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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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신부님복음묵상(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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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7-09 ㅣ No.113119

 

요셉신부님복음묵상

2017년 가해 연중 제14주일

복음: 마태오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일주일 피정을 다녀왔는데,

이번 피정 때 강의를 해 주신

 대전교구 김용태 신부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막나가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술담배는 물론이요

매일 클럽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삶에 지쳐가던 때

친구를 따라 온

좀 어리바리한 한 남자를 꼬여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랑은 오래되고

돈 많은 문중의 장손이었습니다.

그 집은 규율이 엄하여 여자들은

 남자들과 식사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자매는 이전의

허무한 삶보다는 가정을

꾸려나가는 재미에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 큰 집에

시아버지와 자신만

남게 되었습니다.

시아버님은 둘밖에

없으니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음엔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최대한 조신하게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시아버지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자신 몸에 뭐가 묻었나 싶어

얼른 자신을 살피다 자신이

고추를 담배 들고 있듯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며느리는 얼른 고추를

 상에 누르며 돌렸습니다.

마치 담뱃불을 끄듯이.

죄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죄가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끊을 수 있다면 죄를 짓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죄가 나쁜 것은 알지만

성향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재미있으라고 한 이야기지만,

위 이야기에서 그 자매는

담배를 끊었어도 그 성향은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 성향이 있다면 언제든

담배를 피울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피지 못하게 억압받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 자매가 담배를 완전히

끊는 길은 더 이상 이전에 폈던

담배가 몸도 기억해내지 못하게

더 행복한 길 뿐입니다.

 자아가 욕망하는 욕구에서 오는

만족감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만족감이 없다면 그 욕망을

이기기는 불가능합니다.

피정 강의 중 남자 수도원과

사창가 두 곳에서 고해성사를

주던 한 신부님의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고해 내용이 수도원은

대부분 여자 이야기였지만,

창가는 하느님과 부모님,

가족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수도원에 있지만 어쩌면

그분들은 아직 자신의 욕망을

끊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사창가에서 일하는 이들은

육체적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다만 자신들이 마음 아프게 하는

하느님이나 가족들을 더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이를 영적 요요현상

이라고 말씀하시며,

채워지지 않은 채 비우는 것은

항상 그런 요요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깨진 독이 채워지기 위해서

아무리 물을 쏟아 부어도 소용없지만

그것이 물속에 담겨지면 저절로

 채워진다는 달마야 놀자에 나온

비유를 들며 우리 또한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질 때만이,

그래서 그 사랑이 항상 우리 안에

가득 차 있을 때만이 요요현상 없이

어둠의 세력을 내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죄만 차단하는

 무균실은 가장 약한 자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 몸이 해로운 균보다 좋은 것들을

스스로 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김용태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의

직계후손이고 4형제가 모두

사제가 되어 이제 대가 끊기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래 아버지가 독자였기에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어

자신들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자녀들을

앉혀놓고 성경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고 묵상나누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묵상나누기가

익혀져서 그런지 생각이 비범해

보였습니다. 아무튼,

그 집의 가훈은 순교정신이었고

아버지부터 비장한 표정으로

언제라도 순교할

자세가 되어계셨고

어머니는 그런

순교의 삶을 살고 계셨으며

가족이 모두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어린 나이에

복음나누기를 하면서

순교에 대해 끊임없이

묵상했지만 항상 결론은

절대 순교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문제는

일단락되고 묻혀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기 위한

한 달 피정을 하던 중에

순교를 할 수 있느냐?’

주제가 떨어졌습니다.

이냐시오 묵상이기 때문에

상상으로 순교 장면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아랍인들이 나왔고 지독한

고문기구들이 있었으며

드릴로 머리를 뚫어서

죽이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교 직전에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부제들은 다 이 과정을

통과하였지만 신부님만은

사흘이 지나도 머리로 뚫고

 들어오는 그 드릴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정을 포기할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혼자

성체조배를 드렸습니다.

 다시 그 묵상을 하였습니다.

또 드릴이 머리로 오고

또 포기하려고 할 때 즈음,

온 방안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치 바닷물을 담아보겠다고

그렇게 애썼던 잔이 바다에 빠진

느낌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졌고

그분이 뒤에서 꼭 자신을

안아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교 다음의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랑 안에서 그분은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하고

그 체험은 사제로 살아가는 내내

자신에게 힘을 주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안식을 주신다고

 하면서도 짐을 내려주시지는 않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고 하시며 다른 멍에를

씌우려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 주인이 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씌우는 도구입니다.

당신의 종이 되고

소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안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기 위해

져야 하는 짐은 당연히

 십자가입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당신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0,38 참조)

그런데 그 십자가가 안식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십자가는 당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매 순간의 죽음입니다.

물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그 부활이 우리에겐

영원한 안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먼저

느끼지 못하면 생기지 않습니다.

부모님만 있다고 부모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참 부모님임을

믿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겐 그분께서 함께

계시는 안식을 먼저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었을 때

이전보다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멍에는

곧 벗겨지고 말 것입니다.

아프리카 성인식 중 잘 알려진

이런 성인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벌거벗겨놓고

정글 속 작은 공간에 머물게 하여

하룻밤을 지새우게

하는 것입니다.

혼자라고 무서워하거나

울면 안 됩니다.

그 곳에서 도망을 쳐도

안 됩니다.

주위에는 무서운 맹수들의

눈이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사수할 수 있다면

아침 동이 틀 무렵 자신의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이

활과 칼로 무장하고 자신

주위를 지키고 있는 것을

가장 먼저 보게 됩니다.

성인식이란 자신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교만함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주위에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으로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믿을 수 있는 마음.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베드로와

사도들을 끊임없이 두려움에서

건져내는 연습을 시키셨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죽음까지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분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이란 이렇듯 십자가 아니면

올 수 없는 행복이기 때문에

죽더라도 반드시 부활시켜

주실 분이 함께 계심을 믿어야만

얻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계약의 목적지가 안식입니다.

우리가 지켜야하는 계약은

십자가이고 그분이 지켜야하는

계약은 부활이요 안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워졌을 때

반드시 채워주심을 믿고

버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성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십자가를 져서 오는

 작은 안식을 느끼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을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루에

50번을 봉헌하라고 합니다.

봉헌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뜻에 맡겨 이웃을

사랑하는 연습을 50

하다보면 그만큼 저녁때는

큰 안식을 누립니다.

하느님은 좋으시고 말씀을

어기는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 계약을

체결해주시기 위해 우리 목에

멍에를 매어주고 짐을 져주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단 한 번도

우리를 비워진 채로

남겨놓지 않고 항상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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