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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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안하는 변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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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옥 [smalllark] 쪽지 캡슐

2001-10-11 ㅣ No.287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말씀(루가 11,5-13)

 

연일 기도에 관한 말씀이다.  얼마 전에 기도에 관한 나의 안이한 생각을 뒤엎어주는 책을 만났다.  안토니 블룸이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쓴 ’기도의 체험’, ’살아있는 기도’를 읽고 난 충격은 그 동안의 내 게으른 기도생활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평소에 기도란 호흡처럼 숨쉬듯 가볍고 편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건성으로 하는 염경기도 백 번보다 정성껏 드리는 화살기도 한번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도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정중히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봉사를 하는 것으로, 성서를 읽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으며 기도를 너무 ’나’ 중심적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쩌면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위로해왔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인격의 만남이며 관계라는 것, 곧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어떤 교수에게 졸업한 제자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했다.  한 시간 동안의 면담 도중 핸드폰이 네 번 울렸는데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문자를 날리고 통화를 하는 모양을 보고 주례를 거절했다고 한다.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의 주례를 청탁하는 자리에서 단 한시간도 눈을 마주하고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없는 산만한 사람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혹시 교수는 하느님이시고 제자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기도가 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있게 의식하고 나누는 대화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안토니 블룸은 기도란 하느님의 인격적인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느님 면전에 선다는, 마치 최후의 심판정에 임하는 것처럼 두렵고도 떨리는 자세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매번 그럴 수 있냐고 한숨 쉬기 전에 하루에 단 한 번 아니 일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그토록 진실하게 주님과 만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하면서, 온갖 분심 속에서, 길을 가면서, 아무 때나 틈새에 잠시 불렀다가, 힘들고 바쁘다고 다시 구석으로 밀쳐놓는 분이 소위 나의 <주님>이다.  이렇게 소홀히 대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즉각 달려오지 않는다고, 침묵한다고 주님을 원망한다.  

 

또한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도 좋지만, 교회와 신앙의 선배들이 고심 끝에 마련한 기도문은 옛 선조와 내가 공동으로 드릴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기도라는 것도 재인식했다.  더구나 사랑이 언제나 달콤함만 있지 않듯이, 무덤덤한 기도의 때도 있는 것이어서 그 때를 위하여 염경 기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 역시 그런 때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도했다는 안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올 감미로운 기도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 쉽고 편한 기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태한 기도생활로 이어져 이런 저런 핑계로 변명하다가 다른 활동이나 영적 독서로 대체시켜버렸던 때도 많았었다.  다시 기도가 필요하다는 열망이 끓어오를 때면 그동안 주님과의 거리를 의식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얼마동안 다시 기도를 하다가 또다시 반복되는 나태한 생활에서 신앙은 늘 제자리를 답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독서,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도를 <안하면서> 그것을 기도로 핑계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정말 하루 몇 분을 쪼개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현존과 마주하지 못할 만큼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말 아무 때나 그분을 불러내고 아무 때나 그분을 뒤로 물리칠 만큼 그분을 아무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불러낼 때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그분의 침묵-하느님의 자율권-에 그렇게나 도전할 만큼 그분을 종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정말 기도를 부담으로 느낄 만큼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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