에게 있어 단식은 전통적이고 아주 의미 있는 종교 행위였습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번 속죄의 날, 즉 일곱째 달 10일을 의무단식일로 규정했습니다. 그 외에도 기근이나 전쟁, 가뭄과도 같은 큰 재난이 다가왔을 때 동참과 속죄의 표시로 단식일을 선포하곤 했습니다.

 

    당대 율법의 준수에 있어 모범적이었던 바리사이들은 루카 복음 18장 12절에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있어 단식은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극단적인 청빈생활로 유명한 예언자였던 만큼 단식을 밥 먹듯이 했었기에 그의 제자들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4장 2절에 보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시며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식을 반대하지 않으셨으나 바리사이들처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단식, 의미 없는 단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철저한 단식 행위 그 자체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점점 왜곡되어만 갔습니다. 왜 단식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단식을 하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단식을 철저하게 잘 지키는지, 누가 혹시라도 숨어서 뭔가를 먹지는 않는지, 보다 바람직한 단식 방법은 어떤 것인지에 온통 마음이 쏠렸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이 단식을 실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표시로 단식을 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더 잘 식별하기 위해 명료한 의식을 지니려는 표시로서 단식을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육체적 결핍을 체험함을 통해 맑고 깨어있는 영혼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단식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의 도래,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보다 간절히 기다리는 표시로서 단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 등장하셨습니다. 잔치의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주인공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성대한 잔칫상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한 이상 더 이상 기다림은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입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고 차려진 만찬을 최대한 만끽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였습니다. 더 이상 단식이나 고행이 아니라 환희와 기쁨, 만찬을 즐기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의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불평불만 가득한 얼굴로 따지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정말이지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자신들이 실천하는 단식행위를 통한 경배의 대상이신 예수님께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이제 낡은 세상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해방과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은혜롭게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 크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매일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식탁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더 이상 고행과 단식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크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큰 죄인에게 끝없는 인내를 베푸시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찬양이요 기쁨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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