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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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관리 아들치유 (요한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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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6-15 ㅣ No.121156

 

공동번역성서

 

왕실관리아들치유(오직 말씀으로)

(요한4:43-54)

43 이틀 뒤에 예수께서는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45 갈릴레아에 도착하시자 그 곳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던 것이다. 46 예수께서는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레아의 가나에 다시 가셨다. 거기에 고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레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찾아 와 자기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으로 내려 가셔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사정하였다. 48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49 그래도 그 고관은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50 예수께서 '집에 돌아 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집으로 돌아 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길에 마중나와 그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전해 주었다. 52 그가 종들에게 자기 아이가 낫게 된 시간을 물어보니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그 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었다.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레아에 돌아오신 뒤에 보여 주신 두 번째 기적이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사건을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기적)이라고 지칭합니다. 본문 54절 보세요.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레아에 돌아오신 뒤에 보여 주신 두 번째 기적이었다.

그러나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과월절 동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이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을 두 번째 표적이라고 불렀을까요?

(요한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복음을 유효적절하게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가운데 일곱 개의 기적만을 나열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 자기가 고른 두 번째 기적이라는 의미에서 두 번째 기적이라 표현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본문 속에서도 우리는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속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담겨있는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441절과 42절을 보시면 오늘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에 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4:41-42) 41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하고 말하였다.

지난번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의 동기가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죽어 가는 한 아이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말씀과 기적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東西 古今을 막론하고 무언가를 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기적에 광분하는 어떤 무리들의 한심한 行態들을 향해 警告를 하기 위해, 말씀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말미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2008/9/1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요한4:44-45) 44 예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45 갈릴레아에 도착하시자 그 곳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던 것이다.

이 구절은 자칫 잘 못 보면 예수님께서 말실수를 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구절입니다. 44절에서 주님은 예언자는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주님은 실제로 고향에서 많은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마태13:54-58) 54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며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55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57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 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그런데 45절을 보시면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바로 그 두 구절이 오늘 본문의 주제를 힌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거나 흰소리를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본문 45절을 다시 보시면 갈릴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한 이유가 나옵니다.

(요한4:45) 45 갈릴레아에 도착하시자 그 곳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던 것이다.

갈릴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환영한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주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2장에도 나옵니다.

(요한2:23-24) 23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어떤 신기한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들에게는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십니다. 그 말은 그렇게 무언가를 보고 믿으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45절에 갈릴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迎接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쓰인 단어가 데코마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헬라어 데코마이와 같은 의미의 단어로 람바노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데코마이람바노를 둘 다 迎接하다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 단어가 나온 곳을 보자구요. (요한1:12) 12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여기 보시면 분명 성경이 迎接하는 자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特權이 이미 주어져 있다라고 확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고 갈릴리아에서는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자신을 환영하여 영접한 것이 아니라고 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통하여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믿는다는 사람도 많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迎接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모두 聖徒로 부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믿는다고도 하고 주님을 영접했다고도 하며 주님을 환영하고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왕을 삼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어떤 기적을 보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가짜 믿음이요 가짜 영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직후에 갈릴리아에서 기적을 본 사람들이 주님을 환영하며 영접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건 가짜 영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영접이 가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루가4:24-29) 24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26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 주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 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주님께서 고향인 나자렛에서 당하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분명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많은 표적들로 인해 갈릴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고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고 말씀을 전하시며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시자 그들이 주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그 기적들로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살해할 수 있는 사람들 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면 성령 하느님을 그대로 흉 내 내고 있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한 묘사가 이렇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계 13:11~18)

(묵시13:11-14) 11 이번에는 또 다른 짐승 하나가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어린 양처럼 두 뿔이 있었으며 용처럼 말을 했습니다. 12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이 가진 모든 권세를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과 땅 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치명상에서 회복된 그 첫째 짐승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13 또 그 짐승은 여러 가지 큰 기적을 행하며 사람들 앞에서 하늘로부터 땅에 불을 내리게도 하였습니다. 14 그리고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해서 행하도록 허락받은 기적을 가지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또 땅 위에 사는 사람들더러 칼을 맞고도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묵시록 13장에는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등장합니다. 그 셋은 마귀의 세력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세력들이 정확하게 삼위 하느님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은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난 존재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올라 온 짐승은 기적을 행하면서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마치 오늘 날 禮拜堂 안에서 기적들을 일으키면서 그 이 聖靈의 역사라고 외치고 있는 어떤 무리들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주님은 말세 때에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성도까지도 미혹 하게 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13:22-23) 22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을 속이려고 여러 가지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할 것이다. 23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미리 말해 둔다. 그러니 조심하여라.'

