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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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4-15 ㅣ No.111474

 

2017년 4월 15일

"성토요일"

“교회는 성토요일에는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다. 주

님의 무덤 옆에 머무르면서

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한다.

이날은 노자 성체만 허락되며,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만찬

미사 뒤에 제대포를 벗긴 제대는

오늘도 그 상태로 둔다.

 장엄한 부활 성야 예식을 거

행한 뒤에야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이 기쁨은

50일 동안 넘쳐흐른다.”
40일이라는 시간이 참으로

 길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참 짧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엊그제 시작되었던

사순시기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언제 부활을 맞이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벌써

오늘 밤에 부활 성야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기쁜 부활을

기뻐하게 됩니다.
주님께 사순시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음에 죄송한 마음이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새로운 부활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심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문제는 지금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과거에 행했던

제자들의 잘못들을 끄집어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신 지금의 불안한 마음에

장 큰 힘이 될 수 있는 ‘평화’를

가장 먼저 빌어주시지요.

바로 지금을 제대로 살아가기를

주님께서는 가장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사순시기를 제대로 못 산 것에

대해서 연연하고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라.

그러나 그 결과에는

집착하지 말라.

풀과 벌레들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죽을 것이다.

 삶다운 삶을 살아야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어떻게 나누어

 쓰는가에 따라 그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도

이 세상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당신의 신적 능력을

이용한다면 그러한 고통도

당하시지 않으셨을 텐데,

우리 인간을 위해서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오늘 밤에 있게 될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모범을 이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때입니다.

과거에 연연하면서 후회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미래를 걱정하면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포기의 삶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힘을 낼 수 있는 삶,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삶을 지금

이 순간 행할 때,

분명히 나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새로운 부활을 체험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두 가지

심오한 현실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는 사랑이 없는 행동이

초래하는 파괴의 깊이입니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면 그러한 파괴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예수님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 침을 뱉고 발로

차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할 수가 있을까요?

바로 사랑이 없는 행동은

파괴를 가져온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응답에서 드러나는 파괴의

깊이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랑의 깊이입니다.

우리들은 누군가가

 나에게 부정적인 행동과

말을 하게 되면 거부하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과

 말을 그냥 받아들이십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 파괴의 깊이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그 위대한 사랑의 깊이가

바로 부활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사랑 없는 행동으로 끊임없이

 파괴하는 모습인가요?

아니면 그 파괴도 받아들이는

 위대한 사랑의 모습인가요?

솔직히 전자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아서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때문에 파괴되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밤, 주님께서는

그 사랑의 깊이로 진정한

승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모습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따라야 부활할 수 있다면서

나를 소중히 여길 때

 치유가 시작된다.

(이시하라 가즈코)

예수님 무덤 성당,

동시에 예수님 부활 성당이기도 하지요.

갑곶성지의 경배용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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