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믿음 생할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스크랩 인쇄

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1-07-20 ㅣ No.148453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안셀름 그륀 신부님께서 책 하나를 또 내셨습니다. ‘의심 포용하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굿뉴스 상단에도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이틀 전에 유튜브에서 한 신부님께서 이 책을 언급하셨습니다. 오늘 오전에 홍성남 신부님의 강의에도 의심이라는 내용으로 강의를 하신 걸 들었습니다. 오후에는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이틀 전 주일에 교중미사를 봉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하늘을 쳐다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늘 하면 그냥 자연인 하늘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막연히 하느님이 하늘에 계실 거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기도를 보더라도 처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정말 우리 눈에 보이는 대기권 밖인 우주의 하늘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하늘을 보면서 오늘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또 예배드리기 위해 성당에 다녀왔는데 진짜 하느님이 안 계신다면 참 허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연히 이런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갔습니다.

 

오늘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의심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의심은 의심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믿음을 더 확고하게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의심이라면 이 의심은 좋은 의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의심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긴 이상합니다. 그럼 왜 좋은 의심일지 제 생각을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필터와 같은 것이 없이 어떤 사실을 그대로 무엇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음식으로 말하자면 그냥 음식을 씹지 않고 그대로 삼키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사람은 눈으로 봐야만 어떤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또 확인을 해야 인정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왜 그럴까요? 확인은 되지 않지만 말 그대로 믿음의 눈으로 믿음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눈으로 본 게 확실하다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심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심이 의심으로 존속한다면 문제가 될 수가 있지만 이 의심을 가지고 의심을 해봐도 그 의심이 잘못된 의심이라고 하는 사실로 의심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만큼 내 속에 있는 불신의 믿음이 없어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확고한 믿음으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다는 논리로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본다면  믿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의심도 가히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의심을 하면서 믿는 사람이 있고, 의심을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큰 범주에서 보면 우리는 전자에 해당할 것입니다. 후자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겁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있는 수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자에 해당 될 겁니다. 이 말에 누군가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전적으로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겁니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경지에 오른 위치에서는 그게 가능한 말이 될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기본 본능을 가진 존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될 겁니다.

 

결국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고 또 그 한계를 뚫은 분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성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한계가 어디쯤에 있는지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는 불가능한 지점에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게 불가능한 곳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씀하셨을 겁니다.

 

사실 우리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사는 존재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느님 말씀을 죄를 지을 당시에 그 말씀이 확실하다는 사실이라고 인식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 죄를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때만은 그게 눈앞에서 인식이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경지까지만 이르게 된다면 우리는 성인이 되지 않으려고 해도 성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명확하게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식을 하게 하면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없다면 그 수준이 이미 성인의 수준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수준에 이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수준인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심의 끄나풀이 완전히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의심의 존재를 인식하고 알아야 그 의심을 제거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언젠가 완전히 제거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이 바로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4,688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