(마태7:22-23)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 기적을 좇고, 체험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참 신앙인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한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두 번째 예수를 살해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마귀의 세력일 가능성 이 더 큽니다. 기적을 추구하고 체험을 좋아하며 자신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사라져 버리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히브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3:18)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11:1-3)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2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현 된 것으로,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보이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선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이러하다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감식혹은 인식혹은 인지라고 부릅니다. 믿음 인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열심히 기적을 쫓아다니며 그 기적에 신기해하고 놀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이 땅에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실까요? 그냥 다 보여주시고 인식하게 만드시면 되지 왜 굳이 믿음이라는 것을 요구하시고 그 믿음이 있는 자들만을 천국에 들여보내시겠다고 하십니까? 무엇을 보고 만지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다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러한 능력을 누군가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보여주면 믿겠노라는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을 위해 믿음을 보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내 백성인지는 오직 믿음의 행사를 통해서만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은 보이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을 낫게 해 준다든지 豫言을 해 준다든지 이빨을 이빨로 바꾸어 준다든지 하는 그런 보이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마귀는 그 믿음을 희석시키기 위해 눈에 보이는 기적들을 동원해서 택한 백성들까지도 미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기적은 정말 신기하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야릇한 쾌감도 줍니다. 마귀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일들을 동원해서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기쁨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인한 감동과 놀라움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는 예수님(두번째 표징) - 아주 특별한 일상의 기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은 바로 그러한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표적만을 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했던 갈릴리아 사람들이 끝내는 예수님을 殺害해 버린 것과는 다르게 어떤 사람이 그러한 표적들과는 관계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이 바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요한4:46) 46 예수께서는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레아의 가나에 다시 가셨다. 거기에 고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예수님께서 갈리레아 가나에 이르셨을 때 가나에서 34km, 25마일 정도 떨어진 가파르나움에서 헤로데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왕의 신하가 찾아온 가나를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과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진정한 혼인 잔치의 즐거움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잔치의 즐거움은 회복되어질 수 있다는 것 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만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비로소 완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죽은 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는 사건 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었다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죽어간다라로 표현을 한 것이고 그의 병이 나았다라고 표현을 하지않고 그가 살았다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이 치유되는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이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가 어떻게 흡사한지 보세요.

(요한2:1) 1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요한은 가나의 혼인 잔치를 설명하면서 굳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사흘이라는 단어를 동원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에도 똑같이 사흘이 등장합니다. (요한4:43) 43 이틀 뒤에 예수께서는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이틀이 지나 사흘 째 되는 날 주님께서 갈릴리아 가나로 들어 가셨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구속사역은 의미적으로 볼 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질서로 엉망이 되어버린 창세기의 셋째 날을 회복하시는 것이기에 성경에 사흘이라는 단어가 구속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 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고, 요나도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흘이라는 단어 속에서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속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의 흡사한 점은 이 외에도 많습니다. 주님께서 그 이적을 구한 사람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책망이었고 오늘 본문의 경우는 왕의 신하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다 주님께서 말씀만으로 이적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종들이 그 이적의 최초 목격자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공통점은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기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건 모두 어떻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1장에서 이 기적의 책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로 하느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하고 말씀하시고 標的의 책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표적들은 죄인들에게 막혔던 하늘이 열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어요. 따라서 오늘 본문도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늘이 열리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복음의 이야기인 것 입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왕의 신하에게 주님은 매몰차게 야단을 치십니다.

