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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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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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병영 [jegab] 쪽지 캡슐

2001-10-25 ㅣ No.2909

내 친구

 

밤톨 터지는 소리로 오는 가을은 그 냄새도 구수하게 새벽 이불깃에도 스며 들어와서는 게으른 내 아침을 수선스럽게 합니다. 마지못해 눈을 뜨면 창문 너머 하늘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걸려 있더니 문득 눈으로 보이던 색감이 어느새 가슴으로 스며들어 오늘은 내 가슴이 온통 하늘빛입니다. 개운하게 걷어올린 하늘이 어찌나 맑은지 하느님께서 그림을 그리시려 펼쳐놓은 화폭처럼 팽팽하게 풀이 서 있습니다. 어느 쪽 색감이 더 고울지 나도 내 가슴을 펼쳐 보이고 싶은 날입니다.

이런 날에는!

친구를 불러내어 햇볕 무너지는 산길로 산책이라도 하면서 구운 밤도 먹고 구운 은행도 한 톨씩 먹는 작은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높아지는 하늘보다 더 높은 그리움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은 일상에서 일구는 작은 기쁨이 서로를 깊게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속삭임으로 전해 주십니다. 우리를 벗이라 불러주신 그 다정함을 이제는 성서의 한 구절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아름다운 날에 불러내어 작은 즐거움까지도 함께 나누고 싶은 친구가 되고 싶었고 이제 나는 비로소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게 됨을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면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판단하고 나무라는 분이 아니라 내 도시락 속의 나무젓가락처럼 그렇게 붙어 계시면서 하나로는 도무지 쓸모가 없지만 두개가 함께 있으면 유용한 그런 분으로 내 곁에 계십니다. 나는 그런 그 분을 친구라 부르며 무슨 일에나 함께 하려고 마음 먹고 있으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힘을 보태주시는 그 분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쓸모 있는 젓가락이 되려면 부러져 두개로 되어야 하지만 그 분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부러지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젓가락의 구실을 제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친구가 늘 내 곁에 있다는 것이 가끔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내 도움이 도무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요즘 내 마음을 비키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겸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작은 겸손을 통해 친구의 그림자가 더욱 커지는 것에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는 요즘 많이 힘이 듭니다. 아버지께서 그려놓은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그림이 망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그림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자신이 치른 값이 너무도 참담한 것인데 어쩌면 무너지고 망가진 세상이라는 그림을 위해 다시 한 번 자신이 죽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가 말갛게 씻어놓은 화폭에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오늘은 가슴 아픈 내 친구를 불러내어 함께 산책이라도 하면서 구어간 밤 한 톨이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나라도  망가진 그림에 붓 칠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위로해 주어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위로를 받았지만 실상 내 친구도 내 도움과 위로가 필요하답니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을 비키는 일로나마 내 친구에게 도움과 위로를 주려고 합니다. 그 안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거들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기뻐합니다. 이런 우리 사이가 아마도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 사이라고 하지요. 당신과 당신 친구 사이는 그럼 어떠신가요? 당신 친구는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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