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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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의 포로, 고백소의 순교자, 비안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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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5-08-04 ㅣ No.11857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마태오 16장 13-23절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인들의 포로, 고백소의 순교자, 비안네 신부님>


비안네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유일한 소원은 훌륭한 사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안네 앞에 펼쳐진 사제성소의 길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교수들과 동료들로부터 당한 수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영적 지도 사제가 비안네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안네,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교수회의에서 자네는 도저히 사제가 될 수 없겠다고 판단했네.”


비안네는 단 한마디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원인을 자신의 부족함에서 찾았습니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떨어트린 비안네는 이렇게 말하며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머리가 나빠서요, 그동안 제가 잘못한 것이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신학교를 쫓겨난 비안네는 슬픔에 잠겼고 낙담했습니다. 돌아서는 발길이 천근처럼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결코 사제성소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교정을 걸어 나오면서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합니다.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십시오.”


기적적으로 사제가 된 비안네의 청빈한 생활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단 한 벌 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워낙 전반적으로 너덜거렸기에 수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신자들이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니 수단 하나 새로 해 입으라고 돈을 마련해드렸습니다. 꼭 새로 해 입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그 옷 그대로였습니다. 화가 난 신자들이 다그쳤더니, 이미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였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댄 적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신었습니다. 그것은 본 동료 사제들까지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도대체 비안네 신부는 우리 신부 모두를 욕 먹일 작정인가? 검소한 것도 정도가 있지. 같이 있을 수가 없구먼!”


색 바랜 구두, 보기 흉한 모자, 누더기가 된 수단, 시골스런 외모...누가 보아도 노숙인으로 밖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왜 그렇게 하고 다니셨을까? 묵상해봅니다. 기록에 의하면 비안네 신부님은 어떤 날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백소 안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제로서 고백소에만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은 6시간 가지고 미사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강론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잠도 자야했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구령에 시간을 바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아침식사는 언제나 우유 한잔이면 족했다고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셨던 비안네 신부님은 오랜 세월 하루 한 끼로 때우셨답니다. 식사 시간은 길어야 5분, 혹은 10분이었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높은 성덕과 인품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아르스는 일생이 꼭 한번 다녀가야 할 성지(聖地)가 되었습니다. 아르스 사람들은 순례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길을 넓히고 숙소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아르스를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한해 순례객에 12만 명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고백소 안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만났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치유되었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기쁜 얼굴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비안네 신부님이 치러야할 대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에게 고백소는 작은 감옥이었습니다. 딱딱한 작은 의자 하나만 놓여있는 좁은 고백소는 숨이 막힐 듯 답답했습니다.


몇 주일에 걸친 여행 끝에 멀리서 도착한 순례객들을 내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노년에 이르러 비안네 신부는 매일 매일 죽음을 각오하고 고백소 문을 여셨습니다.


어느 날, 셀 수도 없이 많은 순례객들의 영혼을 돌보다 사제관으로 돌아온 비안네 신부는 의자에 쓰러지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못합니다.”


1859년 8월 4일 비안네 신부님은 그토록 원했던 영원한 휴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한 평생 불쌍한 영혼들에 둘러싸여 지냈던 영혼의 사도였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한 평생 가련한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던 죄인들의 포로였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한 평생 단 한 평도 안 되는 고백소 안에서 삶을 불태운 고백소의 순교자였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한평생(41년간) 아르스를 떠나지 못했던 아르스의 성자(聖者)이자 아르스의 본당신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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