(요한4:48) 48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실 오늘 본문을 여는 키는 이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기적을 보고 주님을 영접한 갈릴리아 사람들을 포함하여 기적을 바라고 찾아온 왕의 신하를 책망하시는 말씀인 동시에 죄인들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만 가능하다는 복음의 선포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첫 번째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보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기적과 이사라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입니다. 후자의 긍정적인 의미의 표적‘’세메이온이 쓰인 곳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요한6:26) 26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표적)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오병 이어로 배를 불린 무리가 주님을 찾아오자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오병 이어의 기적을 통해 표적을 보았어야 하는데 표적은 보지 못하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표적을 보아야 한다라 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오병 이어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하늘의 풍요를 설명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奇蹟 속에 들어 있는 標的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그 기적만을 신기해하며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무리들에게 제발 표적을 보아라, 그 속에 담긴 십자가의 복음을 보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은 전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신 것을 설명하여 하느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표적은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마태12:38-40) 38 그 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예수께 '선생님,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하고 말하자 39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40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주님의 모든 표적들은 전부 요나의 표적,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될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46절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奇事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을 의역을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들의 욕심을 따라 표적과 기사를 구하고 좇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희는 반드시 표적을 보아야 한다. 너희는 그 標的 奇事 속에서 표적과 기사가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하면 절대 나를 좇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만 해도 주님은 주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주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려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병자들을 고치 신 것입니다

 

 

(요한4:49-50) 49 그래도 그 고관은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50 예수께서 '집에 돌아 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여기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는 왕족이거나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아주 높은 귀족입니다. 그를 가리키는 바실리코스는 왕을 가리키는 바실류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당시에는 왕족이나 왕과 밀접한 관계의 귀족들에게 쓰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왕의 신하는 당시 갈릴리아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 안티파스의 친척이거나 그와 아주 가까운 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귀족이 25마일을 걸어서 나사렛의 목수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미천한 목수에게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의 아들은 외아들이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그 아들이라는 단어 앞에 모두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말은 그 죽어가는 아들이 외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파이디온파이스로 번갈아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 아들이 어린아이가 아닌 자랄 만큼 자란 아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다 자란 고관대작의 외아들이 지금 열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원천리 25 마일을 걸어서 찾아 온 사람에게 네 아들이 살았으니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그 신하는 주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셔서 자기 아들에게 안수를 하던 치료를 하던 무엇인가를 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계속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0절에 쓰인 살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입니다. 그 말은 네가 돌아갈 때쯤 되면 그 아이는 이미 회복되어서 살아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아이가 지금 살아나서 네가 도착할 때쯤 되면 이미 오래 전에 회복된 상태로 만나게 될 것이라 는 말인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그래도 표적을 보기 위해 왔으니 표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않고 말씀을 믿고 자기 집으로 떠납니다. 50절을 보면 확실히 나타나지요? 주석가들이 왕의 신하가 표적을 보여주지 않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여 떠난 것이 라고 주석을 합니다. 저도 51절과 52절의 이야기로 미루어 그 사람이 믿지 않고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체 문맥 속에서 차근차근 해석을 해 보니 그 왕의 신하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내려간 것이 맞습니다.

지금 이 왕의 신하의 이야기와 갈릴레아 사람들의 이야기는 표적을 보고 믿으려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 오직 말씀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믿음의 대조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갈릴레아 사람들은 끝까지 표적만을 좇다가 망하게 되지만 표적을 보지 못하고도 말씀만을 믿고 돌아간 자에게 그 말씀이 실제로 표적이 되어 실현이 되고 온 가족이 믿음의 자리로 부르심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요한4:51-52) 51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길에 마중 나와 그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전해 주었다. 52 그가 종들에게 자기 아이가 낫게 된 시간을 물어보니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가나에서 가파르나움 까지는 25마일입니다. 당시의 도로 사정을 감안 할 때 25마일의 거리는 꽤 먼 거리였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포장도 안 된 25마일의 길을 가는데는 적어도 8시간에서 9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52절이 해결이 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왜 그 왕의 신하가 믿지 않고 포기하고 갔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가 하면 52절에 그가 길에서 자기 하인들을 만난 시간이 다음 날로 표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칠시(오후1)에 아들이 나았다라 고 대답을 하지요?

