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스크랩 인쇄

이미경 [ayo98060] 쪽지 캡슐

2012-06-08 ㅣ No.73615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6월 8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David himself, inspired by the Holy Spirit, said: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place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David himself calls him ‘lord’;
so how is he his son?”
(Mk.12,36-37)


제1독서 2티모테오 3,10-17
복음 마르코 12,35-37

어제 낮 시간에 인천교구 전례꽃꽂이 월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미사 시간에 맞춰서 사무실에서 나와 미사장소까지 걸어갔지요. 그리고 미사장소에 도착하니 전례꽃꽂이 회원들이 밝게 맞이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너무 덥지요?”

그런데 저는 더위를 하나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서울 낮 기온이 29도까지 올랐다고 하지요. 이렇게 무척 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덥다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원래 더위를 못 느끼기 때문에?

사실 어제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종합검진에서 눈에 약간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어제 재검을 했거든요(물론 검사 결과 전혀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 검사를 위해 안약을 넣어 동공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검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눈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가까운 것도 잘 보이지 않고, 더군다나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이렇게 눈에만 온갖 신경을 쏟다 보니, 그렇게 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더위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지요. 그런데 내 마음이 어디에 맞춰 있느냐에 따라서 어려워 보이는 고통과 시련 역시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문제는 우리의 마음인 것이지요. 무조건 거부하고 마는 마음,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음들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기보다는 이에 고개를 숙이는 약한 모습의 나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아가 나온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다면 다윗이 메시아보다 더 윗분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다윗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이는 곧 인간적인 기준으로 주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인데도 인간 일의 범주 아래 집어넣으니, 자신의 뜻과 다르다는 이유로 주님을 반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마음으로 인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어려움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스스로를 낮춰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감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낮추고 있을까요? 그리고 주님을 위해 내 십자가를 얼마나 잘 짊어지고 있을까요? 나의 마음 안에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즉 인간적인 기준보다는 주님의 기준을 내세우며 살아갈 때, 세상의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늘 바깥쪽만 바라보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리는 순간, 마음이 열린다(원성).



성모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묘비의 글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가운데 혹은 성당 뜰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지요.

한 형제님께서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글은 단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줄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죽음에 대한 준비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쉽게 웃을 수 있는 가벼운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그 준비는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오늘’을 결코 장난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죽음을 잘 준비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932 2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