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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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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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7-01 ㅣ No.112956

 

2017년 7월 1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창세 18,1-15

그 무렵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복음 마태 8,5-17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프로야구를 보다보면 선

수들 중에서 타격 폼이

참 독특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저런 폼으로 그러한

성격을 낼 수 있는지

이상할 정도입니다.

분명히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을 텐데,

처음 야구를 배울 때에

가르쳤던 코치가 그러한

폼을 가지고 타격에

임하라고 했을까요?

야구 교본을 기초로 코치가

 가르쳤을 것이 분명한데

 우스꽝스러운 타격 폼을

가지고 있을까요?

지금 현재 소위 잘 나간다는

 선수들의 폼을 보면

다 이상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지금의 독특한 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탄탄한 기초에 입각한

타격 폼을 가르쳤다면

다 똑같아야 할 텐데,

왜 모두가 다른 폼으로

지금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저에게

손을 펴 보라고 하시더군요.

손을 펴 보니,

 자신의 손도 펴서

 비교를 해주십니다.
“신부님의 손과 제 손은

이렇게 다릅니다.

이렇게 손의 모양도 다르고

몸의 구조도 다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에게 딱 맞는 폼을

찾아서 노력하다보니

 선수들의 타격 폼이

모두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야구 선수들의 폼은

거의 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야구를 계속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야구 폼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렸을 때의 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노력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별로 두각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긴 우스꽝스러운 타격

폼을 익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만의 장점을 살릴 수 있기

위해서 계속된 노력을 통해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어렸을 때의

앙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렸을 때 복사를 했었다,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을 했었다,

 미사를 빠짐없이 참석했었다

등등의 과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과거의 신앙생활이

나의 기초를 닦아놨다고 한다면,

그 기초를 기반으로 나만의

신앙을 지금 현재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신앙생활이

전부인 것처럼 지금 현재에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결과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백인대장의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성체를 하기 전에

바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집을

찾아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그저 한 말씀만으로도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성숙한

신앙은 갑자기 주어진 것일까요?

이러한 신앙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성숙한

신앙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계속 하고 계십니까? 

길을 찾아 헤매는 이가

있어야만 새로운 길도

열릴 것이다.

 사람이 지나가야

길도 생기는 법이다.

(메도루마 )

홍콩의 순리 중학교에서

성지순례를 왔습니다.

"행복"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은

사랑했던 여인이 떠나고,

난청이 찾아오면서

 한때 절망에 빠졌습니다.

현실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어느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수사를 찾아간 베토벤은

 힘들었던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아갈 길에 대한

조언을 간청했습니다.
고민하던 수사는 방으로

들어가 나무 상자를 들고

나와 말했습니다.
“여기서 유리구슬

하나를 꺼내보게.”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색이었습니다.

 수사는 다시 상자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 구슬이었습니다.

 그러자 수사가 말했습니다.
“이보게, 이 상자 안에는

열 개의 구슬이 들었는데

여덟 개는 검은색이고

나머지 두 개는 흰색이라네.

검은 구슬은 불행과 고통을,

흰 구슬은 행운과 희망을 의미하지.

 어떤 사람은 흰 구슬을 먼저 뽑아서

행복과 성공을 빨리 붙잡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네처럼 연속으로

검은 구슬을 뽑기도 한다네.

중요한 것은 아직 여덟 개의

구슬이 남아 있고, 그 속에

분명 흰 구슬이 있다는 거야.”
처음에 뽑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나중에 뽑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그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처음에 뽑지 못한 것을

불평불만하고,

나중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이든 나중이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이제

곧 행복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그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만입니다.

그래야 매 순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 지금 대구에 왔습니다.

오늘 대구에서 특강이 있거든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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