그래서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하고 중간에서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 집으로 향했다는 해석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뿐인 아들의 치유를 위해 절박하게 예수를 찾아 온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포자기해서 중간에 놀다가 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그 신하의 청을 듣고 그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신하의 종들이 자기 주인의 아들이 낫자 자기 주인에게 그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 왔습니다. 왕의 신하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부랴부랴 자기 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가 주님을 만난 시간은 제칠시 즉 오후 한시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가파파르나움의 집을 향해 가던 왕의 신하가 종들을 만난 시간은 저녁 무렵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해 지는 시간이 다음 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저녁 무렵에 종들을 만난 주인이 묻습니다. ‘언제 아이가 나았느냐? ‘ 종들은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오늘 오후 한시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어제 제칠시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절대 쉬엄쉬엄 놀면서 가지 않았습니다. 51절을 보시면 돌아가는 길에라는 어구가 있지요? 돌아가다라는 동사가 현재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그 왕의 신하는 부지런히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절대 포기하고 놀다가 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표적만을 좇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말씀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적을 보지 않고도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굳게 붙들고 간 신하는 정말 그 말씀을 현실로 보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믿음은 'seeing is believing'‘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믿음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believing is seeing''믿으면 보인다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고 드리는 우리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승에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지 못하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간구를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영적 이익과 성장을 위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에 끊임없이 답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이 귀에 아무도 들리지 않아도 믿음만을 가지고 끝까지 걷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기적/ 치유]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 /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아오니~

(마태8:5-10) 5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예수께 와서 6 '주님,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하고 사정하였다. 7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9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따라 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여기도 역시 가파르나움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이 백부장은 자기 신하가 중풍병에 걸렸으니 주님께서 말씀으로 낫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셔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시자 백부장은 손사래를 칩니다. 그냥 말씀만 하시면 그 게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음을 보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그와 같은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지 標的이나 奇事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왕의 신하의 가족들이 믿음을 얻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외아들의 열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열병으로 죽어갈 때에 그 가족들은 아마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 아들의 질병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어떻게 하느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확인만 되었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감사함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1장에서 하느님의 저주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인간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놔두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고 바라는 바가 다 성취되는 것이 절대 복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의 마음속에서 올바른 욕구가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고난이 유익이라는 이 역설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하느님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에 나타나는 질병이나 가난이나 전쟁이나 기아 같은 고통은 하느님을 떠난 자들의 죽음의 그림자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고통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렇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실존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참된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이라는 것은 회개로 향하게 되는 복된 사건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을 감지한다는 것은 복입니다.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여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되는 병이 있습니다. 한센병입니다. 문둥병이라고도 하지요. 바람이 불면 눈이 시려야 하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실명을 합니다. 손가락이 압력을 감지하지 못해서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힘을 가하다가 결국 손가락을 모두 잃기도 합니다. 뜨거운 것을 만져도 고통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화상을 입습니다. 고통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사망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이 땅에 태어날 때에 그러한 죽음의 그림자인 고통을 품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러한 죄인들의 죽음의 삶에 살짝 꿀을 발라서 죄인들의 인생도 살만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삶 속에 회개가 있을리 만무(萬無)지요. 그건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고통을 겁내지 마세요. 잘 감당해 내십시오.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거듭나고 변화되려는데에 그 요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뜻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뜻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을 찾아 자기 삶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입니다. 엣 자기부인과 자기 포기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부인과 자기포기가 없이 그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될 리가 만무(萬無)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새롭게 변화되고 성숙되어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왜 기적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지는 데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엉뚱한 기적 쫓아다니지 마세요.

기적을 쫓아다니며 나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은 무속 신앙입니다. 무속 신앙은 나의 소원은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후5:7) 7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로마10:17) 17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고후13:5) 5 여러분은 자기의 믿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살피고 따져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계십니까? 만일 깨닫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낙제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이 있는 자들이 맞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늘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들중에 만일 아직까지도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이 이 땅에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悔改하십시오. 그리고 말씀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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